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가양동에서 2억원짜리 아파트 전세를 살고 있는 회사원 박 모씨(36)는 요즘 재계약을 앞두고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집주인이 전세금을 4000만원 올리는 대신 월세 20만원을 더 내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현재 박씨는 연 4% 이자를 내고 전세자금 1억원을 대출받아 한 달 이자 35만원가량을 내고 있다. 월세까지 내기엔 주거비 부담이 너무 크지만 주변에 마땅한 전셋집도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도장을 찍어야 할 판이다.
↑ 9일 서울 송파구 잠실동 한 중개업소 벽면에 월세 매물이 가득 붙어 있다. <김호영 기자>
서울 방배동 서래마을 고급 빌라에 사는 의사 최 모씨(40). '성공한 인생'이라며 주위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최씨지만 주거비용이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보증금 6억원에 월세를 350만원을 내는 데다 은행 대출이자 80만원에 관리비 70만원까지 합치면 최씨는 전체 수입 중 40%를 주거비용으로 쓰고 있다.
아무리 잘나가는 의사지만 정부 기준으로 최씨는 '렌트푸어'에 해당한다. 최씨는 지난해 송파구 잠실에 아파트 한 채를 구입했다. 들어가 살 생각은 없고, 그 집을 월세 놓아 지금 사는 방배동 집 월세를 일부라도 충당할 생각이다. 최씨는 "전체 소득 중 절반 가까이를 주거비용으로 쓰는데 이게 제대로 된 인생을 살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월세 시대'가 성큼 다가오면서 서민층은 물론 중산층도 월세 부담에 허리가 휘고 있다. 집이 크건 작건, 월세가 많건 적건 간에 세입자 부담은 전세로 살 때보다 늘어날 수밖에 없다. 과거 전세 시대에는 일정 수준 목돈을 빌려 전세로 살면서 이자만 부담하면 됐다면, 이제는 이자보다 훨씬 비싼 월세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4분기 기준 서울 지역 전ㆍ월세금 전환율은 6.12%로, 연 4% 초반대인 시중은행 전세자금대출 금리보다 2%포인트나 높다.
2억원을 대출받아 전세로 살 때는 한 달에 67만원 정도 이자를 내면 됐지만 같은 집을 월세로 산다면 한 달에 100만원은 내야 한다. 한 달 주거비가 33만원이나 늘어나는 셈이다.
소득 중 상당 부분을 주거비용에 쏟아부어야 하기 때문에 재테크를 위한 '종잣돈'을 마련하는 것은 점점 요원해진다.
특히 우리나라는 전체 소득에서 임대료가 차지하는 비중(RIR)이 사실상 30%를 향해 가고 있어 국민 부담이 급격히 가중되고 있다.
국토교통부 2012년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수도권 평균 RIR는 30.5%, 전국 평균 RIR는 26.4%로 전년 대비 각각 4.1%포인트, 3.3%포인트 올랐다.
선진국인 독일(30%)과 스웨덴(37%)보다는 낮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제시하는 적정 RIR 20%는 물론 임대료 보조 제도가 활성화한 유럽연합(EU) 27개국 평균 22.9%(2009년 기준)보다 높은 수준이다.
여기에 전체 소득에서 임대료를 제외한 난방비, 전기료, 상ㆍ하수도 요금 등 '주거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수도권 11.3%, 전국 11.7%로 분석됐다.
결국 집에서 살아가는 데만 수도권 기준으로 소득 중 41.8%(전국 38.1%)를 쓰고 있다는 얘기다. 서울연구원에 따르면 전체 소득 중 임대 지출(대출이자 포함) 비중 30%를 넘는 '렌트푸어'가 서울에만 26만6000가구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미윤 토지주택연구원 수석연구원은 "보증부 월세가 대다수인 우리나라 특성상 보증금을 월세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RIR가 높아져 순수 월세인 선진국과 수치를 단순 비교하긴 어렵다"면서도 "이미 국민이 체감하는 주거비용은 소득 3분의 1 수준에 육박해 과중한 부담을 지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진단했다.
월세 확산으로 실질적인 가계소득이 줄면 내수경기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란 염려도 나온다. 특히 '월세 시대'는 전세 중심이던 중산층 주거에 대한 새로운 도전으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박원갑 국민은행 부동산 전문위원은 "월세 시장 팽창은 주거비 부담을 늘리고 자본을 축적할 기회를 빼앗아 월세 푸어를 양산하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며 "두꺼운 중산층 형성을 가로막고 부동산으로 인한 계급화를 촉진할 수 있기 때문에 시장 안정을 위한 장기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