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이승만은 과연 저평가된 대통령인가?
게시물ID : sisa_56860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eo2h
추천 : 11
조회수 : 692회
댓글수 : 29개
등록시간 : 2015/01/04 17:12:40
출처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cQeZ&articleno=81&categoryId=1&regdt=20130504191633

1919년 국제연합에 한국 위임통치를 청원

한국을 국제연맹 통치하에 두고 일본으로부터 해방시켜달라 위임통치안에 서명한뒤 백악관 제출,

이 일로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으려한다고 비난 받음.

 

 

1946년 정읍발언

미.소 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색이 없으니 남쪽에서만이라도 단독 정부를 세우자고 함(남북 분단화 근거가 되기도함) 

 

1949년 반민특위 해산

친일파들의 도움을 얻으려고 대거 기용,오히려 친일파를 잡기 위한 조직을 해산시킴.친일파 청산 방해 의혹

 

 

1950년 한국 전쟁중 한강철교 폭파

국민들에게 피난가지 말라한뒤 자기만 대전으로 도망,그리고 피난 가는 국민들이 건너는 한강철교 폭파.

 

 

1950년 국민보도연맹 사건

공산주의자들을 돕는 연맹원들을 잡아 처형하도록 지시.

하지만 당시 가입된 사람들중엔 관리들 실적으로 기록되거나 배급을 타기위해 가입한 일반 양민들이 많았다.

 

 
1951년 국민 방위군 사건

중공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인해 병력이 부족하자,국민방위군을 편성했는데 군수보급,물자 지급을 장교,간부들이 부정 착복,

횡령하여 9만~12만의 국민방위군들이 아사하거나 동사하는 사태가 속출(이승만 정권 진상규명 방해.이시영 반발 사퇴)

 

 

1951년 거창 양민 학살 사건

공비와 내통했다고 잘못 판단하여 6~700여명을 박산에서 총살하고 사건을 은폐(사건주모자들 특사로 석방)

 

 

1952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추진

대통령 재선이 어렵게 되자,개헌을 추진하고 백골단, 땃벌떼 등을 동원,관제 데모를 획책.

부산정치파동에서 발췌 개헌을 시도,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내,선거에서 당선(당시 부통령 이에 항의서한을 남기고 사임)

 

 

1954년 영친왕 등 구황실의 재산 강제몰수 국유화

스스로를 황실 후손이라 주장,실제 황실 후손에게는 황족이라는 칭호를 쓰지 말 것이라는 경고를 날리고 냉대.

이후,몰수한 황실재산을 자신의 정치적 자금으로 씀.

 

 

1956년 중임제한 철폐로 헌법을 마음대로 개정 3선 대통령 당선.

자유당 장기집권,독재 발판 마련.

 

 

1958년 조봉암사건

자신의 정치적 정적인 조봉암을 제거하려 진보당 사건을(북한정치자금.간첩혐의)조작해 덮어씌운후 사법살인.

2011년 무죄로 복권됨.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고,개표 과정에서 이기붕 부통령 당선을 위해 표를 개표조작.

 

 

1960년 4.11일 부정선거시위 참가 고등학생 김주열 시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

시체가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것이 확인되어 부정선거를 비판하는 시위를 확대시킴.

당시 이승만 정권은 이를 남한에 잠복한 공산주의자 간첩이 배후가 된 폭동이라고 간주,마산에 계엄령을 선포.

 

 

1960년 4.19혁명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시위 4·19 혁명이 일어남.

이승만 하야 결정/4.23일 시위진압경찰의 발포로 시민들 사망.

4월 24일에는 자유당 총재직 사임.....하와이로 망명중 91세 사망......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