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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학살의 주역 아돌프 아이히만
게시물ID : readers_569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그기린그림
추천 : 1
조회수 : 599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2/12/26 19:12:31


진실을 보고 행하는 참지식인이 되자

한나 아렌트는 미국의 교양잡지 <뉴요커>의 위탁을 받아 유대인 학살의 주역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재판을 참관한 뒤, 아이히만의 죄는 바로'악의 평범성'에서 나왔다고 지적했다.


수십만의 유태인을 가스실에서 학살한 잔혹한 집행인이었던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위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수백만 명의 아이와 남녀를 상당한 열정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죽음으로 보내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도리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세상을 경악하게 했다. 하지만 아렌트는 살인자의 가장스러운 답변을 두고 그것은 단지 '무지에서 나온 것일 뿐'이라고 차분하게 결론지었다.


그 덕분에 아렌트는 유대인이면서 유대인의 아픔을 외면한 배신자로 낙인찍혀 유대사회에서 매장되는 고통을 겪었지만, 그녀의 이보고서는 '악마적 행위를 한 사람도 의외로 평범할 수 있다.'라는 그야말로 평범한 진리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녀는 보고서에서 아이히만은 단지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판단의 무능성' 등 세가지 무능함을 가진 지극히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기술한다. 즉 아이히만은 스스로의 특별한 의식 없이 단지'조국의 명령'이라든가 '게르만의 영광' 같은 지극히 단조로운 용어의 노예가 된 사람이며, 이런 몰이해와 비판 능력의 부재가 결과적으로 거대한 악의 실체였다고 결론내린다. 그리고 "악이란 비판적 사유의 부재다."라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가? 우리 사회는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찬미와 반미, 자주와 외세, 냉전과 평화 등 무수한 관용어들에 둘러싸여 있다. 이런 혼란 속에서 '말하기의 무능성' 에 빠진 누군가는 스스로 내뱉은 말이 어떤 의미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한채 국가와 국민, 애국, 좌빨과 수꼴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생각의 무능성'에 빠진 누군가는, 주류가 내세우는 프레임에 걸려 비판적 분석의 능력을 잃어버렸다. '판단의 무능성'에 빠진 누군가는 조국에 대한 충성이라는 자의적 판단으로 다른 누군가를 적으로 규정하며 모욕하고 공격하기도 한다. 그럼 과연 이들 중에 누가 악이고 누간 선이라는 것일까.

 



의견을 가진 모든 시민은 지식인이다

 

이런 대중의 '평범성(여기서의 평범성은 중용의 평범과는 다른, 오히려 그것을 잃어버린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혹은 '진부함'은 누가 일깨워야 할까? 그것은 바로 지식인의 몫이다. 건강한 사회에는 '진부함'을 깨뜨리는 '지적 긴장'이 존재한다. 끊임없이 담론을 공급하고 진실과 거짓 혹은 선과 악에 대해 신선한 지적질문을 던지면서 대중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지식인의 역할이요 의무다.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현재 그런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오히려 지식인 스스로 '평범성의 굴레'에 갇혀 있다고 여긴다. 그들은 자신이 내건 '가치'에 매몰되어 참된'가치'를 판단하지 못한 채 주장만 남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대중은 '지식인의 진부한 속성'을 자발적으로 이해하고 그들의 의견을 '진부하지 않고 평범하지 않은' 독해력과 판단력으로 다시 일곡 비판적으로 해석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비판적 분석능력을 잃어버린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악의 전령이 될 수 있다. 지식인이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따위의 관용적 사고에 빠져 진실을 외면한다면, 또 자신의 이해에 따른 주장과 어젠더를 대중에게 세뇌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면, 또 자신이 속한 집단의 입장에 따라 혹은 조직의 논리에 따라 뜻을 굽히거나 붓을 꺾는다면, 또 그렇게 감시자의 역할을 포기하고 이해관계에 무릎을 꿇는다면, 이제 남은 일은 이 나라 대한민국이 제2, 3의 아이히만들의 포로가 되어 역사의 후퇴를 기다리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의견을 갖고 있는 모든 시민은 지식인이다. 의견을 말하나는 모든 시민은 지식인이다. 하지만 진짜 지식인은 진실을 보고 말할 수 있는 사람에 군한된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모든 청년은 참지식인이어야 한다.

 


권력층에 의한 맥락화의 학습과 세뇌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사회철학자 칼 폴라니는 일찍이 맥락화의 함정에 대해 경고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복잡해서 한 가지 틀로 이해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하거나 부분적으로 유사한 것들을 하나로 묶어 그것이 마치 거부할 수 없는 대세인 양 위장해서 대중을 현혹하거나 지배하려 든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화의 함정은 지금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것은 공산당이다. 한국전쟁의 참상이 민족의 DNA 속에 깊이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공산당에 대한 거부감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당위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반공이라는 우산 밑에 슬쩍 끼워넣은 또 다른 우산들이다. 누군가 반공의 우산 아래 사회주의라는 우산을 끼워 넣으면, 반공산당과 반사회주의는 분명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되어 사회주의자라는 말이 곧 공산당과 같은 나쁜 맥락을 형성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또 누군가가 이 사회주의의 우산 아래 시장이라는 또 다른 우산을 슬쩍 끼워넣으면, 시장경제에 대한 비판과 반론은 곧 사회주의에 찬성하는 것이 되고 그것은 다시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시장경제의 폐해에 대해 지적하는 것은 반시장적이고 사회주의적이며 결과적으로 빨갱이라는 맥락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다음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시장의 우산 아래기업이라는 우산을 슬쩍 끼워넣으면 맥락화의 부비트랩은 고구마줄기처럼 이어진다. 이 경우 일부 기업의 탈세와 지배구조, 독점과 과점을 지적하는 것은 반기업적 사고가 되고 반기업적 사고는 곧 반시장, 사회주의, 공산당과 같은 맥락을 형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끝이 없어서 누군가가 그 아래에 재벌이라는 우산을 다시 끼워 넣으면 이번에는 재벌체제의 문제점을 거론하는 것은 반재벌 반기업 반시장 사회주의 공산당으로 연결되어 재벌을 반대하는 것은 공산당이라는 은밀한 맥락화의 올가미가 덧씌워진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재벌이나 대기업 또는 자본주의의 문제점, 시장경제의 부작용, 신자유주의의 폐해 등을 거론하는 데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좌파라는 말이 나쁜 뜻이 아님에도 좌파로 규정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렇게 규정되지 않기 위해서 말을 조심하게 된다. 결국 비판의 목소리는 가라앉고 기득권에 유리한 것들만 옳고 친기업적이며 시장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이며 반공적인 것으로 cksiddehl는 것이다.

 


비판을 두려워하면 미래는 없다.

 

이런 맥락화는 물론 그것으로 이익을 보는 세력에 의해 은밀하게 학습되고 세뇌된다. 그러므로 그것을 간파하기란 쉽지 않고 설령 간파한다고 해도 용기를 내어 말하기는 더 어렵다. 시스템에서 비주류가 되는 것은 늘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장이 뜨거운 청년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미래의 주인은 청년이고, 청년에게는 스스로 주인이 되어 살아갈 세계의 문제점을 간파하여 스스로의 손으로 고치고 발전시키고 다듬어야 할 의무가 있다. 기성세대가 물려준 유산을 계승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못된 것을 고치고 개선시켜서 발전시키는 것도 청년들의 몫이다. 그러므로 청년들이 맥락화의 함정에 빠져서 비판을 두려워하고 거기에 순응한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미래를 스스로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당신이 만약 뜨거운 심장을 가졌다면 이런 맥락의 함정을 과감하게 벗어나라.

 


프레임, 나를 가두는 감옥

 

신문을 보면 프레임이라는 말을 자주 보게 된다. 여기서 프레임이라 혹은 묶음이라는 뜻인데,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물이나 현상을 대개 프레임으로 해석하는데, 이것은 곧 현상을 이해하는 특정한 맥락이 사회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렇게 맥락화된 사고는 사사으이 전면적인 발전을 저해하고, 나를 주류의 논리에 종속되도록 만드는 나쁜 습관이다. 즉 프레임은 맥락화의 다른 이름인 셈이다.


먼저 프레임을 규정하는 과정을 하나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사회에 어떤 현상이 발생했다. 예를 들자면,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고공 크레인을 점거하고 파업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때 이 현상과 관련된 당사자 중에서 큰 힘을 가진 그룹의 해석과 힘이 약한 그룹의 해석이 동시에 나오게 된다. 여기서 큰 힘이 있는 당사자는 해당 기업이고, 힘이 약한 당사자는 파업노동자일 것이다. 이들이 소위 현상에 대한 1차해석자 이다.


그런데 해당 기업의 해석은 그들의 협력 혹은 부역하는 전문가집단의 입을 통해 나온다. 과격한 노동운동으로 인해 생산피해액 규모, 거래선과의 계약을 지키지 못해 떨어진 국제신인도, 파업 장면이 외신에 보도됨으로써 추락할 국가위상, 극렬노동운동으로 철수 할 외국인투자자 등 각종 통계를 바탕으로 논리정연하게 노동운동의 폐해를 주장한다.


반면 파업노동자들은 근로환경과 고용의 문제, 회사측의 잘못된 노사관 등을 지적하겠지만, 이들의 해석은 생존의 절박한 문제를 호소하는 감정적이고 격정적이며 거친 논리에 기반할 수밖에 없다.


이때 언론이 대개 이중 하나를 고르며 논리를 확장시키는 2차해석자의 역할을 한다. 1차해석자인 양쪽 이해당사자들의 주장을 균형있게 다루지 않고, 일단 관고주이자 한국 사회의 주류이며 해석도 논리정연한 기업쪽 주장을 1차해석으로 인용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언론은 저절로 강자의 손을 들어주게 되고, 약자가 악으로 규정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이 경우 대중은 2차해석자인 언론이 보여준 기업의 1차해석에 동화되어, 노동자들의 파업은 국가적 피해를 담보로 자신들만의 이익을 주장하는 이기적인 투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비슷한 사안들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선과 악의 가위로 재단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나의 생각이 상위해석자들의 견해에 포섭되는 과정을 프레임에 걸려들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대중은 프레임에 걸린 물고기가 되기 쉽고, 한 번 문 프레임의 바늘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또 한 번 프레임에 거리면 다른 프레임에도 쉽게 걸려든다. 이념 프레임, 시장 프레임, 주류 프레임, 성차별 프레임 등에 갇히게 되면, 수많은 현상을 제대로 해석하기보다는 프레임이 강요하는 틀로만 세사을 바라보게 도니다. 그래서 내가 반대하는 것은 전부 좌빨이거나 꼴통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여자는 무조건 집에서 살림을 해야 하며 장애인을 위한 투자는 비효율적인 낭비일 뿐이라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프레임들에 걸리면 차별적이고 배타적인 견해를 갖게 되고, 그것이 확신이 되면 가스통을 들고 거리에 나서게 된다.


그러니 스스로 사안의 본질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는 한, 이런 프레임들에 갇혀 상대를 무조건 틀렸다고 규정하며 적으로 삼게 된다. 는 없고 그물에 걸려든 가엾은 물고기만 남게 되는 것이다.


사물은 내가 인식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인데, 나의 인식이 정교한 프레임에 걸려 오작동한다면 나에게 사물은 혹은 우주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고, ‘바람풍바담풍이라고 부르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이건이 어떤 현상에 직면해서도 본질을 살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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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 박경철 '자기혁명' 중에서 


(저작권 문제시 곧 바로 삭제 조치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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