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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 과거] 산문- 망운지정(望雲之情)
게시물ID : readers_793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잘하는짓이네
추천 : 6
조회수 : 35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6/28 22:05:47



그녀의 시선이 사진 한 장에 멈췄다. 표지에 잔뜩 쌓여있던 먼지를 쓸어낸 손가락이 반질반질하게 앨범의 비닐과 맞닿았다. 아현은 그 부드러운 감촉이 좋아 페이지 한 켠에 손으로 작은 원을 그리며, 그녀가 방금 발견해 낸 추억 한 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꽤 옛날의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아현은 그 사진에 대한 모든 것을 생생하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조금 습한 숲 공기가 아직도 코에 맴도는 듯 했다. 그녀는 원을 그리는 것을 그만두더니, 이젠 무의식 중에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

 

. 그때 그 경주에 있던... 그 산이 어디였더라?”

 

이름은 무신 이름이고, 기냥 앞산 뒷산이다. . 누가 묻드나?”

 

엄마가 소파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서 있는 상태로 아현이 대답했다.

 

아니, 그냥 앨범 보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옛날에 나 유치원 때 갔던 데 있잖아.”

 

하이고, 니 유치원 때 일까지 다 기억하나? 어데 그 느이 아빠랑 간 데 말하는기제?”

 

. 거기가 용담정이었나?”

 

모르깄는데. 함 거 사진 함 줘봐바라. 보믄 알기다.”

 

아현은 순순히 방에 펼쳐둔 채로 놓고 왔던 앨범을 다시 거실로 가지고 나왔다. 엄마는 표지에 두껍게 쌓인 먼지를 보더니 아이고, 난리 났다. 하고 몇 마디 하다가는 금세 사진 한 장 한 장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사진마다 천천히 손가락으로 기억을 더듬어가는 모습은 마치 무언가 미련이 남은 사람과 같았다. 결국 처음 목적을 완벽히 잊은 듯이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앨범 페이지를 보고, 아현은 말없이 기다렸다. 그녀가 엄마의 어깨 너머로 덩달아 사진을 구경하며, 얼마나 많은 침묵의 시간이 흘렀을까. 엄마가 조용히 예의 그 페이지를 다시 폈다. 엉덩이에 쥐가 난 것 같은 기분으로 아현은 자세를 조금 고쳐 앉았다.

 

이거는 용담정이지. 맞네.”

 

근데 많이 보던 곳이 아닌데?”

 

아유, 애기들 데리고 그리 험한 델 어떻게 가노? 여는 다른 데지.엄마는 앨범 위에 손가락으로 작은 용담정 지도를 쓸어내기 시작했다. “봐라, 여기가 입구며는, 우리는 맨날 일로 가잖아. 그때 요짝으로 살짝 틀어가지고, ? 그 옛날에 이쪽으로도 함 안 가봤었나?

 

, , 어딘지 알겠다. 그 오른쪽에 있던 샛길 같은 거지?” 지리를 납득한 아현이 앨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가 지나가는 어조로 물었다. “, 가볼라고?”

 

. 아빠랑 가게.”

 

아현은 앨범을 다시 펴, 예의 그 사진을 조심스럽게 비닐 아래에서 꺼냈다. 색깔이 조금 바랜 사진 안에는 환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젊은 아빠와, 옆에서 물통을 가방에 넣는 일에 열중해 있는 어린 그녀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장면이 테두리 바깥으로 넘쳐 흘러버릴까 겁내는 것 처럼, 아현은 손바닥 위에 사진을 신중하게 올려놓고 천천히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방문이 닫힌 후에도 한참을 허공을 보고 있었다.

 

-

 

아빠는 등산을 정말 좋아하셨다고 아현은 매끄럽게 달려가는 버스 안에서 생각했다. 약간 퀴퀴한 먼지 냄새에 코가 간질거렸다. 옆 좌석에 놔둔 가방의 어깨 끈을 긴장한 듯 만지작거리며 그녀는 아빠가 얼마나 자주 그의 가족들을 산으로 끌고 갔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최소 일주일에 두 번, 토요일, 일요일. 덕분에 전국 유명하다 싶은 산은 이미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다 휩쓸어 버렸었지. 아현은 창 밖 멀리서 보이는 익숙한 톨게이트를 눈치챘다. 그리고 동시에 회상했다- 그게 언제였지? 아빠는 언제부턴지 갑작스럽게 다리가 아프다고 했다. 처음으로 다리를 절뚝이는 아빠를 봤을 때의 마음 속에서 스며 나오던 공포가 아직도 아현의 가슴을 죄어오는 같았다. 기어코 병원을 만류하고 앞산으로 산책 간다며 집을 나섰던 아빠는 난생 처음 구급차라는 것을 타보게 되었고, 째깐한 시골 병원이 집채만한 서울 대학병원으로 변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현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괴사' 들어 있던 같은데. 어쨌든 뒤의 아빠는 산은커녕 계단조차 걸음 오르내리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뭐라 형용할 없는, 옅어 보이면서도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깊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아빠에게서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아현은 가방을 들어 무릎 위에 올려둔 , 그를 위로하듯 가방을 한번 세게 쥐었다. 그녀가 아빠에게 속삭였다.

 

"긴장되지 않나? 나는 죽겠다."

 

그는 대답이 없었다.

사무실 창문 너머로 앞산이 훤히 보인다며 한껏 자랑하던 아빠는, 다리를 쫙 펼 수 없으면 고통 때문에 비행기도 버스도 오래 탈 수 없게 된 아빠는 그 정돈된 회사 안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현은 비가 조금 왔었는지 질척거리는 흙을 밟고 사진 속 그 장소를 발견했다. 용담정 구석의 나무가 드리워져 시원하고 그늘진 곳이다. 그녀는 신속히 돗자리를 폈다. 아버지를 앉혀 드려야 했다.

 

은색 서걱거리는 돗자리 위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액자 두 개를 놓았다. 한 품에 들어오는 넉넉한 크기의 액자 안에는 약간 경직돼 있는 아빠의 얼굴이, 그리고 그에 비해 작고 아담한 액자 안에는 아빠와 아현이.

머리숱이 빠지지 않아 훨씬 나은, 잠자리 안경을 낀 아빠와 조막만한 크기의 당돌하던 내가 그곳에 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돗자리 위에 올라와, 액자 옆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듬성듬성 찢겨져 들어오고 있었다. 같이 준비해 온 커피를 보온병에서 한 컵 따라내며 내가 아빠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오지 않나? 아빠랑 그리 지겹게도 많이 온 데다."

 

옆에 앉아 있는, 아빠 얼굴이 든 액자가 꽤 크게 느껴졌다. 나와 과거의 아빠 자신을 한 품에 품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



픽션이 가미된 제 이야기입니당. ㅋㅋ 아버지의 질병 부분이 같아요. (그 산 사진도 있긴 한데 용담정인지는...모름..)

주인공 이름은 실제 저희 아버지께서 적극적으로 미셨던(?) 제 이름이랍니다. 결국 어머니의 의견대로 지어지긴 했지만요. ㅋㅋ

주말만 되면 이번엔 차로 몇시간을 달려 어디를 가볼까 하고 눈빛이 번쩍번쩍(?)하셨는데.. 그땐 그 미소가 참 공포스럽게 보였다죠. 지금은 동네 앞산이라도 같이 오를 수만 있다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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