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베델선생님을 아십니까?
게시물ID : lovestory_2575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개념초월자
추천 : 3
조회수 : 65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08/07/11 09:37:49
출처 : http://bloggernews.media.daum.net/news/1453868

영국인 베델 선생을 기억하십니까?
그 사람, 그 세월 2008/05/09 20:32 

<대한매일신보> 사장 시절의 베델(한국명 배설) 선생

베델 선생을 기억하십니까?
중고 시절 국사교과서에서 지나치듯 만난 기억은 있을 것입니다.

선생의 국적은 영국인이며, 직업은 언론인이었습니다.
선생이 왕성하게 활동하신 시기는 1900년대초였으며,
생애의 마지막 5년을 이국땅인 한국에서 보냈습니다.
37세로 생애를 마친 선생의 유해는 고국 영국이 아닌,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돼 있습니다.

올해로 선생이 서거하신지 꼭 99년이 됩니다.
이를 맞아 오늘 선생의 묘소 옆에서 추모식이 열렸는데,
뜻있는 많은 분들이 참석해서 성대한 행사를 치렀습니다.
서울지방보훈청장, 주한영국대사관 부대사, 마포구청장, 서울신문 편집상무 등 관계자 외에도 
여러 독립운동단체 원로 등 300여 명이 참석했었습니다.  
나름으로는 선생에게 부끄럽지 않은 규모의 행사였다고 생각됩니다. 
(참고로 저는 한국언론재단을 대표해서 참석했었습니다.) 



묘소 바로 옆 교회에 마련된 베델 선생 추모식장


추모식에 참석한 300여명의 참배객들로 식장은 성황을 이뤘다. 


조나단 노트 주한영국대사관 부대사가 추모사를 읽고 있다.


한국의 원로 기성세대 가운데 상당수는 4월이 오면 '4.19혁명'을 기억한다고 합니다.
그보다 조금 젊은 중년세대는 5월이 오면 '5.18광주항쟁'을 떠올린다고 들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저는 5월이 오면, 
한강의 푸른 봄물이 넘실대는 5월이 오면,
월초에 날아드는 초대장과 함께 베델 선생을 기억해내곤 합니다.
제 기억으로 베델 선생 추모식이 열린 게 올해가 9회째가 아닌가 싶습니다.
배설(베델)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계시는 진채호 선생께서 언젠가 절 찾아오셔서
베델 선생 기념사업회를 꾸리고 싶다는 말씀을 처음 꺼내신게 그 정도로 생각됩니다.   
그 이후로 추모식에 매년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마음은 늘 같이 하려 노력했었습니다.



프레스센터 1층 로비 벽에 세워진 <대한매일신보> 지면 확대판과 발행인 베델 선생(오른쪽)의 흉상. 왼쪽은 양기탁 선생.

혹시 선생에 대해 궁금하신 분을 위해 선생의 이력과 
<대한매일신보>의 역사에 대해 간단히 소개할까 합니다.

1872년 영국 브리스톨에서 출생하신 선생은 고등학교를 마친 후 
15세이던 1888년 일본 고베로 건너가 상업에 종사하시다가 
1904년 3월 4일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특별통신원으로 임명된 후
일주일 뒤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그 해 4월 14일 일제의 방화로 경운궁(현 덕수궁)이 불타자 
'일제의 방화로 불타버린 경운궁의 화재'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데일리 크로니클>은 친일성향의 매체였던 탓에
이 일로 선생은 특별통신원에서 해임되고 오갈데 없는 몸이 됐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영국이나 일본으로 되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선생은 당시 항일지식인인 박은식, 양기탁, 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새 신문 창간에 뜻을 모으고는 그해 7월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습니다.
당시 고종황제는 선생에게 배설(裵說)'이라는 한국이름과 함께 여러가지 편의도 제공하였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자매지로 영문판 <The Korea Daily News>도 같이 발행했는데,
당시 <황성신문>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 항일 구국지였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영국인인 선생이었기에 통감부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으며,
국한문, 한글, 영문판 등 3종을 합해 발행부수가 1만부에 달하는, 당시 최대의 신문이었습니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선생은 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사설을 실었으며,  
1907년 헤이그특사 중 이준 열사가 순국하자 이를 호외로 보도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인과 개(犬)는 출입금지' 라는 간판을 사옥 앞에 내걸었습니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삔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양기탁 선생은 
사옥 2층에 태극기를 내걸고 만세를 부르며 축하잔치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당당한 기개를 엿볼 수 있는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압력을 받은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가 선생을 재판에 회부, 금고형을 받게 되고,
뒤이어 신문사 간부들에 대한 구속수사, 자금난 등으로 신문사는 고전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1909년 5월 1일 선생이 고문후유증으로 서거하자 친일성향의 인물들로 사장이 교체된 후
1910년 8월 국권이 피탈되자 '대한' 두 자를 떼고는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전락했습니다.

선생은 "나는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를 영생케 하여 조선의 백성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선생의 부음을 전해들은 고종황제는 "하늘은 무심하게도 왜 그를 이다지도 급히 데려갔단 말인가!
(천하박정지여사호, 天下薄情之如斯呼)"라며 애통해 하였습니다.  



베델 선생의 묘비 앞에서 한 참배객이 헌화를 하고 있다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묘지 초입에 누워계신 베델 선생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생이 가신지 90년이 돼서야 겨우 민간 차원에서 기념사업회를 꾸려
추모행사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민족의 은인이요, 겨레의 스승'인 선생에 대해 우리는 기본적인 도리조차 하지 못햇던 것입니다. 
(참고로 선생은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받았습니다) 

오늘로 벌써 9년째 이어져오고 있는 선생의 추모식이었습니다만, 
저는 왠지 오늘 추모식장에서 자부심보다는 걱정스런 마음이 앞섰습니다.
9년전 진 회장께서 기념사업회를 만드신다며 저를 찾아오셨을 때 제가 진 회장님에게

"혹시라도 감투 욕심이 나서 기념사업회를 꾸리신다면 그만두십시오, 
그건 베델 선생을 욕보이는 일입니다. 만약 기념사업회를 꾸리신다면
진 회장님께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책임지고 잘 꾸려가주십시오!"


베델선생기념사업회를 9년째 이끌어오고 계시는 진채호 회장. 최근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신세를 졌다고 하셨다. 

라며, 어른에게 거의 협박조(?)의 고언을 감히 드린 바가 있습니다. 
베델기념사업회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간 9년째 기념사업회를 꾸려오신 진 회장께서 연로하신데다 건강도 안좋으십니다. 
오늘 추모식 참석자들의 평균 연령은 어림잡아 70세가 넘어보였습니다.
선국선열 추도식에 갈 때마다 느끼는 소감입니다만,
이 세대들이 사라지고 나면 어찌할까 하는 걱정이 앞서곤 합니다.  
추모식 행사장에 가보면 만나는 얼굴이 매번 그 얼굴들입니다.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도 없이 어서 빨리 대안이 나와야 합니다.
이런 행사장에 젊은이들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 기성세대 모두의 책임입니다.
시험용 암기식 역사책에서 '베델'이란 이름을 백날 외어봐야 아무 소용 없습니다.
오늘 같은날 마포구 합정동 인근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추모식 행사에 참석시켰다면
그것 이상 더 좋은 역사교육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베델 선생 묘소 바로 옆에는 헐버트(1863~1949) 박사의 묘소가 있습니다.
박사는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이준 열사 등이 고종황제의 특사로 파견되자 
사전 참가계획부터 입국까지 주도면밀하게 진행시키고, 또 각국 외교관, 언론의 협조를 끌어내는 등
이 땅의 국권회복을 위해 주도적 역할을 하신 분입니다.
1949년 대한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8·15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한 박사는, 
입국 일주일만인 1949년 8월 5일 86세를 일기로 한국 땅에서 서거하셨습니다.
평소 '나는 웨스터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는 박사의 소망에 따라 
박사의 유해는 이곳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됐습니다.  
흔히 헐버트 박사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분'으로 불립니다. 


헐버트 박사의 묘소와 묘비명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한 세기 전, 
낯선 이 땅에 와서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해 살다가 끝내 이 땅에 묻힌,
벽안의 선열 두 분의 무덤가에서 오늘 새삼 옷깃을 여몄습니다.

영면하소서...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