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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대량 살인마들 <BGM>
게시물ID : panic_5668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ementist
추천 : 16
조회수 : 8996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3/08/28 14:45:48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jbqh5
 
 
※ 조사기간 1911년~2011년으로 지난  한 세기간 조력자 없이 순수하게 혼자 힘으로 사람을 죽인 살인범 ※
 
(피해자의 명수에 따라 매겨진 순위입니다)
 
 
 
 
01. 테오필로 로하스 (1948~1963 / 콜롬비아) : 592+
02. 아딜슨 마르셀리누 로페스 (1961 / 브라질) : 500+
03. 루이스 가라비토 (1992~1996 / 콜롬비아) : 400+
04. 페드로 로페스 (1969~1980 / 콜롬비아, 페루, 에콰도르) : 350+
05. 해럴드 시프먼 (1975~1998 / 영국) : 250+
06. 자말 알 바투티 (1999 / 이집트) : 216
07. 김대한 (2003 / 대한민국) : 192
08. 후완린(1970?~1999 / 중국) : 190
09. 로버트 시지 (1944 / 미국) : 169
10. 이시카와 미유키 (1944~1948 / 일본) : 169
11. 존 보드킨 애덤스 (1946~1956 / 영국) : 163
12. 다니엘 바르보사 (1974~1986 / 콜롬비아) : 150
13. 아르핀 네세트 (?~1983 / 노르웨이) : 138+
14. 오빌 린 메이저스 (1993~1995 / 미국) : 130
15. 장피린 (2002 / 중국): 111
16. 진루차오 (2001 / 중국) : 108
17. 추와이밍 (1997 / 인도네시아) : 103
18. 페드루 로드리게스 필류 (1967~2003 / 브라질) : 100+
19. 자베드 이크발 (1996~1999 / 파키스탄) : 100
19. 랜디 크래프트 (1969~1983 / 미국) : 100
19. 세르히 트카흐 (1984~2005 / 우크라이나) : 100
22. 시카고 방화범 초등학생 (1958 / 미국) : 95
23. 개리 리지웨이(1982~2000 / 미국) : 90+
24. 도널드 하비(1970~1987 / 미국) : 87
24. 훌리오 곤살레스(1990 / 미국) : 87
26. 브루노 뤼트케(1928~1943 / 독일) : 86
27. 리처드 커팅엄(1977~1980 / 미국) : 85
28. 피위 개스킨스(1953~1982 / 미국) : 80+
28. 아마드 수라지(1986~1997 / 인도네시아) : 80+
30. 페터 퀴르텐(1913~1929 / 독일) : 79
31. 안데르스 브레이빅(2011 / 노르웨이) : 77
32. 크리스틴 길버트(1990~1996 / 미국) : 70+
33. 토미 린 셀즈(1980~1999 / 미국) : 70?
34. 로버트 픽튼(1997~2001 / 캐나다) : 67+
35. 양신하이(1999~2003 / 중국) : 67
36. 마르셀 프티오(1926~1944 / 프랑스) : 63
37. 우범곤(1982 / 대한민국) : 62
38. 사샤 피슈킨(1992~2006 / 러시아) : 61+
39. 마이클 스왕고(1981~1997 / 미국, 짐바브웨) : 60+
40.
도널드 파커 레이(1950~1999 / 미국) :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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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루이스 가라비토 (1992~1996 / 콜롬비아) :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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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콜롬비아 페레이라 지역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루이스 알프레도 가라비토는
알콜중독자인 아버지에게 상습적인 학대와 폭행을 당하였으며 두 명의 성인남자에게 강간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성인이 된 그는 술독에 빠져 살고 난폭한 행위를 일삼으며 이 마을 저 마을 옮겨 다니며 살아간다.
 
1998년 2월.
두 구의 헐벗은 소년의 시신이 콜롬비아의 제뉴아 교외에서 발견된다.
이튿날 불과 몇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세번째 시신이 발견되기에 이른다.
시신은 상당한 부패가 진행되어 있었으며 손이 묶여있었고 목과 성기 부분이 깊게 베이거나 절단되어 있었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성기부분에 이빨 자국이나 항문 성교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머지않아 시신의 주인공이 가난한 가정때문에 길거리에서 과일이나 껌을 파는 빈민층의 소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나
당시 여러 명의 연쇄살인마들이 겹쳐 활동하고 있었던 탓에 (.....뭔가요 이건.....)
발견된 시신이 페드로 알론소 로페즈 (일명 안데스의 괴물)의 희생자일 수도 있다고
추정하는 데에 그쳤다. (그러나 로페즈는 소녀만 죽였다.)
 
가라비토의 초기 수법은 단순히 돈을 쥐어주며 소년에게 접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아이들이 의심스러워했기에 곧 방법을 바꾸기로 한다.
가라비토는 쥬스나 케익을 사주며 소년들의 외모를 살폈다.
그는 너무 어두운 피부색의 아이는 선호하지 않았으며 부드러운 살갗을 가진 쪽을 좋아했다.
가라비토는 자신이 수도사, 행상인, 거지, 장애인 때로는 노인과 어린이 교육을 위한 단체의 대표라는 등
신분을 속이며 (복장까지 위장하여 신분을 속였다) 자신이 하는 일을 도와달라고 했다.
그 일이란 보통 오렌지 상자를 나르는 것, 소를 옮기는 것, 사탕수수를 추수하는 것이었으며
약물이나 도박에 중독된 아이들에게는 각각 마약과 상금을 준다고 하며 꾀기도 하였다.
그렇게 인적이 드문 교외로 아이들을 유인해 낸 뒤, 오래 걸어 지쳐있는 아이들을 덮쳐 강간하고 고문한 후 살해했다.
 
수사의 올가미가 서서히 죄어 오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거침없이 살인을 계속했다.
1996년 6월 8일 콜롬비아의 마을 보야카에서 소년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실종되었던 소년은 목이 참수되고 성기가 절단되어 스스로의 입에 물린 채 발견되었다.
이에 수색에 착수한 경찰은 소년이 실종 직전 마을의 가게에서 과자를 사주는 남자와 함께였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당시 마을에 머무르고 있던 이방인 가라비토를 탐문수사하였으나 그는 단지 과자를 사주었을 뿐이라며
 태연히 수사에 응하여 풀려났다. 이후 4일도 채 지나지 않아 그는 페레이라에서 또 다른 소년들을 살해한다.
 
1997년 12월. 경찰은 페레이라 근처의 한 무덤에서 25구의 시신을 무더기로 발견하였다.
이후 가라비토의 희생자임이 밝혀지나 당시의 경찰은 사탄숭배주의자의 만행이라고 추정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이후 1999년 4월 22일.
콜롬비아 툰바 지역에서 한명의 소년을 살해한 것을 끝으로 가라비토는 경찰에 체포된다.
최초의 혐의는 한명의 소년의 살해 용의에 지나지 않았으나 취조 도중 그의 살해수법이
그간 발견되온 수많은 시체들의 고문 흔적과 일치한다는 이유로 경찰의 끈질긴 추궁이 계속되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연쇄 살인을 실토하였다.
 
그는 자신이 그간 기록한 살해 일지를 경찰에 넘겼고
1992년~1996년의 5년간 60여개의 자치구를 돌며 140여명의 소년을 살해한 혐의를 고백하였다.
그러나 경찰은 그가 고백한 내용 이상으로 피해자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 확신하고 있으며
400여건 이상에 달하는 살인사건에 대한 유력 용의자로서 가라비토를 취급하고 있다.
 
결국 가라비토는 172명의 살인사건에 대해 138건에 대한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취해있었거나 신적 존재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다는 그의 거듭되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835년하고도 9일의 징역이 양형되었다. (남은 용의는 계속해서 재판이 진행중에 있다)
그러나 콜롬비아의 법률 상 사형제도가 존재하지 않고 30년 이상 범죄자를 수감할 수 없기에
항소심과 재심의 결과 고작 22년의 형벌을 받는데 그쳤다.
이는 당시 활동하던 다른 살인마들의 터무니없이 적은 형량과 함께 현지의 여론을 뜨겁게 달구었다.
 
 
 
 
04. 페드로 로페스 (1969~1980 / 콜롬비아, 페루, 에콰도르) : 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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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콜롬비아 시골에서 매춘부의 13자녀 중 한명으로 태어난다.
8세의 나이에 어린 여동생을 희롱했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난 그는 방랑생활을 시작한다.
음식과 쉴 곳을 제공해 주겠다던 중년의 소아성애자에게 속은 그는 외딴 건물에 끌려가 강간을 당한 후
미국인의 도움으로 고아원 생활을 하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돈을 훔쳐 탈출하고 만다.
 
이후 노숙자 생활을 시작한 그는 18세의 나이에 차량 절도범으로 7년의 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생활을 하지만
이틀만에 교도소 동료 네 명에게 집단 강간을 당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손수 만든 칼로 자신을 윤간한 죄수 네 명을 모두 살해한다.
그러나 정당방위가 인정되어 징역이 2년 추가됨에 그친다.
 
1978년 출옥한 그는 본격적으로 가학적인 살인에 몰입한다.
페루 전역을 돌아다니며 수없이 많은 여성을 강간하고 살해했다.
한번은 아야추코스 원주족의 9세 여아를 강간 및 살해하려다 발각 된 그는 생매장의 위기에 이르나
때마침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그는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
최종적으로 추방명령을 선고받은 그는 페루를 떠나 콜롬비아와 에콰도르를 전전하며 무자비한 살해 행각을 계속하였다
 (페루에서만 추방되면 뭐하나요.. 지구에서 추방되어야 할걸)
 
1980년 4월.
출소한지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는 에콰도르에서 12세 소녀를 납치하려다가 경찰에 붙잡힌다.
감옥에 갇힌 그는 처음에는 입을 다물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감방 동료에게 자신의 범행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감방의 동료는 사실 정부에서 심어둔 인물로 죄수복을 입은 사제였으며
그의 범행 고백을 낱낱이 전해들은 사제는 처음에는 그 진위성을 의심하였다 (터무니 없이 살해숫자가 많았기 때문에)
 
그의 말에 따르면 감옥에서 나온 뒤 2년 동안 에콰도르에서만 적어도 100명 이상을 살해하였으며
콜롬비아에서도 그만큼의 살인을, 그리고 페루에서는「훨씬 많은」살인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주로 마을의 시장에서 순진해 보이는 소녀를 골라 내어 사소한 장신구로 꾀어낸 그는
함정에 걸려든 여자를 유인하여 강간하며 목을 졸랐는데
여자의 눈에서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가능한 한 쾌락을 연장시키려고 노력하였다고 말했다.
이어 로페스는「여자를 죽이는데 5분에서 15분이 걸렸지. 여자가 죽었다는 확신이 들때까지 가능한 한 시간을 오래 끌며
즐겼다. 또 숨을 쉬는지 알아보려고 거울을 이용한 적도 있었는데 가끔은 처음부터 다시 죽여야했던 때도 있었다」고 전했다.
 
처음에는 그의 주장을 황당하게만 여긴 경찰도
로페스가 직접 경찰들을 인도한 외딴 곳에서 53명의 유해가 나오자 더이상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후 그는「안데스 산맥의 괴물」이라는 별명과 함께 세기의 살인마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으며
확인된 사항만 110명의 살해 혐의를 인정받고 에콰도르 최고 형벌인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 나는 천년에 한번 나올만한 인물이다. 어느 누구도 나를 잊지 못할 것이다 」   -페드로 로페스
 
 
 
05. 해럴드 시프먼 (1975~1998 / 영국)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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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절의 그는 어머니에게 유난히 집착했으며 10대 시절 어머니가 암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보며 큰 상처를 받는다.
일부 정신병 학자들은, 주치의가 모르핀을 주사해 어머니의 마지막 고통을 덜어내는 장면을 본 경험은
그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으며 이후 그 끔찍한 장면을 반복해서 재현하도록 부추겼다고 주장했다.
 
몇몇 교사들에게「조금 이상하다」라는 인상을 준 외톨이 소년이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청소년의 해럴드에게 두드러지게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가 정신병리학적 이상 증세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의사 학위를 받은 후 영국 북부의 토드머던에서 진료를 시작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해럴드는 진료 도중 몇차례 의식을 상실하곤 하였으며그럴 때마다 동료들에게 자신이 간질 환자라고 밝혔다.
동료들은 그의 설명을 곧이곧대로 믿었으나
이후 그가 허위로 처방한 고통완화제 페티딘을 자신에게 규칙적으로 투약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져
문서 위조와 약품 도난으로 체포되어 상당한 벌금을 물고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후 해럴드는 갱생원에서 약물 중독을 끊은 후 현업에 복귀하여 다른 의료기관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1992년 시설에서 나온 그는 하이드라는 작은 도시의 사설 진료소에서 일을 시작한다.
그의 친절한 태도에 환자들은 호의를 느꼈으며  나이 많은 노부인 사이에서
 안경낀 흰 수염의 인자한 의사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높아져 갔다.
 
그의 범행 수법은 늘 동일했다. 제법 건강해진 환자를 느닷없이 방문하여 모르핀을 다량으로 주입.
살해한 후에는 서둘러 장소를 빠져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어버린 사체를 발견한 환자의 친지들이
다급하게 연락해오면 현장에 다시 등장하여 사망증명서에 서명을 해주었고 자연적 돌연사라고 일러주었다.
 
지역 장의사의 딸, 데비 브램보프가 마을에서 무언가 불길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느낀 것은 1997년에 이르러서였다.
닥터 해럴드의 나이든 여자 환자들이 유난히 많이 사망하였고, 또 그들이 죽을 때 마다 깔끔히 옷을 차려 입은 채
편안하게 침대에 누워 있거나 의자에 쉬다가 죽은 것을 수상하게 여긴 그녀는 지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후 조사가 시작되었다.
 
경찰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경찰이 죽은 환자들의 사망증명서를 검토하고 있음을 눈치챈 해럴드는
이와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살인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살인 충동은 극에 달해있었고
매일 꼬박 꼬박 한 명씩 환자를 살해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1988년 6월. 그는 캐서린 그룬디 부인을 살해한다.
80세의 나이에도 유난히 건강하고 활발했던 그녀는 시장을 지낼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살해 이후 해럴드는 그녀의 이름으로 자신에게 전재산 40만 파운드를 물려준다는 조잡한 유언장을 조작하였으나
이러한 조작은 그녀의 딸에 의해 손쉽게 간파당했다. 이후 그녀의 신고에 따라
경찰은 그룬디 부인의 사체를 발굴하여 부검하기에 이르렀고 시체에서는 치사량의 모르핀이 검출되었다.
 
즉각 해럴드 시프먼은 체포되었으나 하이드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웃이자 신뢰하던 의사가
살인을 일삼던 살인귀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소매상 주인들은 자신들의 가게 창에 「우리는 믿을수 없다」라고 적은 전단을 내붙이곤 했다.
그러나 2000년 1월 시프먼이 15명을 살해한 혐위로 유죄 선고를 받자 더이상 잔혹한 진실을 마주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영국 정부의 추가 조사가 이루어져
그의 소행으로 여겨지는 의문의 사망자 숫자는 최소 279명 많을 경우에는 345명에 달한다는 충격적인 조사 결과가 나왔으며
법정에서 검사는 이렇게 언급했다.「그는 삶과 죽음을 좌우하는 궁극적인 힘을 실험했고 그러한 행동을 지나치게 반복하며
생명을 빼앗는 극적인 일이 자신의 취향에 맞다는 사실에 깨달았음이 분명하다」
 
2000년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는 2004년 1월 감방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07. 김대한 (2003 / 대한민국) :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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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3분 경.
대구 대곡역에서 안심역 방향으로 운행하던 제 1079열차 (제 18편성) 의 5호차의 경로석에 앉아있던 김대한은
중앙로 역에 열차가 진입하고 있을 때 페트병 2개에 나누어 담은 휘발유 2리터에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당시 주위 승객들이 위험을 감지하고 몸싸움까지 벌이며 그를 제지하려고 하였으나
그는 순식간에 불 붙은 페트병을 그대로 내던졌고 전동차 내에는 금세 불이 번졌다.
 
당시 1079열차는 대구시 중구 남일동 대구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 구내에 정차 중으로
불은 순식간에 퍼졌으나 대부분의 승객들은 열려 있던 출입문을 통해 대피하였고
당시 1079호 전동차의 기관사인 최정환 (당시 31세) 도 화재를 감지하고 대피하였다.
 
그러나 최정환은 지하철 사령에 화재 사실을 즉각 보고하지 않았으며
아무런 보고도 전달받지 못한 사령에서는 화재 경보가 울리자 오작동으로 치부, 무시해 버려 운행 중지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곧이어 정상 운행 중이던 대곡행 제 1080열차 (제 5편성) 이 중앙로 역에 도착하기에 이르렀고
1079 열차의 불은 정차 중이던 1080 열차에 옮겨 붙게 된다.
 
이후 피해를 극심하게 한 것은 뒤늦게 화재 상황을 파악한 사령의 조치로
늦게서야 상황을 파악한 사령은 1080열차에 떠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때는 이미 늦어 화내로 역내 전기가 단절되어 전동차의 운행은 불가했으며 역안 전등도 모두 꺼진 뒤였다.
사령에서는 긴급히 급전을 시도하였으나 급전되지 않았으며 그 사이 화재는 1080열차에 맹렬히 번져가고 있었다.
 
사령에서는 1080 열차의 기관사 최상열 (당시 37세)에게 출입문 개방과 승객에 대한 대피 유도를 지시했으나
공황 상태에 빠진 기관사 최상열은 승객의 안전을 확인하지 않은 채 마스터 키를 빼들고 탈출해버렸고
순식간에 전력 공급이 끊긴 열차는 출입문이 닫혀버려 142명의 승객이 갇히게 되었다.
 
차량에는 출입문의 비상 개방 장치가 갖추어져 있었으나 위급한 상황 속에서 사용할 수 있는 승객이 부재했을 뿐 아니라
차내에는 그 사용법이 명확이 적혀 있지도 않아 차내에 있던 수많은 승객이 유독가스에 질식하거나 불에 타 사망하였다.
실제로 화재의 시발점이었던 제 18편성보다 불이 옮겨 붙은 제 5편성에서 더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사고 발생 2시간 뒤 방화 용의자는 대구시 북구 노원동 조광병원에서 치료 도중 경찰에 체포되었다.
같은해 8월 6일 열린 공판에서 방화범 김대한에 대하여 검찰은 사형을 구형하였으나
그가 심신 장애는 없으나 범행 당시의 정신 상태가 온전치 못했던 점,
또한 직접 방화한 제 18편성에서는 인명피해가 극심하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여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이듬해,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1080열차의 기관사 최상열은 열차의 출입문을 닫아버려 승객들의 탈출을 막아 더많은 사상자를 내게 한 혐의로 금고 5년이
1079열차의 기관사 최정환과 가장 먼저 화재 사실을 연락받은 관제사 방정민(당시 44세)에 대해서는 초동 조치를 적절히
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각각 금고 4년이, 또한 나머지 관제사들에 대해서는 금고 1년 6개월 ~ 3년이 선고되었다.
 
 
 

 
10. 이시카와 미유키 (1944~1948 / 일본) :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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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월 15일.
동경 신주쿠 구 와세다 파출서 소속 경찰관 2명이 순찰 도중 자전거로 몇개의 귤 박스를 나르는 장의사 N씨를 발견한다.
이를 수상히 여긴 경찰이 불심검문하여 박스를 열자 그 안에는 영아의 사체가 면셔츠와 기저귀에 쌓여 들어 있었다.
「고토부키 산파원에서 부탁을 받아 화장하러 가는 중이다」라고 증언한 N씨는
문제의 고토부키 산파원에서 4구의 시체 처리를 의뢰받았으며, 전년도 8월부터 총 20구 이상의 사체를 옮겨왔다고 증언하였다.
이를 수상히 여긴 경찰은 N씨가 최근에 옮긴 6구의 시체를 해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중 3구는 폐염 2구는 동사 1구는 아사이며 6구 모두 음식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하여 영양실조 상태였음을 확인한다.
 
이어 고토부키 산파원을 불시에 덮친 경찰은 그곳에서 7명의 아이를 발견한다.
그 중 1명은 이미 사망 후였으며 나머지 아이들은 영양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고,
난방이 적절히 보장되지 못하는 생활을 하고 있어 영양실조와 동사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산파원의 경영자 이시카와 미유키(당시 51세)와 그의 남편 타게루(당시 55세)를 취조한 결과,
지금껏 산파원에 맡겨진 아이들은 240여명에 다다랐으며, 그 중 169명의 아이가 사망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부부는 산파원을 경영하면 정부로부터 유아용 주식배급을 수령가능하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아이들을 무조건 맡기로 했던 것.
그러나 맡겨진 아이에는 음식을 주지 않았고 질병에 걸리면 그대로 방치하였다.
부부 이외의 직원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육아에 필요한 시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목욕과 같은 청결 상태 또한 엉망이었으며 난방과 관련된 설비가 제대로 갖추어 지지 않아 얼어죽은 아이가 상당수에 이르렀다.
 
이에 아이가 죽으면 장의사에게 부탁하여 몰래 처리하거나
부모가 살아있는 아이가 죽으면 고아가 죽은 척 위장하여 배급품을 타갔다.
정부로부터 받은 배급품은 빼돌려 팔아버림은 물론, 아이의 사망 후 지급되는 장례식용 술까지 챙겨두는 잔악함을 보였다.
 
부부는 이렇게 100만엔에 상당하는 돈을 번 후, 공무원을 뇌물로 매수하여 호적을 마음대로 꾸미고 사망신고를 위조하였으며
위생상태 조사 또한 손쉽게 넘어가는 등 각종 비리를 일삼았던 것이다.
이 경악스런 사건의 전말이 일파만파 퍼져나가자 정부는 7월 13일
「산파」를「조산부」라 칭호를 변경하였으며 국가시험제도를 도입하여 전문 의학 지식을 배우도록 하였다.
또한 이 사건의 여파로 피임약의 사용과 경제적 이유에 한한 임실중절의 허가가 인하되었다.
 
1948년 10월 11일 동경 법원은 미유키에 대하여 징역 8년, 남편인 타케루에게는 징역 4년의 형벌을 선고하였다.
이에 항소한 미유키와 타게루는 1952년 4월, 징역 4년과 2년의 감형을 각각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나는 성심성의껏 아이들을 돌보았다. 아이를 맡기러 온 어머니들에게 당신의 곁에 두지 않으면 아이가 죽을 것이라고 몇번이고
경고하였지만, 엄마들은 막무가내로 아이를 맡기고 떠났다. 그러니 아이가 죽는 것도 당연하다.」   -이시카와 미유키
 
 
 
 
11. 존 보드킨 애덤스 (1946~1956 / 영국) :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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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남동부 이스트 본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이 뚱뚱한 의사가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56년 7월.
49살의 미망인 보비 할레트 여사가 1000펀드의 수표를 애덤스에게 건낸 후 혼수상태에 빠져 그대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녀는 또한 죽기 며칠 전 자신의 롤스 로이스를 그에게 증여한다는 유언장을 작성하였던 것으로 드러난다.
아무리 생전에 의사에게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나 이와 같은 일련의 행위는 과하지 않나,
하고 의심을 품은 할레트 여사의 친구가 경찰에 신고하며 희대의 연쇄살인의 전말이 밝혀지게 된다.
 
친구의 신고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 경찰은
이스트본 지역에서 사망한 400여명의 유언장 조사에 착수하며 수사에 본전을 가했다.
탐문 수사 결과에 따르면 변호사와 은행 관계자들은 이렇게 증언했다.
애덤스는 평소 환자에게 재산을 자신에게 증여하도록 유언장을 변경할 것을 빈번히 강요하였고
빈사 상태의 환자 손을 쥐어 싸인을 하게끔 유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유언장의 내용과 수표 액면을 임의로 고치는 짓도 서슴지 않았으며
어느 노부인에게는 그 남편이 빈사 상태임을 확인하고「당신 집을 나에게 증여하면 가족을 돌보겠다」라며 협박하였다.
 
조사 결과 132통의 유언장으로 4만 5000파운드가 그에게 증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그는 살인에 대해서도 혐의가 진했다.
경찰의 수사 결과 이스트 본에서 과거 20여년에 걸쳐 자산가인 여성이 다수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밝혀졌으며 그 예로
1950년 킬거 부인을 왕진한 애덤스는「푹 쉬도록 해드릴게요」라며 간호사가 놀랄 정도의 양을 투여,
결국 이튿날 혼수상태에 빠진 킬거 부인은 다음날 사망하고 만다.
그리고는 그녀의 유언장대로 애덤스에게는 2000파운드가 양도되었다.
 
이와 비슷한 수법의 살인들이 잇달아 표면위로 드러나던 가운데
1957년 3월, 애덤스는 결국 모렐 부인의 살해 용의로 기소되었다.
그에게 혐의 내려진 살인 미수 사건은 160여개에 다다랐으나
그의 저지른 대부분의 살인은 기밀하고 영악하여 입증하기가 어려웠으며 사체가 대다수 화장되어 물증을 확보할 수 없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그에게 내려진 살인 혐의는 상대적으로 간호사의 증언이 확보 가능했던 모렐 부인의 살해가 유일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1957년 4월 9일, 증거 불충분으로 44분만에 무죄를 선고받는다.
 
이후 1983년 6월 30일. 사냥을 하던 애덤스는 미끄러져 엉덩이뼈가 골절되어
곧바로 이스트번 병원으로 후송되나 흉부 감염으로 번져 7월 4일 사망하였다.
 
 
 
14. 오빌 린 메이저스 (1993~1995 / 미국) :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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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애나 주 버밀리언 군립병원의 간호사로 근무하던 그는 6명의 환자의 혈관에 청산가리를 투여하여 살해하였으며
이외의 여러 병원에서도 비슷한 수법으로 도합 130명에 이르는 환자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잦은 사고(실제로는 살인)로 간호사 면허가 취소되어 꽃집 등을 경영하던 그는 1997년 범행이 들통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8. 자베드 이크발 (1996~1999 / 파키스탄) :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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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37세의 부유한 파키스탄 인 자베드 이크발은 젊은 하인 두 명에게서 흠씬 두들겨 맞는다.
그는 경찰에 위와 같은 사실을 알렸으나 그의 고발은 철저히 무시되었고 오히려 그가 남색을 했다는 고소를 당하게 된다.
이때부터 이크발은 자신을 미워하는 세상에 기필코 복수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는 정확히 아이들 100명을 죽이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한다.
 
이후 6개월 간 이크발은 어린 10대를 꾀어 라호르에 있는 자신의 작은 아파트로 유인했다.
그곳에서 먹거리를 주고 사진을 찍은 뒤 잠자리를 제공해준 그는 아이들이 잠들면 청산가리로 질식시켰다.
이후 아이들의 몸뚱이를 염산이 가득찬 통에 넣어 녹였고 나머지 유해는 골목길의 하수구에 버렸다.
이와 같은 작업의 한편, 이크발은 아이들의 옷과 신발을 보관하였으며 희생자에 대한 기록을 꼼꼼히 남겨두었다.
아이들의 이름, 나이, 죽은 날짜는 물론이고 심지어 시체 처리 비용 (염산 비용까지 포함하여 대략 1인당 2.4달러) 까지 기록했다.
그는 자신의 목표 100명의 살인을 달성한 뒤 경찰에 자수했다.
 
2000년 3월.
유죄가 확정된 그는 자신의 잔혹한 범행에 걸맞는 처벌을 받게 된다.
그는 희생자의 유족 앞에서 목이 졸리고 100여 조각으로 토막난 뒤 염산에 녹여질 예정이었다.
그는 상고를 하였으나 결국 2001년 10월. 자신의 감방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자살이었다.
 
「 나는 500명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100명만 죽이기로 다짐했기 때문에 그 선을 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 때문에 우셨다. 나는 100명의 어머니들이 자기 자식때문에 울게 하고 싶었다 」
 
 
 
19. 랜디 크래프트(1969~1983 / 미국) :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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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에서 태어난 그는 외아들이었으며 3명의 누이가 있었다.
1960년대에 그는 머리를 기르고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누누히 밝혔으며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자신만의 삶에 더욱 몰두하여
낮에는 높은 급여를 받는 유능한 컴퓨터 컨설턴트로 일하고 밤이면 연애할 남자를 찾아 술집을 전전했다.
결국 그 남자들은 언제나 극악무도하게 능욕당한 뒤 시체로 발견되곤 하였다.
 
1983년 체포될 때까지 크래프트는 100여명에 이르는 젊은 남자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희생자는 13세에서 30세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연령대였으며 그들은 끔찍한 고문에 시달린 후 살해당했다.
발견된 사체의 대부분이 거세 당하거나 칵테일 용 막대 혹은 연필 등이 성기에 꽂혀 있었으며
칫솔에서 나뭇가지에 이르기까지 온갖 잡다한 물체들이 비역질의 흔적을 남겨두었다.
라이터로 눈알이 지져진 사체도 더럿 있었으며 젖꼭지를 물어뜯긴 이들도 많았다.
이러한 시체는 대개 캘리포니아의 고속도로변에 버려졌다.
 
1983년 5월 14일.
크래프트는 음주운전을 한 혐의로 캘리포니아 고속도로 순찰대의 경찰 두명에게 검문을 당한다.
경찰은 차량의 조수석에 목이 졸린 채 죽어있는 젊은 남자의 시신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크게 놀랐다.
즉시 차량 수색에 들어간 경찰은 자동차 깔판 밑에 숨겨진 폴라로이드 사진 47장을 발견하였고
사진 속에는 죽었거나 의식을 잃은 듯 보이는 벌거벗은 남자들이 찍혀있었다.
또한 트렁크 안에서 찾아낸 작은 서류 가방에는 일련번호가 매겨진 목록이 들어있었는데
그것은 크래프트가 희생자들에 대해 꼼꼼히 기록한「점수표」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그는 점수표 살인자 (Scorecard Killer)로 불리며 세간에 악명을 떨쳤다.
 
곧바로 경찰에 체포된 크래프트는 이후 16건의 살해 혐의가 인정되어 사형을 구형받는다.
센켄틴 형무소에 수감되어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와중 1993년.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 저자에게 자신을「병을 앓고 비뚤어진 것」으로 묘사하여
「장차 직업을 구할수 있는 가능성」을 말소해버렸다고 주장하며 6000만 달러의 소송을 걸었다.
그러나 판사는 사형을 앞둔 연쇄살인범이 취업할 가능성은 없다며 소송을 기각해버렸다.
 
2000년 8월 11일. 랜디 크래프트는 사형되었다.
 
 
 
23. 개리 리지웨이(1982~2000 / 미국) :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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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평범한 페인트공이었던 그는 극심한 마더콘에 매춘부를 매우 혐호하였다.
이후 그는 명랑한 사회 재건을 위해 매춘부를 말살해야한다는 괴악한 망상에 젖어
1982년부터 잔악한 범행을 단행하기 시작한다.
 
살해 후 언제나 시신을 근처의 그린 리버에 유기하곤 하여「그린 리버 살인마」로 더욱 악명을 떨치기도 했던 그는
검거된 2001년까지 20여년간 90여명을 웃도는 여성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는 워낙 치밀하고 계획적인 범행을 거듭하여 증거가 될만한 사건의 실마리를 완벽히 제거하였기에
그의 범행은 20여년간 미궁에 빠져있었으나 과학의 발달로 DNA검사를 통해 검거라는 쾌거에 이르게 되었다.
 
실제 규명된 살인만으로도 48건에 달하여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현재까지 복역 중에 있다.
그는 검거 당시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매우 사랑한다」고 발언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31. 안데르스 브레이빅(2011 / 노르웨이) :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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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이었던 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평범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비록 부모가 한 살 때 이혼했으나 브레이빅은 스스로 작성한 인터넷 선언문에서
「 나는 책임있는 사람들 곁에서 우수한 가정교육을 받았다 」 라고 주장했다.
그의 아버지 또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아들은 어릴적 평범한 소년이었다.
다만 다른 사람과 말을 잘 하는 아이는 아니었다」라고 회고하였다.
 
1999년. 브레이빅은 우파 성향의 노르웨이 진보당에 가입하며 지역 청년지부에서 활발한 활동을 개시한다.
그는 7년여간 정당에서 활동하다가 2006년 탈되하였다. 이유는 진보당이 다문화주의에 호의적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정당을 탈퇴한 2006년부터 브레이빅은 극우파 성향의 극단주의자로 치닫게 된다.
특히 반 다문화와 반 무슬림 문화에 심취하며 그의 극단적 성향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 2009년.
노르웨이의 시골마을에 정착한 그는 폭탄 테러를 계획하기 위해 비료공장을 차리고 농부로 위장하였으며
작은 규모의 농지를 매입하여 주위 사람들의 의심을 받지 않고 6t에 이르는 비료와 화공약품을 사들이는 등
테러를 위한 준비를 한걸음씩 밟아나갔다. 또한 사냥 클럽에 가입하여 총기류를 구입할 수 있는 허가도 받아 두었다.
 
드디어 2011년 7월 22일.
그는 이제껏 계획해왔던 모든 파멸적 테러를 거행키로 결심한다.
우선 그는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 중심가 정부 청사 부근 빌딩으로 향한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총리의 집무실 근처에서 폭탄이 터졌다.
 
오후 4시 50분. 유유히 테러 현장을 빠져나온 브레이빅은 오슬로 근교 호수에 자리잡은 작은 섬 우토야로 향했다.
우토야에서는 노르웨이 노동당이 주최하는 여름 캠프가 한창이었으며 대부분 청소년인 600여명의 캠프 참가자들은
소나무로 둘러쌓인 아름다운 섬에서 한가한 오후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경찰관 제복을 갖춰 입은 30대 백인 남성이 다가와
「오슬로 폭탄 공격으로 인해 행사장 안전 점검을 해야 한다. 당신들은 안전하다.」라고 말하며 희생자들을 불러 모았다.
영문도 모르고 집합한 수백명의 사람들을 향해 그는 느닷없이 자동 소총을 꺼내들고 무차별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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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별 살인이 자행된 우토야 섬)
 
그때부터 브레이빅의 일방적 학살은 105분 동안이나 이어졌다. 평화롭던 섬은 느닷없이 생지옥으로 변했다.
총소리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호수로 뛰어들거나 숲 속의 덤불 혹은 바위 뒤로 숨었지만
브레이빅은 차분한 걸음걸이로 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람이 보일 때마다 조준 사격을 가했다.
생존자들은 브레이빅의 태도는 초지일관 차분했으며 절대 뛰지도 않았다고 증언했다.
 
브레이빅의 학살이 시작된지 20분, 이미 수십명의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 상황 속에서
느닷없이 정적이 찾아들었다. 죽음의 고요함이 10여분간 이어졌고 이윽고 사람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경찰 테러 진압팀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안전합니다. 육지로 돌아갈 고속정이 준비되어 있으니 어서 나오십시오」
 
공포에 질려 숨어있던 청소년들에게 실낱같은 희망의 빛이 찾아들었다.
이윽고 죽음의 공포에서 탈출했다고 생각한 피해자들은 바위 틈, 나무 뒤에서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 진압팀을 사칭하며 그들을 불러낸 장본인은 살인귀 브레이빅이었다.
한동안 적막만이 가득했던 섬에 또다시 총성과 절규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재개된 공격에 미처 도망치지 못한 사람들은 물에 뛰어들거나 엎드려 죽은 척 하기도 했다.
이에 브레이빅은 물 속으로 뛰어든 사람을 향해 또다시 총격을 가하거나
엎드려 죽은 시늉을 하는 사람들의 머리를 일일이 엽총으로 쏘는 확인사살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호숫가에 나와 있었던 생존자 니콜린 스키는 끔찍한 당시의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머리 위로 총탄이 몇발 스쳐지나가더니 내가 숨은 바위 위로 브레이빅이 올라선 것이 느껴졌다.
그는 예닐곱가지의 환호성을 질러가며 물에 뛰어든 사람들을 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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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피해자 (흰색 원) 와 그를 겨누는 브레이빅 (빨간 원), 그리고 처참하게 살해된 희생자들」
 
 
한편 경찰은 우토야 섬에서 첫 총성이 울려퍼진지 48분만에 35km나 떨어진 오슬로에서 출동을 시작했다.
그마저도 헬리콥터를 이용하지 않은 채 경찰차로 이동하였으며
경찰 특공대가 우토야섬이 보이는 호숫가에 도착한 것은 오후 6시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나 경찰특공대는 여기서 또 섬으로 건너갈 배를 찾지 못해 십여분 이상 우왕좌왕하다가
오후 6시 20분, 즉 사건 발생 이후 90여분이 지나셔야 우토야섬 선착장에 도착했다.
총 77명을 살해한 희대의 살인귀 브레이빅을 체포한 것은 이보다 15분이나 더 지나서였다.
 
이와 같은 경찰의 늦장 대응은 수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으며
브레이빅 자신도「경찰이 생각보다 늦게 도착해 놀랐다」고 밝혔다.
 
이후 2012년 8월 거행된 공판에서 그는 최대 21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정신상태가 이상으로 판정될 경우 교도소 수감 대신 정신병동에서의 치료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5명의 판사들은 만장일치로 범행 당시 그의 정신상태가 정상이었다고 판결했다.
 
재판장이 선고문을 읽어내려가는 내내 그는 시종일관 입가에 웃음을 보였으며
「더 많은 사람을 살해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발언했다.
이어 그는「보다 많은 사람을 죽이지 못한 것에 대해 모든 투쟁적 민족주의자에게 사과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어떡하면 좋을까요 이 XXX.... @#$%^&*(@$%&..... )
 
 
 
 
34. 로버트 픽튼(1997~2001 / 캐나다) :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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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국립경찰(RCMP)는 1997년부터 2001년에 이르기까지
벤쿠버 시내 슬럼가 창녀를 대상으로 60여명의 실종 여성에 대한 수사를 계속해오고 있었다.
경찰은 실종 여성 사건 수사에 나선지 2년여 만인 2002년 2월.
목격자 증언 등을 토대로 수사망을 좁혀 밴쿠버 교외 포트 코키틀람에서 돼지 농장을 운영해온 로버트 픽튼을 검거했다
 
이후 추가 수사를 통한 증거확보 과정에서 희생자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그 잔혹한 범죄수법과 엽기적인 시체처리 방식이 밝혀지며 캐나다 전국을 경악케 했다.
조사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활동 거점인 돼지 농장에서 60여명 이상에 달하는 매춘부와 마약중독자를 납치하여
교살과 신체 절단의 방법 등으로 잔악하게 살해한 뒤 그 시체를 돼지에게 비료로 주었다.
더욱이 인육을 먹은 돼지고기가 시중에 유출되었다는 엽기적인 사실이 발각되며 세계를 놀래켰다.
 
한편 범행 현장에서 확보된 33명의 여성 DNA를 토대로
그는 26명의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기소 건수는 현재 계속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후 2007년 12월 9일 종신형을 양도받은 그는 25년간 가석방이 금지되어 수감 생활을 계속해나가고 있다.
 
 
 
 
37. 우범곤(1982 / 대한민국) :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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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11월 5일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경찰인 아버지를 동경하여 훗날 경찰관이 되겠다고 굳게 다짐한다.
그러나 중학교 진학 이후 내성적인 성격으로 교내 생활에 적응하지못한 그는 어느덧 19살 이 되었고
진급을 목전에 앞둔 아버지가 대장암으로 사망하며 가세는 기울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화를 참지 못해 유리창을 깬 후 그 파편으로 배를 긋는 등 포악한 행동을 일삼게 되었고
이러한 와중 해병대에 입대하게된 그는 복무중 특등사수로 뽑힐 정도로 우수한 사격능력을 선보인다.
이후 존경하던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경찰관이 된 그는 초임지인 부산 남부경찰서 2 파출소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근무 당시에도 피의자를 함부로 대하거나 자백을 강요하는 등 폭력적인 모습을 자주 보였으며
당시 동료 순경은 평소에는 온순하다가도 술만 먹으면 난폭해져 어떤 사고를 칠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전했다.
 
이후 1981년 4월. 청와대 특별 경비단으로 발령받아 일순 엘리트 가도를 달리는가 싶었으나
머지 않아 술버릇이 바르지 못하고 폭력적인 성향으로 인사과정에서 근무 부적격자 판단을 받게 된다.
이어 그는 부임 8개월만에 경남 의령군 궁류지서의 파출소로 좌천당하게 된다.
 
궁류지서로의 전근 이후 인근 마을에서 하숙을 하게된 그는 이웃집에 살던 전말순과 눈이 맞게 되고 곧 동거에 이른다.
여자의 집에서는 동거를 극구 반대하였으나 이를 무시한 둘은 일단 혼인신고만 접수한 채 함께 살기로 한다.
그러나 경장 진급조차 하지 못한채 여자의 집에서 얹혀살던 그의 불만과 열등감은 나날이 쌓여가고 있었으며
자연히 둘의 사이는 원만하지 못했다.
 
1982년 4월 26일.
 
모든 사건의 발단은 우범곤의 가슴에 앉은 파리 한 마리였다.
동거녀 전말순은 파리를 잡기 위해 우범곤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내리쳤고
잠결에 화들짝 놀라 일어난 우범곤은 이에 발끈하여 자신을 모욕했다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시작된 말다툼은 급기야 폭력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이들의 거세어져가는 싸움을 말리기 위해 동네 주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몰려든 주민들이 전말순을 두둔하며 우범곤을 질책하자 이에 못마땅한 그는
집을 나와 같은 지서에 근무하던 방위병과 술잔을 기울이며 자신을 무시한 동네 주민을 모조리 죽여버리기로 결심한다.
 
저녁 7시 30분 경.
만취상태로 궁류지서로 출근한 우범곤은 예비군무기고로 향한다.
카빈소총 2정, 실탄 180발, 수류탄 8발을 챙긴 그는 경비 전화와 일반 전화의 모든 선을 절단한 뒤 빠져나온다.
 
저녁 9시 40분 경.
마침 지서 앞을 지나가던 20대 남자에게 느닷없이 총을 쏜 것을 시작으로 그의 학살은 시작되었다.
곧장 궁류 우체국으로 향한 그는 집배원 한 명과 전화원 두 명을 살해하여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였으며
이후 뒷산으로 도주한 우범곤은 처가가 있는 압곡리의 매곡부락으로 향하여 본격적인 살인을 시작한다.
 
저녁 10시 경.
압곡리에 다다른 우범곤은 우선 자신의 처가집을 찾아 아내를 불렀지만 그녀는 부재중이었으며
이때 총소리를 듣고 나온 51세의 강모씨를 살해한 뒤 마을 근처의 전모씨 집으로 향했다.
이곳에서는 이미 10여명의 부녀자들이 반상회를 마치고 모여있었고
다짜고짜 아내를 찾으며 들어닥친 그는 무차별 포격을 가하여 5명을 숨지게 한다.
그 자리에 있던 그의 동거녀 전말순은 중상을 입은채 겨우 목숨은 구하나 며칠 뒤 사망하고 만다.
다시 밖으로 나온 우범곤은 근처의 이모씨(50세) 집으로 향하여 일가족에게 총격을 가한 뒤 운계리로 이동한다.
 
그러나 당시 궁류면에서 가장 번화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운계리의 건물은 대부분 불이 꺼져있었다.
이는 우범곤이 예비군무기고를 털 때 이를 말리던 2명의 방위병들이 마을을 뛰어다니며 불을 끄도록 알렸기 때문이었다.
 
저녁 10시 10분 경.
이어한 사실을 알리 없는 우범곤은 인적 없는 번화가에 의아해하며 타겟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매곡리의 사고소식을 전해들은 택시 운전사 전모씨(37새)가 도망갔다가
집안에 남겨둔 아이들이 걱정되어 다시 돌아오는 길에 총격을 당해 그자리에서 사망하게 된다.
 
당시 주변 미장원에서는 백혈병으로 병사한 미장원 주인을 조문 온 10여명의 위문객들이 방문하여 불이 켜져있었다.
이를 발견한 우범곤은 총기를 난사하여 1명을 추가 살해한 후
역시 불이 켜져있던 철물점, 가정집, 약방 등을 차례로 침입하여 7명을 더 살해하였다.
이후 우체국에서 자신이 살해했던 전화원 박모양(19세)의 집을 굳이 찾아가 남은 일가족 5명을 몰살시키는 잔혹함도 보였다.
 
저녁 11시 경.
목이 탄 그는 평소 친분이 있던 신모씨의 가게를 찾아가 신씨의 부인 손모씨에게 콜라를 얻어마신다.
늦은 밤 총을 들고 자신의 가게를 방문한 것을 의아하게 여긴 그녀에게 우범곤은 간첩이 내려왔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 때 우범곤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김모군(18새)이 다가오자 그는 돌연 총을 발사하였고
옆에 놀라 자빠진 손모씨에게도 역시 총질을 가하였다. 이어 방안에 있던 나머지 가족에게도 총을 난사하여 두 딸을 살해하였다.
(가장 신모씨만 생존)
 
저녁 11시 30분.
다음 목적지로 평촌리를 택한 그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유모씨의 집과 이발사 곽모씨의 집으로 향하여
3명을 즉사시킨 뒤 피비린내 자욱한 운계리를 떠난다.
 
저녁 11시 50분 경.
평촌리에 다다른 우범곤은 와중에 오늘 상가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다음날 있을 발인을 앞두고 바쁜 상주와 조문객들에게 비상이 걸렸다고 둘러댄 그는
조의금으로 주머니에 있던 2천원을 내밀고는 술자리에 앉는다.
조금전까지 수십명을 쏘아 죽인 그는 태연히 술잔을 기울이며 모여있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세한탄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별다른 동조를 해주지 않자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한번 무차별적 발포를 거듭하여 12명을 살해한다.
이에 늦은 밤중 느닷없는 총소리에 달려나온 동네 주민에게도 총을 난사해 4명을 추가로 살해한다.
 
새벽 1시 30분 경.
마을을 배회하던 우범곤은 또 다른 방위병인 서모씨(23세)를 만나 그의 집으로 간다.
서모씨에게 무장공비가 침투하여 비상이 걸린 상태이며 자신이 당도했으니 안심하라고 일러둔 우범곤은
대담하게도 서씨의 집에서 술에 취한 채 잠이 든다.
 
새벽 3시 40분 경.
소변이 마려워 변소에 가던 서모씨는 집 밖에서 우범곤을 잡기 위해 소집된 경찰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고
이를 본 서모씨는 그 경찰들이 우범곤을 데리러 온 것이라 여기고 집안으로 들어가 우범곤을 깨운다.
경찰이 자신을 잡으러 왔음을 깨달은 우범곤은
방안에 수류탄 2발을 투척하여 일가족 3명과 함께 자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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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런 말도 안나오는 생명체들과 이 지구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비극이네요........
 
이 포스팅 하면서 내내 기분이 너무 안좋앗어요............. 두번 다시는 저런 것들이 지구상에 등장하지 않기를....
 
 
원문 출처 : *PopS WorlD*  |  글쓴이 : 깨야소두   

2차 출처 : Daum블로그 - Save Me From Myself -
http://blog.daum.net/rodithen04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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