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친절한 제령 사무소 9
게시물ID : panic_5043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미스키튼
추천 : 31
조회수 : 1345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3/06/16 21:50:53
정말 오랜만에 사무실로 출근했다. 어제 피곤에 쩔어 저녁나절부터 잠을 자기 시작했더니 새벽부터 눈이 떠졌다.
새벽에 보는 시장은 묘한 느낌을 준다. 약간 습진 공기와 부지런한 상인들이 가게 앞을 청소하며 뿌린 물자욱, 서늘한 새벽의 느낌에 뭔가 이제 막 잠에서 깨기 시작하려는 듯한 시장의 움직임이 나를 들뜨게 만든다. 사무실 건물의 정문은 아직 자물쇠로 잠겨 있어 상가와 통하는 뒷문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은 고요했고 간간이 청소 아주머니의 빗자루질 소리가 들렸다.

딸칵-

문을 열자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그새 먼지가 쌓인 책상과 테이블, 소파..
그리고 그 위에 누워있는 남자... 남자? 남자?!

“저게 뭐야?!”

눈을 비비고 다시 봤지만 한 남자가 긴 소파에 몸을 늘어뜨리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자고 있는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너무 당황스러워 어떻게 할까 안절부절못하는데 그 남자가 인기척을 느끼고 일어났다.

“우.. 누나 왔어요?”

누나? 누나?!

“누구세요?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하암- 저에요, 은호. 열쇠는 우리 누나가 줬고요.”
남자는 게으른 표정으로 기지개를 펴면서 얘기 했다.
은호...?
“설마, 너, 그 은호?”
 
*

은호를 처음 본 건 몇 년 전 은수의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내가 한창 행패를 부릴 때였다. 나는 당시 화가 나 발악에 정신이 아니었고, 그에 반해 은수는 침착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어디 계속 버텨 보시지! 내가 여기서 손 하나만 까딱하면 네 아빈지 뭔지는 영영 성불하지 못할걸?”
세상에 자기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미친 여자가 영정을 들고 패악질을 부리며 설치는데 가만히 앉아서 쳐다 볼 사람은 은수밖엔 없을 거다. 은수는 영안실의 온돌방 구석에 앉아 내가 하는 행동을 그냥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아마 은수는 나에게 뭐라 할 기운조차 없었을 것이다. 집안의 장녀로써 갑작스레 죽은 아버지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 만으로도 온 기운을 다 쏟았음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허! 지 부모가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 이거지?”
나는 손을 높이 들어 영정을 바닥에 내리쳤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도 그때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걸 인정한다.

와장창창!!!!!

액자의 얇은 유리가 깨지며 사방으로 조각조각 흩어졌다. 그리고 나는 씩씩대며 정말로 혼을 부유시킬 참으로 병풍 뒤로 가고 있었는데, 은호가 나를 막아섰다.
“너 뭐야?”
“행동이 지나치시군요. 무슨 사채업자라도 되십니까?”
내 기억에 당시 은호는 연한 하늘색 체크무늬 셔츠에 진한 남색의 교복바지를 입고 있었다.
“쪼그만 게.. 넌 참견 말고 니 일이나 해!”
이 말을 들은 은호의 한쪽 눈썹이 꿈틀했다. 나를 잠시 노려보더니, 갑자기 나를 들쳐 업고 나갔다.
“뭐야! 이 자식이 정말!” 
내가 작은 키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녀석은 나를 쉽게 어깨에 얹어 밖으로 끌고 갔다. 물론 가는 도중에 나는 그 녀석을 엄청나게 때렸었다. 하지만 녀석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병원 뒤편 쓰레기장에 나를 던져버렸다.

퍽-!

나를 온갖 쓰레기봉투 사이에 내동댕이친 녀석은 나를 보며 말했다.
“웬만하면 두 번 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저게 정말!”
 
나는 쓰레기장에서 나와 몸을 털고 다시 영안실로 들어갔다. 내가 들어서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처음엔 눈이 동그래졌다가 그 다음엔 코를 틀어막았다.
“뭘 봐! 냄새 나면 밖으로 나가든가.”
영안실 방으로 들어서는데 은수와 그 남자애가 나란히 앉아 향을 피우고 있었다.
“어차피 성불도 못할 노친네, 향은 피워 뭐해!”
그리고 나는 또 잡힐까봐 바로 관으로 뛰어 들어가려는데, 그 녀석이 또 나를 잡았다. 그리고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보고는, 다시 나를 들쳐 업어 쓰레기장에 던져버렸다. 이쯤 되면 웬만한 여자들은 두 손 두 발 다 들겠지만 (사실 처음 쓰레기장에 버릴 때부터 충격을 받겠지만) 내가 누군가. 나를 내동댕이치고 가는 저 녀석의 뒷모습을 보는데 가슴 밑에서 오기가 부글부글 끓었다. 나는 머리를 훑고, 다시 씩씩하게 영안실로 들어갔다.
 
은수와 그 녀석은 나를 보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번이나 쓰레기통에 처박혀 온 몸에 쓰레기를 덕지덕지 붙였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다시 오는 모습이 꽤나 황당한 모양이었다.
“너, 내가 절대로 용서 못 해! 안 해! 어서 물건을 나에게 넘기던지, 아니면 니 아버지를 가만 두..”
이번엔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 남자애가 나를 들쳐 업고 쓰레기장에 다시 던져버렸다. 그러기를 세 번, 네 번, 다섯 번이 지나자 이젠 그 녀석이 지쳐버렸다.

“은호야, 이제 그만해.”

그때까지 아무 말 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은수가 일어섰다.
“지안나씨라고 했죠. 나오세요. 얘기나 하죠.”
 
달캉! 은수는 말없이 자판기에서 커피 두 개를 뽑아 들었다.
“드세요.”
내 몸에서 진동하는 쓰레기 냄새를 하나도 못 맡는다는 듯, 은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한 채 나를 보며 말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저와 거래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 전에 저 녀석에게 당한 짓에 대한 사과부터 받고 싶은데요.”
“그럼 저희 아버지 영정에 대한 사과부터 받고 할게요.”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은수는 처음부터 그런 성격이었었다.
“은호는 원래 저렇게 막무가내인 아이는 아니에요. 이해해달라는 건 아니지만, 오늘 지안나씨의 행동이 그만큼 무례했다는 걸 말씀 드리고 싶군요.”
“그러니까 왜 나하고 거래를 안 하는 겁니까?”
은수는 커피를 마시려다 나를 흘끗 쳐다보고는 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글쎄요. 굳이 이유라면..”
계속 말을 할까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전 영능력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할 줄 아는 건 물건에 영기가 있냐, 없냐만 판가름 하는 정도죠. 그러니까 제 말은, 전 물건에 깃든 영기가 강한지, 약한지 또는 어떤 영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요?”
“그러니 제가 아무에게나 물건을 팔아버린다면, 운 나쁜 사람은 자신의 영기로는 감당 못하는 물건을 살 수도 있어요. 아니면 악질 악령이 씌인 물건때문에 저주를 받을 수도 있고요. 그럼 도리어 먹힐 가능성이 크죠.”
“근데요?”
“그러니까.. 그래서 저는 톱클래스의 퇴마사에게만 물건을 파는 겁니다. 먹힐 가능성이 희박한 사람들만 골라서 말이죠. 당신이 따진 것처럼 저는 돈 벌자고 일부러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파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근데 왜 저한테 못 팔아요?”
“..지금 제 말 다 흘려들었나요? 저는 혹시 모를 가능성에 대비해서 일부러 사람을 골라서 판다고 했잖아요. ...당신은 제가 물건을 팔 수준이 못돼요.”
그 말을 끝내고 은수는 다시 들어가려 일어섰다.
“잠깐!”
나는 들어가려는 은수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런 말이 소용 있을지는 모르지만.. 저는 운이 아주 좋거든요?”
은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내가 법적으로 효력이 있는 각서를 써줄게요. ‘나 지안나는 백은수에게 구매하는 물건으로 인해 부상을 입거나 사망하더라도 절대 책임을 묻지 않겠음’ 이렇게 쓰면 되죠?”
은수는 잠시 내 얼굴을 보더니, 아무 말도 않고 들어가 버렸다.
“대답 없는 건 오케이에요! 알았죠?”
 
나는 신나게 따라 들어가 영안실 옆 경비실을 뒤졌다.
“여기 어디쯤 있을 텐데~”
경비실 안의 낡은 철제 책상 서랍을 뒤져보니 예상대로 굴러다니는 재활용지와 인주가 있었다. 그걸 들고 씩씩하게 영안실로 들어서자 은호라는 녀석이 나를 노려보며 다시 내쫓으려고 일어섰다.
“은호야, 됐어. 그냥 앉아있어.”
그 대답에 나는 의기양양하게 지나가면서 그 녀석을 툭 치고 은수 앞에 앉아서 각서를 썼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은수와 난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업자가 되었다.
 
*

근데 그 때 딱 한번 봤을 뿐인 이 녀석이 왜 여기 있는 건지 도무지 상황 파악이 안됐다.
“하하.. 저 이번에 학교 졸업한 건 아시죠?”
그러고 보니 은수가 올해 초에 동생 졸업식이 있다며 시골집에 다녀 온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그래, 듣긴 들은 거 같은데.”
“여기서 좀 일하려고요.”
“응?”
“조수로 좀 써주세요.”
“뭐??”
얼굴을 보니 농담하는 것 같진 않았다.
“너 제정신이야?”
은호가 부스스한 머리를 긁으며 끄덕였다.
“누나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 집.. 아버지 돌아가시고 많이 기울었어요. 그러니까 나 여기서 일해서 돈 모아서 학교 갈래요.”
“..........”
나는 대답 대신 커피를 탔다.
“커피 괜찮지?”
“그럼요.“
찻잔을 가운데 두고 은호와 마주 앉았다.
“이거 다 마시면 집에 들어가.”
“네?”
“난 조수 쓸 생각 없으니까 가라고.”
“흠...”
은호가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누나가 만약 절 안 쓴다고 하면 이거 주라고 했어요.”
종이를 펴보니 각서였다.
 
백은수는 지안나가 본인의 동생 백은호를 조수로 고용할 시,
‘나 지안나는 백은수에게 구매하는 물건으로 인해 부상을 입거나 사망하더라도 절대 책임을 묻지 않겠음’
이라는 내용의 각서의 효력을 무효화 할 것을 약속 함.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 동안 예전의 각서 때문에 은수의 물건으로 인해 별일을 다 당하고도 한마디도 못했던 일들을 지금도 목구멍까지 뭔가 올라왔다 내려가곤 한다. 여우같은 것. 이걸 무기로 얘를 보내다니.
“...생각해볼게.”
내 말을 듣자마자 그 녀석은 바로 재빨리 몸을 움직여 우편물을 챙겼다.
“누나, 여기 우편물 있어요.”
얄미운 녀석. 나는 눈을 한번 흘기고 우편물을 받았다.
 
청구서, 청구서, 광고, 월간지, 의뢰장...

나는 의뢰장의 봉투를 뜯어 내용을 읽었다.
의뢰인은 중년의 아주머니였는데, 남편이 귀신에 홀려 노름에 가산을 탕진하니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밑에 의뢰비를 보니 간만에 보는 큰 액수였다. 근데 도박장 하우스에 여자는 못 들어갈 텐데.. 변장을 하고 들어가야 하나...?

“너 영능력은 있어?”
옆에서 벌써 걸레를 들고 책상을 닦던 은호가 대답했다.
“우리 누나보단 나아요. 딱 보면 어느 정도 구분이 가거든요.”
“그럼 할 줄 아는 무술은?”
“그건 걱정 마세요. 아시잖아요, 저 몸 하나는 강골인거.”
갑자기 이 녀석이 꽤 쓸모 있게 느껴졌다.
“포커는 칠 줄 알아?”
“아뇨, 도박은 잘..”
“걸레 두고 이리와 앉아봐.”
나는 서랍에서 카드 한 벌을 꺼내 앞에 앉았다.
“지금부터 넌 나한테 고용된 거니까, 내가 가르쳐주는 거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 기억해. 알았어?”
은호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나는 내 인생의 세 번째 골칫덩어리와 인연을 맺었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