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박정희 혈서는 전설처럼 오래동안 떠도는 이야기였음.
그래서 그동안 소문을 확인하려고 긴세월 많은 연구자와 기자들이 만주지역에 대학이나 도서관, 벌판을 헤메며 신문을 찾아다녔지만 아무도 찾지 못했음
이유는 소문에 혈서 기사가 만주신문 혹은 만주일보에 실려있다고 퍼져 있었기 때문.
결론 부터 말하자면 만주신문은 일본에서 발행되던 지방지 같은 거였음,
당시에는 만주가 개척지였으니까 일본에 만주소식을 알고 싶어하는 수요가 있었던 듯.
쉽게 말하자면 부산일보를 서울에서 발행하는데 서울 사람들이 사서 보라고 찍어내는 거였음.
그러니까 그동안 만주에 가서 뒤지고 다녀도 아무도 찾을 수 없었던거임.
박정희 혈서 입대 재인증 사진이라고 하지만
일본 국회 도서관에 있는 마이크로 필름 사진 찍어온거.
이 사진을 보고도 박정희 혈서 기사가 조작이라고 할려면 직접 일본국회도서관에 가서 확인하고 와서 말꺼내기 바람.
일본국회도서관에 있는 마이크로 필름이 조작된거라고 할려면 1939년에 만주신문 편집장이 조선이 독립하고 박정희가 17년 동안 대통령 해먹을 걸 어떻게 알고 기사 편집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말꺼내기 바람.
출처:http://todayhumor.com/?bestofbest_8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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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닷컴 '박정희는 혈서(血書)를 쓰고 만군(滿軍)에 갔다'
1998년 서울 강남구에 살고 있던 유증선 할아버지는 나이가 87세였지만 상당히 또렷한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박정희와 함께 교사 생활을 했던 분들 중에서는 유일한 생존자이다. 지금까지 박정희 선생에 대한 증언들은 거의 전부가 제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자연히 과장과 오해, 그리고 미화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동료 교사 유증선의 증언은 객관적이고 좀더 정확할 것이다.
<1938년 5월경이라고 생각된다. 숙직실에서 같이 기거하면서 솔직한 이야기를 서로 털어놓을 때였다. 박 선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아무래도 군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제 성격이 군인 기질인데 문제는 일본 육사에 가려니 나이가 많다는 점입니다. 만주군관학교는 덜 엄격하다고 하지만 역시 나이가 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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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문득 생각이 나서 “박 선생,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 어떨까”라고 했다. 그는 즉각 찬동했다. 즉시 행동에 옮기는 것이었다. 바로 옆에 있던 학생 시험 용지를 펴더니 면도칼을 새끼손가락에 갖다 대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설마 했는데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는 것이었다. 박 선생은 핏방울로 시험지에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고 썼다. 그는 이것을 접어서 만주로 보냈다. 그때 편지가 만주까지 도착하는 데는 1주일쯤 걸릴 때였다. 한 보름이 지났을까, 누군가가 만주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박 선생 이야기가 실렸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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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에 당시 최고회의 의장 비서였던 이낙선 중령이 정리해둔 비망록에서도 비슷한 대목이 발견된다.
<원래 일본 육사는 연령초과였고 만주군관학교도 연령초과였으나 군인이 되고자 하는 일념에서 군관학교에 편지를 하였다. 그 편지가 만주 신문에 났다(이렇게 군관을 지원하는 애국 정신이 있다고…)>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26517&C_CC=AC
기사에 나오는 이낙선 중령=>66년~69년 초대 국세청장,69년~73년 상공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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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혈서의 내용 -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
2) 혈서에 동봉된 편지 내용
-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