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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게시물ID : freeboard_56041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코르크론
추천 : 1
조회수 : 71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1/12/19 17:19:53
오늘 12월 19일은 윤봉길 의사가 형장의 이슬로 돌아가신날입니다.
순국선열의 넋을 기리는 시간을 잠시나마 가져봅시다.



윤봉길 의사의 나라사랑과 그의 일생

도시락 폭탄으로 유명한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
윤봉길 의사의 생애와 그가 나라를 위해 했던 일들을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고려의 명장 윤관(尹瓘)의 후손으로 아버지 윤황(尹璜), 어머니 경주 김씨 김원상(金元祥)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우의(禹儀), 봉길은 별명이며, 호는 매헌입니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다음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고 최병대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와 한학을 공부하였습니다. 1921년 유학자인 매곡 성주록의 서당에 들어가 그의 문하생이 되었습니다.

# 교육 계몽 활동

1926년 서당에서 수학하던 중, 윤봉길 의사는 산책길에 건너편 공동묘지에서 여러 묘표(*무덤 앞에 세우는 푯돌)를 뽑아 들고 선친의 무덤을 찾아달라고 간청하는 무지한 청년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 의사는 묘표를 뽑아 무덤의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만든 그 청년의 무식이 나라까지 잃게 한 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습니다. 당시 의사의 나이는 19세였습니다.
의사는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윤봉길은 농촌계몽활동, 농촌부흥운동, 야학 활동, 독서회운동 등을 시작하였습니다. 1927년 농민독본 3권을 저술하였고, 1928년 부흥원 설립을 기념하는 공연인 우화 「토끼와 여우」의 공연과 월례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기사년 일기>를 지었습니다. 이어 위친계 조직, 월진회, 수암 체육회 등을 조직하였습니다.

# 홍커우 공원 의거

그리고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1931년 의사는 중국 상해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동향을 주시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일시에 던져 조국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임시정부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소원하던 조국독립의 제단에 몸을 던지게 된 것입니다.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야채장사를 하던 그는 1931년 겨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인 김구 선생을 찾아, 독립운동에 몸 바칠 각오임을 호소해 그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습니다. 의거 3일 전인 4월 26일 의사는 이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백범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것입니다.

거사를 위해 치밀한 준비가 진행되었습니다. 김구 선생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의 생일연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며, 협의 끝에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당시 폭탄은 도시락 모양과 물통 모양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폭탄을 도시락 및 물통으로 위장하려는데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 천황의 생일연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에서 식사가 제공되지 않으므로 일본측에서 이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각자 도시락을 지참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4월 29일 홍커우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고 삼엄한 경계가 겹겹이 처졌습니다. 단상 위에는 시라카와 대장과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 중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등 침략의 원흉들이 있었습니다. 오전 11시 40분 경 축하식 중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무렵 의사는 수통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빼 앞 사람을 헤치고 나아가 단상위로 폭탄을 투척하였고 폭탄은 그대로 노무라와 시게미츠의 면전에서 폭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단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가 부러졌으며, 시게미츠 공사는 절름발이가 되고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 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었습니다.

당시 총통이었던 장제스는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 투척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며 감탄하였고, 이는 그 동안 장제스가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한동안 침체일로에 빠져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이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습니다.

# 25세의 나이로 순국

체포된 의사는 가혹한 심문과 고문 끝에 그 해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받았는데, 이 때에도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며 대한남아의 기개를 잃지 않았습니다. 이후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 25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순국하였습니다.

윤봉길의사는 나라를 위한 사랑과 열정으로 행동하신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며 시인이십니다.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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