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세력이 꿈꾸는 유사파시즘
수구세력이 꿈꾸는 유사파시즘-제2의 유신독재는 가능할까? 序 국민 다수는 현 집권세력에 반대한다. 이는 이명박 정권을 거치면서 거시적 차원에서 굳어진 사실이다. 지난 대선도 사실상 야권의 승리였다. 다만 지식인 양하는 입 진보들과 지역주의의 포로들만 이를 애써 외면하고 대선패배책임론으로 친노와 문재인을 거세하려 했을 뿐이다. 지난 대선에서 우리는 문재인의 민주당 대선후보 당선이후 투표 직전까지 자행된 안철수를 통한 교란작전으로 얼마나 커다란 대적전선의 균열과 아군역량의 소진을 가져왔는지 잘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결코 안철수 개인의 성향과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정권을 불법적으로 탈환유지하려는 집권세력과의 교호작용의 산물임을 또한 잘 알고 있다. 지능적이고 간교한 술수로 정권교체를 막고 저간의 부정과 비리를 은폐하여 마침내 영구집권을 획책하려는 무리들의 작전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이들 수구세력이 오매불망 꿈꾸는 체제는 모든 반대세력을 지하로 매장하고 오로지 유일한 영도자의 지도에 절대복종하는 전체주의 체제일 것이다. 모든 가용한 수단을 써서 수직적 지배질서를 구축하고 국민은 정신적, 경제적 노예인 臣民이 되어 복종의 굴레에 매어 사는 그런 세상이 그들의 유토피아일 것이다. 삼권분립은 무너지고 언론은 견제기능을 상실하고 지배체제의 한 축이 되었으며 의회 내 저항세력은 지리멸렬해 보이니 곧 가능한 근 미래라 착각할 지도 모른다. 문제는 갈수록 다수 국민들의 이들에 대한 반대와 저항이 거세지고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지배세력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적 통치수단이 먹히지 않게 되는 不感의 영역(Zero Point)을 넘어서 사실상 약발이 다한 금단현상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다음 목차들에서 상구한다. 1. 드라마 추적자를 통해본 한국사회의 성격에 대하여 |
가. 지난 대선시기의 화제작 SBS ‘추적자’는 지금도 이 사회의 화두다.
왜냐하면 이 드라마 추적자가 우리 사회의 실체적 단면을 아주 생생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스토리는 생략하고 내가 보는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유력한 뼈대만 추려보자. 이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우리 사회의 최고 권력자는 한오 그룹 서회장이다. 그는 대법관, 검찰총장, 심지어 총리까지도 전화 한통으로 사실상 쥐락펴락한다. 그의 힘은 금력에서 나온다. 심지어 대선에도 수천억대의 정치자금을 동원 직접 개입한다. 심지어 최고의 지지율로 청와대 입성을 눈앞에 둔 자신의 사위 강동윤 마저도 진정으로 꿈꾸는 자리는 서회장의 그 막강한 한오 그룹의 오너가 되는 것이다. 대통령이란 헌법상 최고 직위도 그 목표를 위한 징검다리 일 뿐이다. 서회장 역시 이런 사위의 야심을 경계하며 자기의 혈육인 아들 서영욱에게 온전히 자기의 지위를 승계하려 모든 노력을 다한다. 그렇다 이 드라마는 이 사회 최고의 권력이 재벌, 즉 독점자본가에 수중에 있음을 그래서 국가기구마저 사실상 이 독점자본의 이익에 철저히 복무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나. 사회구성체론의 재검토
이런 우리 사회를 전통적 사회구조론자들은 ‘사회구성체’란 개념을 통해 ‘국가독점자본주의’라 규정했다. 세계체제자본주의 구조 하에서 각국 자본 간의 세력구조와 이익조절 시스템이 드러난다면 보다 완결된 자본주의 세계상이 드러나겠지만(이 지점이 과거 사구체논쟁당시에 ‘신식민지’또는 ‘종속성’의 문제이며 이는 미국과 남한사이의 단순한 지배-종속을 넘어 초국적 금융자본과 국내 자본과의 관계문제로 확장된다.) 그런대로 여전히 ‘사회구성체론’은 한 국가시스템의 총체적 이해에 유용한 도구이다.
사회구성체론의 이론적 뿌리는 마르크스의 토대-상부구조이론이다. 그에 따르면 한 사회는 경제적 생산양식을 토대로 하는 하부구조가 그 정치적 상부구조인 국가권력의 성격을 규정하여 국가는 경제적 생산양식을 결정하는 생산관계(자본주의라면 생산수단인 자본을 소유한 자본가의 노동에 대한 지배관계)를 수호하는 역할에 충실하게 된다. 즉 국가는 생산수단 사적소유 보장이라는 신탁을 지키기 위해 조직된 억압적 폭력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이 국가는 ‘조직 노동자의 군대’로 타도해야 할 대상이다.
이러한 국가에 대한 소박한 이해는 20세기의 시민 민주주의 확대와 진보당들의 의회진출 나아가서 집권의 경험들이 쌓이면서 사회구조론자들에 의해 다음과 같이 재정립된다. 정치적 상부구조로서 국가는 경제적 토대로부터 비록 최종심급에서는 규정되지만 그렇지 않은 차원에서는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다.
이 명제의 의미를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국가(최고 기구로서 통치권)는 어떤 정치세력이 집권하느냐에 따라서 하부구조( 즉 경제적 생산양식-이는 부의 생산, 교환, 소비 또는 분배방식 시스템 전체를 좌우한다.)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의미다. 물론 최종심급의 차원 -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화 단계’라고 말하는 사회의 근본적 변화의 핵심적 단계를 말한다. -에 도달해서는 막연한 개혁조치로는 넘어설 수 없는 경제적 토대로 부터의 반발 규정력이 압도적으로 밀려들 것이지만 말이다. 즉 쉽게 말해서 국가 권력을 누가 어떤 정치세력이 장악하느냐의 문제는 한 사회(구성체)의 근본적 변혁의 과정에 심대한 영향을 준다는 의미이다.
두 번째 사회구성체 이론으로 우리는 국가라는 상부구조가 단지 억압적 경찰기구나 관료적 사법, 행정기구만이 아니라 법, 종교, 교육, 이데올로기, 문화 영역 등 여러 세부시스템을 포괄하고 있으며 이 상부구조의 여러 중층시스템의 작동원리-하부구조인 경제구조를 지탱, 유지하려는 기능에 충실한-를 통일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를 쉽게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20세기 이후 지배세력의 주된 관심은 물리력을 동원한 폭압적 통치방식에서 세련된 이데올로기를 동원한 지배방식에 쏠려왔다. 이는 이전처럼 군화발로 짓밟고 직접적인 물리력으로 탄압하는 방식에 앞서 대중의 허위의식을 조장하여 체제에 순응하게 하는 통치술로 현대 정치 헤게모니 투쟁의 중요한 수단이다. 학교, 군대, 교회, 각종 매스미디어에 의해 전파되는 지배이데올로기의 주입과 정보 조작과 이를 통한 여론 왜곡이 그 주된 내용이다. 심지어 현대에 와서는 상품판매광고전략을 응용하여 주로 선거 시기에 대중들의 욕구와 무의식을 교묘히 조종하려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상부구조에서 기능하는 이데올로기의 주된 기능은 위와 같은 여론조작을 통해 경제적 토대의 모순에 의해 촉발되는 근본적, 사회 변혁적 주제가 직접적으로 사회의 공론장에 출현하지 못하게 막는 작용을 한다. 아니 정확히 말해 공론장 그 자체를 파괴한다. 즉 경제적 빈곤과 소외와 같은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전면화 되어 계급 간 갈등으로 촉발되어 이런 근본문제로정치가 작동하기 전에 그것을 봉쇄하려는 모든 기도가 이데올로기의 본질적 기능인 것이다.
다. 공포와 분열을 목적으로 동원되는 이데올로기
이 글에선 그 중에서 우리 남한 사회에 압도적 위력을 떨쳐온 국가 이데올로기로서 ‘반공-반북주의’와 분열 지배원리의 토종산인 ‘영호남 대립을 축으로 하는 지역주의’에 대해 집중하려한다.
‘반공주의’는 6.25전쟁 종료 후 한국의 지배세력의 이익에 배타적으로 기여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아왔다. 일제의 치안유지법에서, 반공법, 국가보안법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사회 개혁적 요구는 빨갱이의 이름으로 매도되고 그 어떤 진보적 운동도 반공의 칼부림에 스러져 갔다. ‘지역주의’로 말할 것 같으면 한국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던 박정희 집권기간 그 중에서도 대미 종속적 수출경제체제가 서울-영남을 축으로 차별적 산업화를 진행하던 유신시대 이후 ‘호남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시작되어 이후 30년간 영남출신의 자본가 정권 체제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수행해왔다. 이 과정에서 ‘저곡가 정책’으로 고통을 받았던 다수의 농민들이 도시의 저임금노동자로 도시빈민으로 혹독한 고통의 대물림을 해왔다. 그 중에서 최대의 곡창지대의 다수 인구를 구성하던 호남인들이 다수였음은 지역주의의 최대 피해자가 호남민중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자본주의의 경제토대의 핵심적 모순(자본을 소유한 자들이 다수 노동자를 지배하여 이익을 취하고 배를 불리는)에서 발생하는 사회갈등은 늘 그 본질적 문제의 사회적 공론화의 해결과정에서 반공주의와 지역주의(우리가 남이가 묻지마 투표 등)의 벽에 가로막혀 제대로 된 해결의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좌절해왔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보아 이 허위의 이데올로기의 근본적 물적 토대를 극복하지 못하고선 어떤 의미의 진정한 사회변혁도 난망함을 보여준다.
라. 반공주의와 지역주의의 균열
그런데 마침내 우리의 진정한 대통령 김대중과 노무현이 바로 이 거짓된 반공주의와 지역주의와 맞서 싸워 마침내 그 돌파구를 열었다. 김대중의 집권은 바로 반공주의와 호남 차별적 지역주의를 최초로 극복하고 진정한 사회발전의 토대를 구축했다는 의의가 있다. 바로 남북간 대결을 종식하고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가져올 615선언을 선포한 제1차 남북정상회담 개최였다. 이로서 남북의 8천만 한민족은 실시간 중계방송으로 서로의 속살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던 정례적 이산가족상봉과 금강산관광 개성공단과 각종 스포츠 문화교류로 질긴 적대감정을 쓸어내며 평화통일의 대장정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지역주의 극복의 문제는 DJP연대의 논리였던 ‘지역등권론’의 한계에서 드러났듯이 김대중 집권 5년 내내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었다.
지역차별에서 비롯된 지역감정의 문제는 지역주의의 폐해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반공주의 이데올로기가 일부 정치인이나 진보진영, 노동운동에 빨간딱지를 들씌워 고립시키는 반면 지역주의는 수혜자나 피해자가 모두 교활한 지배세력의 농간에 희생되고 그 파급범위가 거의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한 지역의 식민화로 국민국가 건설에 치명적이라는 점에서 그 해악은 반공주의의 그것을 넘어선다.
이 지역주의 30년 광풍을 잠재울 시대적 사명은 김대중 집권당의 세력도 미미한 비주류 정치인 노무현이었다. 그는 정치인생 전부를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서 헌신했다. 숱한 좌절과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오뚜기 처럼 일어서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된다.
전국적 정당으로서 열린 우리당을 창당하고 지역패권정당을 극복하려는 그의 시도는 일단 실패했지만 그가 전국토균형발전전략에 따라 지방화시대를 선포하고 추진한 신행정수도이전, 공기업지방이전과 기업혁신 도시건설의 추진은 많은 논란과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이래 30년간 괴물이 된 지역주의의 물적 토대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로써 미국의 하위체계에 포섭된 한국의 수도권-영남을 잇는 산업 축은 서해안과 중부권 중심의 새로운 발전 축과 DJ의 남북경제공동체의 축과 맞물려 위기의 세계경제시대에 한민족의 21세기 새로운 번영의 가능성을 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온갖 허위와 기만이 난무하는 세기말의 한국사회에서 양심적 실천가로서 온갖 역경을 딛고 최고 권좌에 오른 후에도 이 사회구성체의 발전을 위해 싸우고 또 싸운 두 거인이 2008년 연이어 세상을 떠나셨다. 희대의 악귀 아퀴히로가 그 두 분의 실존의 자리는 빼앗았으나 그 두 분이 열어 제친 진정한 사회진보의 길은 더욱 그 폭을 넓히고 있다. 근본적 사회변혁의 걸림돌이던 반공반북주의와 지역주의라는 괴물이 비록 아직 나 죽지 않았어! 하고 마지막 숨을 내쉬고 있지만 두 괴물은 더 이상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라고? 통진당도 종북으로 해산되는 마당에 무슨 헛소리냐고? 다음 목차에서 상구하려한다.
2. 최근 들어 지속적으로 실패해온 수구세력의 이데올로기 공세
가. 무력해진 반북-반공 공세
생생히 기억하는 천안함 사건을 보라. 당시 이명박 정권은 이를 북의 어뢰폭침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반북반공몰이 광풍을 일으켰다. 가히 2010년 상반기는 천안함 사건으로 온 나라의 모든 뉴스가 뒤 덮었다. 그러나 과거 같으면 일사천리로 진행될 매카시즘의 광풍이 희한하게도 이 사건에선 그 위력이 없었다. 심지어 파란매직 기호1번 어뢰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국민여론은 절대다수가 북의 소행이라는 정부의 발표를 믿지 않는다. 연이은 지방선거에서 야당의 승리가 이를 증명한다. 그 이후 연평도 포격사건도 천안함의 진상을 덮고 대북 악마화 프로젝트의 기획이라는 정황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다.
단지 지방선거 압승을 노린 게 아니라 더 큰 목표-제2의 유신독재를 실현하기위한 천안함 프로젝트는 소기의 성과는커녕 국민의 60%가 북의 소행이 아니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말해주듯 실패한 것이다. 이러한 공작의 실패는 이 정부 들어와서 간첩사건의 대부분이 무죄로 판명 나는 것을 보면 더 명확해진다. 또한 아직은 진행 중이라 조심스럽지만 세월호사건 역시도 당초의 기획과는 달리 실패한 배경으로 나는 김대중-노무현의 한반도 평화정착 프로젝트를 주목한다.
최근에 들어선 이석기 사건을 빌미로 원내 제3당인 합법정당을 위헌정당으로 해산한 사건의 여파를 봐도 더 이상 종북몰이가 별 신통한 정치적 효과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헌재판결 당일 잠시 대구·경북 중심으로 결잡하던 박그네 지지도는 3일도 못가고 곤두박질쳤다. 이래가지곤 파시즘체제 구축은커녕 이원집정부제개헌도 물 건너갔다.
나. 더 이상 위력적이지 않은 지역주의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은 부산에서 40% 가까운 득표를 했다. 이는 과거 김대중의 득표울 10%를 훨씬 뛰어 넘는다. 물론 문재인이 부산 출신이라는 소지역주의의 귀결일 수도 있지만 PK 지역 전체적으로 민주당 후보의 지지율이 새누리에 필적할 수준에 도달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이제 영남이든 호남이든 과거의 ‘묻지마, 내 사랑’이라는 일방적 지지는 포기한지 오래다. 최근엔 TK지역에서도 이런 지역주의를 흔드는 조짐들이 연일 드러나고 있다. 최악의 지역경제 상황에도 박그네에 대한 철옹성 같은 결집력을 과시하던 대구에서도 과반수 붕괴가 현실화되더니 지역 차기지도자로 김부겸이 떠오르는 이변이 일고 있다. 더 이상 자신들과는 무관한 총자본의 이익수호자라는 박그네의 정체를 깨달아가고 있는 것이다. 갈수록 그리 될 것이다.
3. 수구세력 최후의 카드인 분열공작에 맞설 우리의 전략
유신독재는 총과 칼로만 유지된 게 아니다. 반만년 가난극복의 성장신화, 개발과 발전의 근대화 욕망에 바탕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수구세력에게 그런 것을 가능케 할 물적 자산이 없다. 국고는 거덜 났다. 수탈할 자들의 주머니는 텅 비었다. 수탈자들의 숨겨 논 곡간이 위험하다. 그러므로 저들에게 기득권 사수를 위해 남은 것은 총칼의 협박과 분열공작 뿐이다.
분열공작이 선행되었다. 온오프를 넘나드는 광범위한 공작조와 테러조들의 활약이 분주하다. 여기저기서 루머를 만들어 전파하고 아군을 갈라놓는다. 서로를 험하게 비난하고 조롱하며 상처를 가하여 악화를 양산한다. 부정적 전망과 불신조장으로 정치적 허무주의를 한껏 고무한다.
이에 우리는 긍정과 희망 그리고 상호신뢰와 연대를 통한 힘의 결집으로 맞서야한다. 서로를 격려하고 의지를 북돋아서 정치적 참여의 장에 더 많은 시민이 나서도록 유도한다. 공정한 절차로 우리의 대표가 선출되었다면 그를 믿고 정당성과 힘을 부여하여 강고한 저들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고무해야한다. 노무현의 고군분투에 우리가 더 많은 관심과 참여를 보여 주었다면 이토록 간난신고를 겪지 않을 수 있었다.
結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수구세력이 꿈꾸는 제2의 유신독재체제와 같은 파시즘은 불가능한 게 현실이다. 문제는 반파시즘을 넘어서서 온 국민이 갈망하는 진정한 사람 사는 세상의 실현의 경로이다. 그래서이다 2015년 1월 초의 정국이 중요한 이유다. 이제.. 또 실패한다면 합법적 절차로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도전을 우리는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가급적 아니 절실히 우리의 헌법과 법이 보장한 절차로 우리 사회가 긍정적으로 변화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평화적으로 진보와 개혁이 이루어지고 모두 다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 사는 세상으로의 이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제일과제는 야당의 철저한 개혁이다. 야당이 지역주의 방패에 은거하여 이권에 몰입하는 정치자영업자들에 좌지우지되어선 대한민국엔 희망이 없다. 개혁 주체로서의 야권의 철저한 재편이야 말로 수구세력의 유신독재 부활에 맞서 가장 시급히 착수해야 할 우리의 과제이자 유력한 반파시즘 대항전선이다. 사소한 차이로 분열하지 않고 통 크게 대동단결할 광범위한 국민전선의 핵으로 야권이 재편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렇지 못해서 지배세력의 분열공작에 또 국민의 힘의 분산된다면 남은 것은 생각하기도 끔찍한 강대 강의 물리적 충돌과 유혈사태가 초래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과 사회적 부가 손실될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소명을 가진 책임있는 정치인과 시민들이라면 부디 야권 대통합의 대의에 충실해주길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