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는 지역간 소득의 격차가 크지 않았습니다. 한 국가의 어느 지역을 가도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했고, 소득수준이나 교육의 정도나 인문의 차원이 고만고만해서 인구의 유동이 별로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난 동네의 바깥을 모르고 살다가 고향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에는 이런 고정되고 변화 없는 인간세상이 급격한 변화의 물결에 휩쓸리게 됩니다. 사람이 사는 곳이 도시와 농촌으로 구분되고 도시와 농촌은 소득을 비롯해서 모든 면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수천년 만에 처음으로 사람들은 자기가 살던 곳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농현상이 생긴 것이죠. 그런데 근대화 과정을 밟은 모든 국가가 예외없이 지역문제라는 것에 직면하게 됩니다. 근대화, 산업화는 한 국가의 모든 지역에서 균등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지역이 먼저 선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석탄이 많은 지역, 공업용수가 풍부한 지역, 교통의 요지, 항구가 있는 곳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이런 선도지역을 결정짓습니다. 지금 중국도 이런 지역을 지정해서 경제특구를 만들었고 그 곳을 중심으로 경제발전을 시작했습니다. 상해가 대표적인 특구입니다. 당연히 이런 지역과 내륙의 농업지역은 엄청난 소득의 격차가 있고, 농촌을 떠난 수많은 사람들이 경제특구에 와서 노예노동에 착취당합니다. 중국이 지금 이런 단계를 거치고 있는 중입니다.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등 선진제국 중에 이런 지역 문제를 겪지 않은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일본은 더 심했습니다. 메이지 유신 때 근황번이었던 싸스마번과 조슈번 출신이 메이지 정권의 요직을 독점하다시피 했습니다. 특히 육군과 해군은 더 심해서 두 번 출신이 아니면 일본군 내에서 출세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2차 대전에 일본이 패망한 요인 중 하나로 이런 특정지역 출신이 요직을 독점한 일본군부의 병폐를 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싸스마와 조슈번 사람들이 일본인들 중에서 특히 뛰어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주역이었기 때문에 개화 초기에 다른 지방 사람들보다 더 일찍 더 많이 외국에 나갔고, 선진문물을 더 일찍 접했다는 것이 차이였지요. 두 번 사람들이 서양에 유학한 일본인의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메이지 때 영어 할 줄 일본인은 쓰시마와 조슈번 사람들 뿐이였습니다. 미국, 영국 구경해 본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선진국의 대학에서 근대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두 번 사람들뿐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일본근대화의 중책이 두 번에 지워졌습니다. 그리고 두 번 사람들은 그런 시대적 중임을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우리나라와의 차이점은 다른 지방 사람들이 두 번 출신의 특권적인 횡포를 아니꼽게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고, 질투를 하거나 시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연하게 생각했고, 오히려 두 번 사람들에게 감사한 생각을 가졌습니다. 자기들은 무식해서 하지 못하는 일을 두 번에서 해주고 있고 조국의 근대화를 리드해주는 데 대해 고맙다고 생각한 것이죠.
우리나라도 근대화 과정에서 지역적인 편차가 생기게 되는데, 우리의 경우에는 지정학적인 요인으로 해서 부산항을 중심으로 한 영남이 앞서가게 됩니다. 거기에는 한국전쟁이 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전국에서 몰려온 피난민 때문에 영남의 인구가 급증하게 되고 미군의 병력과 물자가 부산항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영남인들은 당시에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이고 세계최고의 선진국이던 미국의 문화와 제도, 관습, 기술에 직접 대면하는 행운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미국인과 자주 접하는 사람이 영어를 먼저 익히게 되는 것은 당연하고,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미국과의 업무를 맡게 되는 것도 당연합니다. 미국 세상에서 영어를 알고 미국인의 문화와 관습을 나는 사람이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하에 놓인 나라에서 요직을 차지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한국전쟁 동안 서울은 세 차례나 뺐기고 빼앗으면서 임자가 바뀌었고 초토화되었지만 부산, 대구는 한 번도 적의 손에 들어간 적이 없이 남한의 중심지요 임시 수도로서 기능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미국의 원조물자는 부산항을 통해 들어왔고 그것은 온 겨레의 생명줄이었습니다. 부산항으로부터 서울에 이르는 경부철도가 근대화의 동맥이 되었고, 자연히 근대화는 이 축을 중심으로 먼저 시작됩니다. 영남인은 원해서가 아니라 운명적으로 조국근대화의 중책을 짊어지게 된 것입니다.
경부축선상에 공장들이 들어서게 됐고 이 축선상의 도시들이 먼저 커졌습니다. 소득격차가 벌어지게 되자 농촌의 인구를 흡수하기 시작합니다. 본격적인 이농이 벌어진 것이지요. 이때 도시로 유입된 인구의 상당수가 농촌지역인 호남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경제특구로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인 대부분이 내륙의 농촌지역 사람들인 것과 같습니다. 또한 농촌지역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점도 같습니다. 영남인들이 서울에 가는 이유는 대학에 가기 위해서이고, 이미 자리를 잡은 친지나 동문들이 불러서 갔습니다. 그들에게 준비된 것은 성공의 기회였고, 보장된 출세였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서울에 올라간 호남인들은 식모살이를 하기 위해서였고, 공원생활이라도 하기 위해서였고, 건설현장에서 노가다라도 할 생각에서였습니다. 서울로 올라간 영남인들은 영남인들 중에서 상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고, 서울로 간 호남인들은 호남에서 가장 못살고 못 배운 하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서울에는 영남의 가장 우수한 사람들과 호남의 가장 열등한 사람들이 모이게 됩니다. 당연한 결과로 서울의 상류층은 영남인이 하층은 호남인이 차지하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조폭들 세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남 건달들은 서울가면 오야붕들하고 어울렸고, 호남 건달은 밥 얻어먹기도 힘들었습니다. 서울 주먹세계의 하층은 전부 호남에서 올라온 건달들로 채워집니다. 이 호남건달들의 반란이 바로 유명한 사보이 호텔 습격사건입니다. 조양은이 숨도 못쉬던 호남 똘마니들을 거느리고 사보이호텔로 쳐들어가 신상사파의 오야붕들을 까버립니다. 이때부터 호남주먹의 시대가 열립니다. 그 이전까지는 호남건달은 그냥 시다바리 신세였습니다. 사회 전 분야가 그러했습니다.
영남의 독주는 박정희가 5.16혁명으로 집권한 다음부터 더욱 두드러집니다. 안 그래도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경부축선, 특히 영남이 잘 나갈 수밖에 없는데 대통령까지 영남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도 장기집권을 하게 됩니다. 영남이 특혜지역이 되는 것까지는 좋은데 호남이 차별지역으로 변해가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호남차별이라는 이상한 현상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이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