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하게 고백하면 전 당신이 미웠어요.
당신 이름으로 돈을 못 빌려 갓 사회 초년생이 된 아들 이름으로 몇 천만원 빚을 지고
그거 갚는 데 단 한푼도 당신은 보태 주시지 않았죠.
기억이 남아 있는 20몇 년 동안 당신은 여자 문제가 끊이지 않았던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참 신기했어요. 키도 작고 외모도 별로인 당신에게 여자들이 계속 달라붙었던 사실이.
교회 선생님도, 보험 아줌마도, 전 회사 동료도 당신의 무엇을 보고 반했던 걸까요.
중국으로 쫓기듯이 출국했다가 돈도 제대로 못 벌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당신이
그래도 조금이라도 변했기를 바라던 어머니는 무슨 죄인가요.
갈 곳 없던 당신은 나와 어머니가 살던 집에 얹혀 한 달을 살다가
어머니가 아끼던 장신구랑 옷가지를 집어 들고 또 나가 버렸지요.
더 이상 참지 못한 어머니가 이혼을 이야기하고 당신이 내게 어머니를 설득해 보라 했을 때
답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난 어머니 편이었어요.
서류상으로라도 당신이 어머니 남편으로 남아있는 그 사실이 지긋지긋하게 싫었거든요.
몸도 안 좋은 어머니에게 얼마 안 되는 생활비 가져다 드린 건 당신이 아닌 나였으니까요.
사실 섣달 그믐날 밤에 당신의 문자를 받고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아 전화기를 꺼 버렸어요.
몸도 안 좋고 하다길래 그냥 저녁 때 한번 찾아가나 보자 라는 기분이었죠.
다음날 아침 전화기를 켜자 수없이 많은 매너콜 문자와 함께
"아버님 돌아가셨습니다. ㅇㅇ교회", "사건번호 xxx 부평경찰서 ㅇㅇㅇ경사에게 접수되었습니다"
라는 문자 메시지가 뜨더군요.
그렇게 이곳 저곳을 전전하던 당신은 어느 교회 다락방에서 설날 아침에 주무시다가 돌아가셨지요.
당신을 관에 넣을 때, 그리고 뜨거운 화로 속으로 당신을 담은 관이 들어갈 때
내가 미친 놈처럼 울부짖으며 눈물샘에서 피가 흐를 때까지 눈물을 흘렸던 건
잘 되면 어묵에 뜨끈한 정종 한 잔 하자던 당신과의 그 약속을 못지켜서일까요,
아니면 그래도 아버지라는 당신의 존재감이 일순간에 한 줌 잿더미로 변해서일까요.
아버지. 당신의 존재를 내 손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흩뿌린지 벌써 3년이 되어 가네요.
효자든 후레자식이든 옛날 같으면 묘 옆에서 매일같이 곡하며 지내야 했다던 그 3년이 말이예요.
나는 매일 당신이 지어 놓은 빚을 갚으며 가슴 속으로 곡을 했으니 3년상 못 치른 건 그걸로 봐 주세요.
그리고 이번 설날을 끝으로 이젠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당신을 찾아가지 않을 거예요.
당신과 똑같이 살지 않기 위해서
바람 피우면 당장 잘라버리겠다고 커다란 가위를 직접 사다 놓았고요.
술 좋아하던 출발은 같았지만 나 지난 주부터 알코올중독 클리닉에 내 발로 다니고 있어요.
참 당신이 많이 미웠고, 지금도 미운데요.
그래도 한 번은 보고 싶네요.
설날에 찾아가서 마지막으로 소리 내어 한 번 크게 울게요.
거기선 부디 책임감 있게 사시길 바래요,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