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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으로 중국을 몰아낸 장군
게시물ID : humorbest_5682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조르디
추천 : 48
조회수 : 3761회
댓글수 : 7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04/08/28 19:10:00
원본글 작성시간 : 2004/08/28 18:41:11
그이름 '서희' 본관 이천(利川). 자 염윤(廉允). 시호 장위(章威). 960년(광종 11) 문과에 급제,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에 이어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되었다. 982년 송나라에 가서 중단되었던 국교를 트고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가 되어 귀국했다. 993년(성종 12) 거란(契丹)의 내침 때 중군사(中軍使)로 북계(北界)에 출전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안(案)과 서경(西京) 이북을 할양하고 강화하자는 안 중에서 후자를 택하기로 했으나 이에 극력 반대, 자진해서 국서를 가지고 가 적장 소손녕(蕭遜寧)과 담판을 벌였다. 이때 옛 고구려 땅은 거란 소유라는 적장의 주장에 반박, 국명으로 보아도 고려는 고구려의 후신임을 설득, 거란군을 철수시켰다. 994년 평장사(平章事)로 청천강 이북의 여진족(女眞族)을 축출, 장흥진(長興鎭) ·곽주(郭州) 등을 축성, 압록강 진취의 전략기지로 삼았다. 또 압록강 문제를 전담할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를 두게 했으며, 이듬해 안의진(安義鎭: 安州) 등지에 축성하고 선주(宣州: 宣川) 등지에 성보(城堡)를 쌓아 지금의 평북 일대의 국토를 완전히 회복했다.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을 지내고 신병으로 개국사(開國寺)에서 죽었다. 성종 묘정(廟庭)에 배향, 덕종 때 태사(太師)가 추증(追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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