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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 과거] 산문 - 동행
게시물ID : readers_794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ambDa
추천 : 11
조회수 : 38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6/29 00:23:03

 그녀의 시선이 사진 한 장에 멈췄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사진을 이리보고 저리고보 굼 뜨더니 이내 사진 앞에 자릴 잡고 앉아버린다.

 “어여 준비 안 허고 뭐 혀?”

 “할매. 이것좀 봐라. 내 사진. 되게 잘 나왔지?”

 갓 20살을 넘긴 그녀의 앳되고 풋풋한 미소가 프레임 가득 아름답게 새겨진 독사진이었다. 할매는 그녀의 사진을 슥 보고 피식 하고 웃다가 금새 웃음기를 지우고는 표정을 굳힌다.

 “여그 미련이 남는 것은 알지만서도 빨리 서둘지 않음 오늘 밤 안에 못가. 곧 들어올 사람들 헌티도 민폐고.”

 그녀는 갈 길을 자꾸만 재촉해 대는 할매가 몹시 원망스러웠지만 이내 체념한 듯 바라보던 사진을 다시 한번 스윽 어루만져 보고는 한숨을 폭 내쉬더니 일어섰다.

 “기분이 참 이상하다. 태어나서 20년을 줄곧 살아오던 곳인데. 이제 영영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니...”

 “오죽 그럴것이여...참. 시간이란긋이 그랴. 우리 이쁜 손주 업어 키우던 것이 엊그제 같은디. 벌써 나이를 20개나 묵어불고...아직도 여그 미련이 그리 남냐?”

 할매는 아까보다는 조금 누그러진 말투로 말하며 그녀의 뺨을 슬며시 쓸어내렸다.

 “아니. 뭐 좋은 추억거리가 있다고...그래도 할매가 이렇게 직접 마중나와 줘서 나 얼마나 좋은지 몰라. 오랜만에 같이 이야기도 하고.”

 할매는 뒷짐을 진 채로 묵묵히 걷기 시작한다. 그녀는 할매의 조금 뒤에서 느릿느릿한 발걸음을 맞춰 따라 걷기 시작했다. 꽤 오랫동안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이내 그녀는 이 무거운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입을 연다.

 “할매는 그동안 나 안보고 싶었어? 나는 할매 무지하게 보고싶었는데.”

 “보고싶지 와 안 보고 싶겄어.”

 “에이. 정말?”

 “참말이제 그람 뭐더러 느이한테 그짓말을 하긋냐.”

 할매는 표정을 감추려 고개를 앞으로 둔 채 곁눈으로 힐끔 그녀를 바라본다.

 “그래. 나 가고 나서 뭣 하고 살았다냐? 심심헌디 말이나 함 들어보자.”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살짝 얼굴을 찌뿌린다.

 “음...어디서부터 말해야 되지? 맞다. 나 중학교 들어가서 부터 말할까?”

 지나간 기억을 되새기는 그녀의 눈빛이 7년전 13살 언저리 어딘가에서 멈춰선다.

 “사실 뭐 중1때는 별거 없었어. 아빠는 항상 일로 바쁘시고, 엄마는 엄마 나름대로 바쁘고. 나도 뭐 학교갔다 학원갔다 집 오면 거의 새벽이었으니까. 뭐 추억하고 뭐고 할게 없네.”

 할매는 무심한 척 시선을 바닥에 두고는 그녀의 목소리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중2때는...음. 맞아. 그 때 쯤 울 아빠 사업 망했지. 맞다 맞다. 할머니 드라마 자주보지? 그 아침드라마 같은 거 보면 집에 사람들 몰려와서 빨간딱지 붙이면서 막 난리치고 하잖아? 그광경을 내 직접 눈으로 보니까 참 어이없으면서도 신기하드라. 내가 드라마 속 주인공이구나 싶어서 웃음이 나올 정도였지.”

 그 흔한 추임새 하나 넣지 않은 채 조용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할매를 보곤, 그녀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음...그리고 나 중3때 엄마 죽을 뻔 한거. 맞다. 그 날. 우리 엄마 죽을 뻔 한 바로 그 날. 신기하게도 엄마가 할머니를 봤다고 했어. 엄마가 죽으려고 딱 마음 먹고 천장에 목 매달고 의자를 발로 뻥 찼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나타나서 ‘아이고 우리 며늘아가 이래 죽으면 안 뒤야!’ 하면서 줄을 딱! 끊더래. 울 엄마. 응급실에서 겨우 정신차려 놓고는 할매한테 미안하다면서 울다가 또 쓰러졌다니까. 어때 어때? 신기하지 않아?”

 할매는 이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 하고 웃고 만다.

 “아빠도 한동안 방황 하시다가 엄마 일 이후로 정신 차리시고 막노동부터 시작 하시드라.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지. 고등학교 내내 그냥 죽어라 공부했어. 사실 할매도 알지만 내가 어렸을 때 그닥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잖아? 뭐 그렇게 공부 열심히 해서 성적 유지 하고, 결국 서울대 붙었어. 오빤 학교 다니던거 휴학하고 일 시작 하고. 다 같이 고생했어. 얼마전에 조그만 가게도 하나 냈다? 곰탕집. 할매가 그리 곰탕을 잘 끓였더라면서 우리 엄마가 할매 곰탕 맛 내려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생각해보니까 우리 집 완전 인간승리네? 인간극장 나와도 되겠다. 음. 근데 좀 아쉽긴 하다. 나는 맨날 공부하던 기억밖에는 없네”

 할매는 고개를 조용히 끄덕끄덕 하더니 조용히 돌아서서 그녀의 손을 꼭 쥐어 잡는다. 그녀는 마치 앞으로의 걱정따윈 모른다는 듯 밝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할매는 마음이 편치 않은지 그녀의 손을 쥐고는 놓을줄을 모른다.

 “내도 참 못할 짓 헌다. 아직 한참 어린 아를 즈그 애미 애비 냅두고 이리 데려간디 맴이 편치만은 않어.”

 어느새 할매의 뺨에 스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며 그녀는 무엇인가를 말 하려다가 이내 입술을 꼭 다물고는 손을 들어 할매의 뺨을 슬쩍 닦아준다. 두 사람은 가던 길을 잊은 채 잠시 마주보고 서서는 서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그녀는 잠시 흔들리는 마음을 다시 잡고는 약간 뾰루퉁 하게 말한다.

 “그러고보니 할매. 아까 내 사진 보여줬는데 아직까지 아무말도 안하네? 왜? 그렇게 할 말 없을 정도로 이상하게 찍혔어?”

 할매는 눈물을 닦으며 슬며시 웃는다.

 “영정사진이 이뻐서 뭐혀. 살아서 이쁘게 잘 살어야지.”

 “그래두 내 마지막 사진인데. 어때? 우리 엄마가 사진 잘 고른거 같아?”

 “그리 신경 안써두 넌 이뻐. 걱정 말어.”

 할매는 한숨을 내 쉬고는 훠이 하고 주변을 둘러본다. 그녀는 조용히 할매 옆으로 다가와 주름진 손을 꼬옥 잡고는 싱긋 웃어보인다.

 “잘 가고. 보고싶음 찾아오고”

 “뭐야. 할매는 나 안 찾아올 것처럼 말한다?”

 “그라믄 할매가 손주를 찾아가야 쓰것냐? 젊은 손주가 할매를 찾아와야지”

 “그런가? 히히”

 곧 눈부신 빛이 나타나 그녀를 집어삼키듯 감싸안았다. 어느새 그녀의 모습은 사라지고 할매는 혼자 우두커니 남아 그녀가 사라진 곳을 구슬피 바라본다. 어두운 골목 저편에서 검은색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한 남자가 나타나 할매의 옆에 섰다.

 “자. 이제 소원은 모두 이루어 드렸소. 아직도 남은 것이 있소?”

 “아이고, 이 늙은 것이 주책이라 8년이나 당신을 기다리게 했는디 여기서 더 욕심 부렸다가는 천벌 받을라고.”

 남자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할머니의 양 어께를 감싸 쥐었다.

 “그럼 가실 시간입니다.”

 다시 한번 허공에 나타난 빛은 이번엔 할매와 남자를 감싸 안는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이내 사라져 버린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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