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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나니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 영숙이 이야기.
게시물ID : panic_5141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구름완전자
추천 : 8
조회수 : 156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6/27 23:14:47

이것은 좋은 날의 이야기였다.

 

그 때 철환이와 영미, 영미의 동생인 영숙이와 나는 뒷산으로 놀러 갔다. 뒷산이라고 해봐야 야트막한 동산정도의 산으로, 감나무가 무지 많아 감나무 골이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감나무 골에는 이것저것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 날개가 검은색인 나비도 있었고, 몸통이 검은색인 잠자리도 있었다. 나무도 갓 자란 연두 잎이 아름다운 나무도 있었는가 하면 정말로 밤이 되면 망태할아버지가 나타날 것만 같은 나무도 많았다. 그 날은 날씨도 좋았고, 우리는 웃고 떠들면서 벌레도 잡고 나무도 탔다. 숨바꼭질도 했고, 점심도 먹었다. 점심이라고 해봐야 가난했던 시절, 쪄온 감자와 옥수수. 주먹밥이라도 있으면 그 날은 행복한 날이었는데.

 

그러나 철환이와 나는 단연컨대 그 동산에 있었던 집을 가장 먼저 기억할 것이다.

 

묘지 옆에 있었던 집. 어느 한 효자가 삼년상을 치르느라 만들어놓고 거기에서 기거했다던 집. 그러나 3년이 되지 못하고 그 남자도 아무도 원인을 모르는 불우한 사고로 죽게 되어버려, 마을 사람들이 더 이상 건들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는 그 집.

 

집이라고 하기엔 초라할 수도 있겠다. 하기야,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움막이기도 하고, 그 남자의 묘지이기도 할 것이고, 그리고 그 남자가 먼저 떠난 어머니를 애도하기 위해 만든 집이기도 하다. 움막이며, 묘지이며, 동시에 집인 그 곳.

 

그 곳을 왜 가장 먼저 기억하냐면. 거기서 영미의 동생 영숙이가 쓰러졌기 때문이다. 숨바꼭질 도중이었는데, 영숙이가 거기에 숨어버리는 바람에 우리는 한 참을 찾아다녔다. 당연히 거기에 숨을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숙이의 누나인 영미가 술래였기 때문에, 당연히 영미가 쓰러진 영숙이를 발견했다. 우리는 영숙이는 집으로 옮기고, 철환이와 나는 그대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영숙이는 며칠 내내 끙끙 앓다가 그대로 죽었다. 12살이었던 영숙이. 그리고 나서 그대로 영미의 집이 이사를 갔기 때문에 철환이와 나는 왜 영숙이가 죽었는지 몰랐다. 어머니의 말로는 죽은 영숙이의 다리에 뱀이 물린 자국이 있었다고도 하고, 이상한 벌레에 쏘였다고도 하고, 급살맞아 죽었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하필이면 거기에 숨어서 동토를 맞았다고도 하고, 무당을 부르자는 이야기도 나오고. 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 된다고도 하고 여러모로 시끄러웠다.

 

15년이 지나서, 29살이 되었을 무렵, 철환이와 나는 영미를 만날 수 있었다. 무려 15년만에. 더군다나 초등학교 반창회 날 영미가 나타날 줄은 몰랐으니까.

 

영미와 철환이와 나는 자연스럽게 뒷풀이겸 술자리를 갖게 되었는데, 철환이는 일이 있다며 먼저 나가게 되었고, 영미와 나만 둘이 남게 되었다. 옛날 시골 소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뻐진 영미. 그녀와 나는 계속 술을 한 잔 두 잔 하면서 옛날 이야기를 꺼냈고, 아주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아주 자연스럽게, 혹은 누가 그렇게 우리의 대화를 만들어 놓은 것처럼 영숙이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영숙이. 잊혀진 이름인가 잊은 이름인가. 푸른 잎과, 몸통이 검은 잠자리, 그리고 묘지 옆 그 집. 파편처럼 생각이 났다.

 

-영숙이도 지금쯤 살아있었으면 너만큼 예뻐졌겠지?

 

술에 달큰하게 취한 나는 촌티를 벗어버린 영미에게 말했다. 영미는 수줍게 웃었다.

 

- 근데 왜그러지? 이상하다. 어렸을 땐 우리 다 그냥 시골소년 시골소녀였는데 오늘은 동창회에서 너밖에 안보이더라.

 

영미는 또 수줍게 웃었다.

 

-야 웃지마. 반하겠다.

 

너글너글하게, 아저씨처럼, 아니면 처음 고백하는 중학생으로 돌아간 것처럼, 영미를 향해 농담따먹기만 했다. 둘이 된 지 얼마되지 않아 영미는 웃으면서 내 빈 술잔에 술을 채우고는 옆으로 와 앉아 손을 잡았다.

 

30살을 앞둔 나에게 이것은 해프닝일 뿐일지도 모른다.

 

봉긋한 영미의 가슴은 내가 영미와 모텔에 들어가는 것을 기다리는 듯이, 침대 위에서 나를 보며 비웃었다. 잘록한 영미의 허리는 어쩌면 내가 영미의 빈틈을 찾아가길 또 기다렸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너무나도 예뻐진 영미와 나는 모텔에서 밤을 보낸 후, 아침밥을 먹고 연락처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며칠에 한 번씩 만나는 날은 꼭 밤을 새고 그녀는 자신의 직장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옆 옆 도시인터라, 6시면 나와서 밥을 먹고 그녀는 버스를 타고 자신의 도시로 돌아갔다.

 

그러나 몸이 가까워지니 마음이 가까워졌고, 그녀를 품은 나는 그녀를 알고 싶어 졌고, 그녀를 알고 싶어진 나는 점점 더 가까이 하고 싶어졌다.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니 그녀가 머뭇거렸다.

 

-?

 

진태()씨에게 말 못한 게 있어.

 

-뭔데?

 

나중에 얘기하자. 정리가 안되네.

 

 

2주만에 만났다. 자연스럽게 모텔에 들어가서 평소같이 놀겠구나 했더니, 씻고 나와서 이야기를 청하기에 알았다 하였다.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

 

동생 영숙이는 쓰러진 그 날, 집에 가서 끙끙 앓다 밤에 일어나서 반 쯤 풀린 눈으로 어머니를 찾았다고 한다. 마치 어머니를 못봐서 안달이 난 사람처럼 어머니만 외쳤다고 한다. 물론 엄마 엄마 하면서 외쳤겠지. 영미는 새벽으로 기억한다는데, 동생 영숙이 새벽에 일어나서 안절부절하며 화장실에서 계속 자신의 손을 씻고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한 밤중에 화장실에서 누가 이렇게 쓰나 하고 보니 영숙이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런데 영숙이의 손이 이상했다고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영숙이의 손을 찬찬히 살펴보니 이상한 주름이 져 있었다고 한다. 영숙이는 이 손이 자신의 손이 아닌 것 같아서 계속해서 씻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다 자는 늦은 밤 일어나서, 계속해서 자신의 손을.

 

불안한 아버지와 어머니. 무당을 찾을까 했지만 일시적으로 생긴 것이거니 생각했다. 영숙이는 그 다음 날 밤 더 이상한 상황을 목격한다. 영숙이가 또다시 밤에 일어나서 자꾸 밖으로 나가야한다고 문을 열려고 한다는 것. 아버지는 영숙이를 힘으로 제압했지만 어찌나 그 기세가 대단했는지 아버지도 실로 자신의 딸이 영숙이가 아닌 것 같았다 했다.

 

영숙이가 죽은 날이자, 지고 세 번째 날. 영숙이는 초점이 흐린 눈으로 밤새 고열로 끙끙 앓았다 한다. 그리고 죽기 전 계속해서 부른 어머니의 이름. 그러나 영미의 어머니 이름이 아니라, 다른자의 어머니의 이름을 불렀다 한다.

 

3년상을 마치지 못하고 죽어버린 그 남자. 그 남자의 어머니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는 게 아닌가.

 

귀신이 곡할 노릇, 아니 이미 귀신이 들린걸지도 모르겠다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죽은 영숙이. 죽은 영숙이의 옷을 정리하면서, 어머니는 이상한 물건을 발견했다고 한다. 영숙이가 쓸 리도, 어디서 가져왔을 리도 없는 오래된 안경. 그냥 재수없게도 그 묘지에서 나온 것 같은 그 안경을 왜 영숙이는 바지 속에 숨겨뒀던 걸까. 오래되보이는 안경이 신기해서? 나중에 자랑하려고?

 

 

영미는 많이 울었다. 다른 도시로 옮겼지만 그 다음은 어머니가 차례였다고 했다.

 

이사한 후 5년정도 있었어였지 아마? 불안불안하긴 하더라니.

 

계속해서 울면서도 무덤덤하게 이야기하는 그녀. 순진했던 그녀가 나에게 슬픔을 말한다. 이상한 느낌. 아마도 아버지와 영미는 어머니가 영숙이를 많이 그리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영숙을 떠나보내고 자신의 삶의 터전이었던 고향까지 옮기면서 많이 쓸쓸했었나보다. 영미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후에 알고보니 어머니가 죽은 이유는 자살이었다더라. 아파트에서 떨어졌다던.

 

어쨌든 나는 영미와 더욱 더 결혼하고 싶어졌다. 알고 나니 더 지켜주고 싶은 마음인가. 동정인가 아니면 연민인가. 이 책임감이 혹 사랑이라 불리는 어떤 것인가?

 

그러나 과거는 확실히 정리하고 싶다. 영미와 나, 그리고 철환이는 그 묘지 옆의 허물어진 집을 찾아가 제사를 지내기로 했다. 뭐 그래봐야 이제 현대식 사람이 다 된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제사는 간단하겠지만.

 

간략한 제사를 마치고 영미가 안경을 꺼냈다. 동생이 숨겨온 그 안경을 꺼내서 도로 묻어주었다.

 

 

또 다시 10년이 지나고 40살을 바라보는 나. 나의 아내는 여전히 예쁘다. 가끔씩은 옛날 촌티나는 모습에 뛰어놀 던 것도 상상하지만. 딸이 두 명이나 있다. 가끔은 그 뒷동산에 제사를 지내러 가지만 딸들은 25년 전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이리저리 왔다갔다 달리면서 놀지만.

 

영숙이. 안경. 묘지. 묘지 옆 집. 그리고 이제는 내 아내 영미.

 

쓰고나니 별 거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


내 아내의 여동생 영숙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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