뭔가 배신당한 느낌이네요 .....
1990년대만 해도 외신기자들 사이엔 커피숍과 현장이 다였다. 커피숍에 둘러앉아 정보를 주고받고는 현장으로 튀었던 시절이니까. 근데 요즘 외신기자들은 정보도 컴퓨터로 얻고 취재도 컴퓨터로 하면서 숙명처럼 컴퓨터를 달고 다닌다. 1990년대도 경쟁이야 치열했지만 그래도 외신기자들은 자동차를 나눠 타고 현장으로 달렸는데 이젠 말끔히 차려입고 호텔에 앉아 컴퓨터를 두드리는 독불장군들만 수두룩한 판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한때 방콕을 비롯한 주요 외신 기지들마다 기자로 들끓었던 커피숍들이 모조리 망해버리면서 외신판엔 인정머리마저 사라져버렸다. 1990년대 외신기자들에게 화두였던 '현장' 대신 '탐색'이 등장하고부터다.
특히 9·11사건 뒤로는 외신판에 나도는 정보란 게 음모론 수준이라 쉽사리 믿을 수도 없는데다, 제3세력들이 퍼뜨리는 방대한 정보 조작용 자료들까지 넘치는 통에 요즘 외신기자들은 현장보다 탐색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세상을 맘껏 주무르는 국제공룡언론사들이 1990년대를 기점으로 전통적인 개념이었던 뉴스 취재를 자사 이문에 맞춘 뉴스 생산으로 바꿔버리면서 외신기자들은 현장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현장의 시대가 저물면서 사실만을 쫓아야 하는 외신기자들이 위기를 맞고 있다. 달리 보면, 방대하고 교활해진 정보시대를 살고 있는 독자들이 위기를 맞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로 '제3의 눈'이 필요한 까닭이다. 일방적으로 주입당해온 정보들을 토해내고 가려내고 들춰내는 눈을 지금부터 '제3의 눈'이라 불러보자. 그 '제3의 눈'으로 사람을 보고 사건을 보고 역사를 보기로 하자.
무정책·무전략·무투쟁의 무기력한 과정 그 첫 번째 이야기로 요즘 국제사회에서 상한가를 치고 있는 인물이자 50년 군부독재 아래 변화의 기운이 일기 시작한 버마(공식용어는
미얀마, 88년 버마 국호를 바꾼 현
군사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버마'를 고집한다)를 읽는 중요한 밑감인 아웅산수찌를 들여다보자. 얼마 전부터 국제사회는 무슨 상을 받으러 줄기차게 외국을 드나드는 아웅산수찌를 저마다 국빈급으로 맞으며 열광해 왔다.
"민주화운동의 상징"(<한겨레> 2013년 4월24일치), "민주화 지도자"(<조선일보> 2012년 5월23일치), "민주주의 주창자"(<네이션> 2013년 6월6일치), "민주주의 아이콘"(<뉴욕 타임스> 2013년 6월7일치)….
국제언론도 그의 이름 앞에는 꼭 이런 현란한 수식어를 붙이며 열광했다. 그렇다면, 국제사회의 이 열광은 과연 온당한지 버마 현실 속에서 그 답을 찾아보자.
버마 독립 영웅 아웅산 장군의 딸로 태어난 아웅산수찌는 영국에서 공부한 뒤 1988년 어머니 간병차 랑군으로 돌아갔다가 우연히 민주항쟁에 휘말렸다. 시민들은 아웅산 장군을 투영시켜 아웅산수찌를 불러냈고 그이는 이내 지도자로 떠올랐다. 민주항쟁 동력으로 창당한 민족민주동맹(NLD)을 이끌고 1990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으나 정부 이양을 거부한 군부에 의해 오히려 2010년까지 가택연금과 석방을 되풀이했다.
외신에서 일해 온 내 기억에 따르면 아웅산수찌 열광 현상은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무렵 가택연금에서 처음 풀려난 그를 신문과 방송들은 저마다 대문짝만한 1면 머리기사로 다뤘다. 심지어 스포츠 잡지에다 항공사 기내보들까지 경쟁적으로 아웅산수찌를 실어날랐다. 오늘까지 이어지는 광풍의 시발점이 아닌가 싶다.
나는 외신기자로서 아웅산수찌와 두 번 단독 인터뷰를 했던 인연이 있다. 비록 내게 남은 건 그이가 모질게 쏘아대던 딱 한마디 말뿐이지만.
"나는 그 학생들에게 국경으로 가라고 한 적도, 총을 들라고 한 적도 없다. 내 비폭력 평화 노선과 다르다."
바로 아웅산수찌가 풀려났던 1995년, 그이 집 앞에 진 친 250여명 외신기자들을 제치고 첫날 단독 인터뷰를 따냈던 나는 적이 흥분한 상태에서 '민주주의의 어머니'라 불렸던 그이를 떠올리며 첫 질문으로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을 뽑아들었다. 1988년 민주항쟁 유산을 안고 국경 산악전선으로 빠져나와 반독재 민주화를 외치며 무장투쟁을 벌여온 학생군을 아웅산수찌가 아들딸로 여기며 따듯이 감싸 안으리라 여겼던 내 기대는 날카롭게 되받아치던 그 한마디로 산산이 부서졌다. 나는 너무 순진했고 아웅산수찌는 너무 무지했다. 버마 민족해방·민주혁명 전선을 취재하면서 봐왔던 국경 사람들의 우상 아웅산수찌는 현실이 아니었다. 나는 환상을 말끔히 지워냈다. 그로부터 그는 독선과 불통으로 다가왔고, 결국 무정책·무전략·무투쟁으로 이어지는 무기력한 과정을 보게 되었다. 그날 아웅산수찌가 들먹인 비폭력 평화의 뜻도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란 사실이 드러났다. 아웅산수찌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은 정치적 담판도, 그 흔한 대중시위도 한번 조직하지 못한 채 25년 세월을 날렸다.
그러다 2011년 테인 세인 대통령 정부가 등장해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오면서 아웅산수찌도 현실정치로 뛰어들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에게 씌워졌던 민주 면류관을 스스로 패대기쳤다.
"내 결정이 싫은 사람은 당을 떠나면 된다. 그것도 민주주의다."
2012년 4월 보궐선거를 앞둔 민족민주동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불참을 외치는 많은 이들을 향해 내질렀던 말이다. 알음알이로 알려졌던 "아웅산수찌는 곧 법이고 정책이다"던 말이 유튜브를 통해 세상에 튀어나오기도 했다. 아웅산수찌는 군사정권의 불법성을 들어 앞선 2010년 11월 총선을 보이콧하면서도 그랬듯이, 보궐선거 참가를 놓고도 민주진영과 단 한마디 상의도 없이 독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 무렵 버마학생민주전선 의장 탄케는 "아웅산수찌가 민주주의를 말할 때 우리는 독재자를 떠올린다"며 민주진영의 불편한 분위기를 전했다.
"대체 뭐가 잘못인가? 무슨 돈이든 좋은 데 쓰면 되지.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번다." 이건 올해 초 민족민주동맹이 군부와 선을 단 무기·건설 재벌들로부터 24만달러가 넘는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폭로되었을 때 아웅산수찌가 했던 말이다. 이즈음 시민사회에서는 아웅산수찌의 도덕성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화난 주민들의 펼침막 "아웅산수찌 출입금지" 아웅산수찌가 보궐선거를 통해 하원의원으로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은 뒤부터 보인 진짜 심각한 문제는 시민사회의 사활이 걸린 현안들에 대한 침묵이었다. 북부 까친분쟁이 좋은 본보기다. 1948년 버마 독립 때부터 자치를 외쳐온 소수민족 까친(Kachin)은 2011년 정부군이 휴전협정을 깨고 공격하자 아웅산수찌가 나서주기를 기대했다. 눈길 한번 주지 않던 아웅산수찌는 1년이 지나서야 말문을 열었다. "분쟁중인 불길 어느 쪽에도 기름을 붓지 마라. 내가 (정부를 향해) 뭘 강하게 비난해야 하나? 그게 인권 유린이라면 몰라도." 정부군 공격을 받아 국경산악으로 피난한 어린이와 여성 10만여명을 인권 문제로 보지 않는 아웅산수찌의 인식도 문제지만, 민주화와
소수민족 문제는 버마 사회의 두 기본모순으로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절대적인 사안임에도 침묵함으로써 시민사회의 반 아웅산수찌 기운을 스스로 증폭시킨 계기가 되고 말았다.
지난해부터
방글라데시와 국경을 맞댄 아라칸주에서 무슬림과 불교도의 충돌로 수백명 사상자를 내고 있는 로힝자(Rohingya) 인종·종교분쟁도 마찬가지다. 침묵으로 일관해 온 아웅산수찌는 올 6월 초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는 말로 현 상황을 악화시키고 싶지 않다"며 마지못해 한마디 했지만 분쟁의 본질과 해결책에 전혀 접근하지 못했다.
북서부 럿파다웅산 인근 주민들의 구리광산개발 반대투쟁을 대하는 아웅산수찌의 행보를 놓고는 시민사회 분위기가 실망을 넘어 분노로 치닫고 있다. 주민들은 버마 군부와 중국 기업이 합작한 광산개발계획을 중단하라며 지난해 8월부터 시위를 벌여왔다.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11월 말 경찰의 무력진압으로 승려를 포함한 중상자 50여명이 발생하고야 현지를 찾았지만 이미 화난 주민들은 '아웅산수찌 출입금지' 펼침막을 내걸었다. 그동안 민주화의 상징으로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성역이었던 그 이름이 최초로 시민들 손에 박살났다. 그럼에도 올 3월 다시 현장을 찾아가 "해외투자 유치를 위해 광산개발을 받아들이라"고 외쳐 주민들뿐 아니라 시민사회로부터도 큰 비난을 받았다. 1962년 네윈 쿠데타 반대투쟁을 이끌었던 아웅툰은 "자신이 야당 정치인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마치 대통령 행세를 하는 아웅산수찌는 이제 시민 편이 아니다"며 격분했다.
아웅산수찌가 왜 이럴까? 그 답은 간단하다.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6월6일 세계경제포럼에서 아웅산수찌는 "대통령이 되기 싫은 척한다면 거짓이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고 싶다"고 털어놓았듯이 일찌감치 2015년을 향해 표몰이에 나선 상태고, 버마사회 주류인 버마족과 불교도 그리고 군부와 재벌들 비위를 거스르고는 대권을 잡기 힘들다고 판단한 탓이다. 하여 재벌자금 사건에서도, 까친 분쟁에서도, 로힝자 분쟁에서도, 광산개발 반대투쟁에서도 침묵을 통해 다수표를 계산해 온 셈이다. 이건 달리 보면, 그의 현실적 한계가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버마 헌법에 따르면 배우자나 가족이 외국 국적을 지닌 이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 영국 국적을 지닌 두 아들 문제로 아웅산수찌는 발목이 잡혀 있는 것이다. 결국 개헌 문제다. 군부가 당연직 25% 의석을 차지한 상태에서 75% 이상을 얻어야 가능한 그 개헌이 군부 지지 없이는 불가능하고 차기 대통령도 바라볼 수 없는 형편이다.
"내가 군인을 아주 좋아하는 건 늘 아버지의 군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건 아웅산수찌가 올 1월 <비비시>에 한 말로 다급한 심정을 잘 드러내기는 했는데, 1962년부터 세계 최장기 군사독재 아래 신음해 온 시민들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시민사회가 요동치는 걸 보면.
문제는 말치레다. 오직 대통령 자리를 향해 달리는 하원의원 아웅산수찌에게 여전히 민주 수식어를 붙여가며 열광한다면 진짜 버마를 볼 수 없다. 이제 아웅산수찌에게 신성을 부여했던 그 우상의 유효기간이 끝났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됐다. 그게 민주화를 염원해 온 버마 시민들에 대한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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