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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산문 - 어느 일요일
게시물ID : readers_799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ROKMC
추천 : 1
조회수 : 34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6/29 21:41:42
그녀의 시선이 사진 한 장에 멈췄다. 날씨 좋은 주말을 맞아서 앨범을 몇 권 사 들고 와 상자에 아무렇게나 담겨 있던 사진들을 정리하고 있던 호연이었다. 호연은 그 사진을 집어 들고침대에 털썩 누워 팔을 뻗어 그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활짝 열어 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강렬한 햇빛이 호연이의 눈을 찡그리게 했다. 호연은 사진을 잠시 침대 위에 두고 일어나 얇은 소재의 흰 커튼을 치고 난 후에 다시 사진을 집어 들고 침대에 누웠다. 사진엔 OO대학교 정문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호연이었고 다른 한 명은 호연과 오랫동안 연애를 했던 호연의 전 남자친구 선준이었다. 호연은 이제는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된 사진 속 선준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
호연은 들고 있던 사진을 내려놓고 다른 사진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진 정리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호연은 벽에 걸려 있는 선반의 비어있는 자리에 앨범을 차례대로 꽂았다. 남은 것은 선준과 호연이 같이 찍은 그 사진 한 장 뿐. 호연은 그 이미 다 정리한 줄만 알았던 선준과의 관계에 사진 한 장이 남아 있다는 것이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연인 관계가 좋지 않은 쪽으로 끝이 날 경우, 잃는 것은 사랑했던 연인뿐만이 아니다. 그 연인과 관련된 모든 것, 즉 자기 인생에서 연인과 함께 했던 그 시간과, 그 시간 동안 이루어진 모든 일들과 생겨난 추억들이 깡그리 사라지는 것이다. 이 말에 따르면 호연은 29년 인생에서 대략 10년을 잃어버렸다. 인생의 거의 1/3을 잃어버린 호연은 그 잃어버린 인생의 작은 조각을 찾게 되어서 한 편으로는 기뻤으며 한 편으로는 자신이 아직도 미련을 가진 것 같아 화가 났다. 호연의 잃어버린 인생은 사복에서 교복을 입게 되는 그 변화의 순간에 슬그머니 시작되었다.
평범했다.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어떤 학원을 다니게 되었고, 그 학원에서 마음 맞는 남자애와 친하게 지내다 사귀게 되었다. 호연의 연애감정이 쉽게 꺼지는 감정이었는지 호연이 일방적으로 선준을 밀어냈다가 다시 사귀기를 네 번. 첫 연애기간은 32, 두 번째는 79, 세 번째는 132, 네 번째는 대략 6년 정도를 사귀었다. 알게 된 시점부터 마지막 연애가 끝나기까지가 대략 10년이었다. 학원에서 다 같이 여름 캠프를 간 추억, 연합고사를 앞두고 학원에서 함께 공부한 추억, 하굣길에 같이 걸으며 수다를 떨었던 기억, 처음으로 손을 잡은 기억, 몇 번을 헤어지자 하고 마음 아파했던 기억, 대학 입학 후 첫 방학에 처음으로 단 둘이서 놀러 간 기억, 졸업식에 꽃다발을 주고받은 기억 등 호연은 자신의 학창 시절의 추억 모두를 잃어버렸다.
헤어지자.”
선준아, 니가 먼저 그렇게 말 했으니 우리 이제 다시는 만날 일이 없겠지. 그 동안 미안했어. 잘 지내.”
너무 쉽게 헤어졌다. 그렇지만 아무도 아파하지 않는 이별이었다. 호연은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별 후에 호연은 왠지 무언가 하나가 모자라는 것처럼 보였다. 눈빛이 없었다. 마치 인형처럼, 호연은 항상 멍했다. 힘들어 보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무 후유증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모자라는 부분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데 대략 4년이 걸렸다. 인생의 일부를 잃어버린 다는 것은 잃어버린 부분을 다른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 대체품들을 원래 내 것이었다는 듯 이용하는 데 저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체품들은 잘 작동하고 있다. 그러니 그 사진을 보아도 호연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것이리라.
호연은 으슬으슬한 찬 기운을 느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낮에 열어 둔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문을 열어두고 옷을 입을까 아니면 문을 닫을까 고민하던 호연은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의 느낌이 좋아서 옷을 입기로 결심했다. 얇은 카디건을 걸치고 창문 밖으로 상체를 내밀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들이 꽤 많이 보였다. 호연은 아는 별자리를 찾아도 보고, 아무 별이나 연결하여 새로 별자리를 만들어 보기도 하며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엣취! 훌쩍. 아 감기 걸리겠다.”
재채기를 하고 호연은 코를 훌쩍이며 창문을 닫았다. 벽에 걸린 시계는 11시를 조금 넘긴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 내일 출근인데! 10시에 자려고 했는데.”
급하게 입고 있던 옷들을 내팽개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이 나오기를 잠깐 기다렸다가 머리에 물을 묻혔다. 얼마 전에 머리를 확 자르고 나니 머리가 물에 더 잘 젖고, 사용하는 샴푸 양도 적어지고 거기다 말리는 시간도 짧아지고 마른 후 머리에 손질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호연은 매우 흡족했다. 머리를 감고 몸에도 물을 묻힌 후 샤워볼에 바디클렌져를 짜고 거품을 내어 몸 구석구석을 닦았다. 이후 따뜻한 물로 몸을 씻어냈는데 따뜻한 물이 몸에 닿는 느낌이 좋아서 호연은 또 한참을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에 몸을 맡긴 채 서 있었다.
다 씻고 나와서 호연은 몸을 닦고 속옷을 입고 화장대 앞에 앉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얼굴을 이리 저리 돌려 보기도 하고 손으로 얼굴을 더듬어 볼록 튀어 나온 부분을 모두 손톱으로 긁어냈다. 큰 피지가 나오면 호연은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이 곳 저 곳 피지가 빠져나간 부분에 파인 구멍들을 쳐다보다가 호연은 화장대 위에 있던 화장품들을 차례대로 발랐다. 마지막으로 수분크림을 듬뿍 바른 후 얼굴을 몇 번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주워서 정리하고 나서, 방 한편에 개어져 있던 요와 이불을 가져와 깔고서는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호연은 깜깜한 방 안에서 눈을 뜨고 낮에 본 사진과 그 사진 속 인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선준과의 일을 생각하다 같이 놀던 다른 친구들이 생각난 호연은 급히 휴대전화를 열어서 연락처를 둘러봤지만 다들 몇 년 째 연락을 하지 않고 있던 터라 바로 통화 버튼을 누를 만한 이름이 없었다. 호연은 다시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잊을 수 없는 전화번호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고개를 양 옆으로 세차게 젓고는 호연은 다시 다른 친구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같이 놀던 친구들과의 즐거운 추억에 혼자서 미소를 짓기도 하고, 부끄러운 기억에 혼자서 이불을 발로 차거나 몸을 배배 꼬면서도 호연은 계속해서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그러다 번뜩 자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 휴대 전화를 켜니 시간은 벌써 1시가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다. 호연은 내일 아침에도 일어나기는 힘들겠구나 싶어 일어나면 밥을 먹고 씻고 옷부터 입을까, 화장부터 할까, 내일은 버스를 탈까, 회사에 도착하면 무엇부터 시작할까 등 이것저것 다른 일들을 생각하다 점점 의식이 흐려졌다. 현실과 수면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면서 비몽사몽 하다가 몸이 몇 번 움찔하더니 호연은 잠에 빠졌다. 그렇게 평범한 사회인의 하루가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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