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염원하는 천주교 130190인 선언에 부쳐
암흑 속 빛나는 기억
“내 눈과 내 마음이 언제나 이곳에 있을 것이다.”(1열왕 9, 3)
1. 공개적으로 내버려진 무수한 생명(복음의 기쁨 53항)
망망대해도, 창공도 아니었다. 전시(戰時)도, 그렇다고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사고 역시 아니었다. 지킬 수도, 구할 수도 있었던 목숨들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속수무책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죽음의 생중계, 가히 첨단 문명의 이기로 가장 비문명적인 장면의 목격자가 된 셈이다. 근대 이성의 꽃이라고 믿었던 효율성과 국가 행정력을 총동원해 역사 이래 가장 체계적인 살상을 고안한 아우슈비츠의 역설이다. 그날 이후 우리가 목격한 것은 비단 국민의 안전을 지키지 못한 무능한 정부만이 아니다. 그것은 갈 곳을 잃어버린 이 시대, 무의미한 항해의 비참한 난파였고, 양도할 수 없는 가치인 ‘인간’을 아무렇게나 내다버린 정치공동체의 몰락, 곧 목적에 대한 수단들의 배반이다.
2. 가장 딱하고 절박해진 질문, 국가란 무엇인가
국정 최고책임자는 이미 자신의 취임사에서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데 정부 역량을 집중할 것”이라 공언했다. 맞는 말이다. 실제로 국가만이 시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킬 재원과 제도, 조직과 수단을 위임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정부 역량을 집중해야 할 그날, 정작 ‘안보’가 가장 필요한 그때, 국가는 어디에 있었는가. 밀양과 쌍용자동차, 저 멀리 강정과 한진중공업에 쏟아 붓던 그 엄청난 공권력들은 그날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사람들의 아우성과 눈물을 우악스레 틀어막던 그 집요하고 조직적인 국가의 의지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국가란 무엇인가. 이보다 딱하고 절박한 질문이 오늘 어디 있단 말인가.
3. 탐욕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회
참사로 열린 심연에서는 온갖 것이 올라왔다. 6개월간 우리가 목도한 것은 죽음의 대량화, 목숨의 계량화, 통곡의 장기화만이 아니었다. 절망도 뼛속 깊숙이 내면화되었다. 언제든 찾아오라던 대통령을 기다리며 76일간 풍찬노숙을 했던 유족들은 “앞으로는 대통령님께 아프다고, 서럽다고 눈물 닦아 달라고 애걸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말했다. 그것은 국가의 완벽한 부재에 대한 슬픈 고백이며, 자신의 토대와 목적인 인간(사목헌장 25항)을 내다버린 정치에 대한 깊은 환멸이다. ‘국가와 시민에 봉사할 수 있도록 권력을 달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꾸겠다’ 읍소했던 거대 정당들과 정치권력은 참사의 고통을 이용해 제 잇속 챙기기에 바빴다. 사법 권력은 참사의 원인과 구조실패, 국가의 역량 부재를 따지는 대신 선박 소유주와 직원들의 처벌 등으로 진상규명이라는 목적을 희석하는데 열중했다. 덕분에 참사의 진상규명은 고작 특별법의 위헌 소지에 대한 논란으로 환치되었다. 이에 언론이 충실히 부역했음은 물론이다. 정론직필은 고어(古語)가 되었고 오직 자극적 정보를 요구하는 소비문화의 생산지, 권력에 부식하는 욕망만 남았다. 가장 참혹한 것은 고통에 대한 연대와 기억이 ‘경제’를 해친다고 호도하는 천박함, 무절제한 탐욕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 시대다.
4. ‘예리코’ 길목에서 묻게 되는 교회의 길, 인간의 길
얼마 전 세월호 집회에 참석한 ‘죄’를 묻지 않는 조건으로 반성문을 요구 당한 한 대학생의 눈물을 기억한다. 그 눈물은 비단 소신을 저버릴 수 없는 한 양심의 저항만도, 고통에 대한 연대가 범법행위가 되어버린 현실에 대한 통탄만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숱한 무명의 힘없는 이들의 연대야말로 잘못된 국가를 바로 서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의 전언이다. 민의를 잃어버린 국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다름 아닌 이름 없는 양심들의 눈물이다. 때문에 저 한 양심이 흘린 눈물은 작금의 국가보다 위대하고 고귀하다. 이로써 이미 국가권력기구들의 불법 선거 개입으로 절차적 적법성을 훼손당한 현 정권은 참사 앞에 제 스스로 적법성의 결핍을 실천적으로도 증명한 셈이다. 무릇 “참된 민주주의의 목적은 모든 인간의 존엄, 인권 존중, 공동선의 증진”(백주년 48항)에 있으므로, 인간의 고통을 외면한 오늘의 국가는 목적을 배반한 수단일 뿐이다. 이로써 참사는 심연인 동시에 이 사회가 걸어온 모든 길에 대한 총체적 재고이자 문명과 야만,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갈림길이다. 길목에 다다른 것은 사회만이 아니다. 교회 역시 저 옛날 눈먼 이와(마태 10, 29), 천대받던 이(루카 19, 1), 강도 만난 이를 마주하게 되는(루카 10, 33) ‘예리코’의 길목에 다시 서게 됐다. 오늘의 고통은 교회에게도 ‘초주검’이 된 이를 보고 ‘길 반대쪽’으로 가버린 사제와 여정을 멈추고 상처를 싸매주던 사마리아인 사이, 위선적 거룩함과 신실한 ‘이웃’ 됨 사이의 갈림길이다.
5. 암흑 속 빛나는 기억
오늘 교회는 이 갈림길에서 “눈을 뜨고”(마태 10, 33), 변두리 사람을 초대하고(루카 19, 4), 피 흘리는 이들의 이웃(루카 10, 36), 그들의 ‘야전병원’이 되길 다시 한 번 다짐하려 한다. 인간 존엄과 공동선은 그 무엇보다 드높고 절대적인 가치이기에 그것이 “위협받을 때 예언자적 목소리를 드높여야”(복음의 기쁨 218항)함은 교회의 마땅한 몫이기 때문이다. 미진하기 짝이 없지만, 세월호 특별법 제정은 유족들이 흘린 눈물의 값진 열매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법이다. 그들의 눈물은 이제 ‘우리’들의 것이다. 왜냐하면 참사로 열린 심연은 단지 유족들의 운명을 뒤바꾼 사고 이전에, 이 사회의 내일을 위한 이정표이어야 하고, 동시에 믿는 이들에게는 참된 교회로 가는 ‘사건’이 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이 ‘초주검’의 고통 앞이 ‘이미’ 도래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교회의 종말론적 신앙 고백이 발하는 복된 자리임은 물론이다. 따라서 이 새로운 여정의 최종 목적지는 비단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 공동체, 무너진 인간 사회의 재건, 참된 교회로의 거듭남이다. 고통에 대한 ‘기억’이 ‘죄’가 된다면 기꺼이 죄인이 되겠다. 짙은 어둠이 드리울 때면 더욱 밝은 기억으로 빛나겠다. 오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교회는 이 기억의 연대에 끝까지 함께하길 요청한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의 초대에(10월 30일 주교회의 추계총회 담화문) 기꺼이 응답하며 아래와 같이 선언한다.
1) 희생자 가족의 아픔에 끝까지 동행하며 진실을 은폐하려는 모든 권력에 함께 저항한다.
2) 온 교회는 매일 4시 각자의 자리에서 희생자와 생존자, 이 고통에 함께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12월부터 304일간 그들을 기억하는 매일 미사를 봉헌한다.
3) 참사에 대한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을 ‘백서’를 발간하고 보편 교회와의 국제 연대를 통해 참사의 진실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한다.
4) 국민의 고통을 외면한 정치권력은 반드시 도태됨을 끊임없이 경고하며, 국가보다 위대한 저마다 지닌 양심의 고귀한 눈물을 언제나 신뢰한다.
2014년 11월 10일, 세월호 참사 209일째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천주교 연석회의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한국천주교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한국천주교 남자수도회·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 전국 15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