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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의 늪> 하
게시물ID : panic_200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47973;미?
추천 : 19
조회수 : 471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08/07/17 02:14:33
결말이 ㅎㄷㄷ..
다윗은 자신의 얼굴에도 피가 튀기건만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갈고리를 휘둘렀다. 사람들은 소년의 손동작에 맞춰 고함을 질렀다. 소년의 손동작은 점점 빨라졌다. 갈비뼈가 으스러지고 살점이 너덜거리며 드러났다. 나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멍히보고 있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심장이 빠져 죽은 흑인의 시체가 떠올랐다. 친구고 뭐고 간에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살인을 즐기는 이놈들은 모두 미친 놈들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종교라는 거룩한 이름을 빌어서 살인을 즐기는....... 나는 가스통을 바닥에다 내려놓고 뒷걸음질쳤다. 전신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살고 싶었다. 흑인처럼 심장을 드러낸 채 잔혹하게 죽고싶지 않았다. 나는 뒤로 물러서다가 이를 사려물었다. 준수의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수민이를 만나게 될 거라고 꿈에 젖어 있던 눈동자가 떠올랐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친구를 지옥에 혼자 놔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이들의 광기가 더없이무서웠지만 달아나서 평생 받을 가책보다는이 자리에서 죽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았다. 아니 이제는 준수를 위해서 준수를 구하는게 중요한 게 아니라, 평생 죄의식에 시달리지않기 위해서, 나를 위해서 준수를 반드시 구해내야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나는 다시 달려가서 가스통을 잡았다. 그리고 연단을 향해서 다가갔다. 연단에서는 데이빗이 칼을 들고 서 있었다. 그는 이미 만신창이가 된 그 흑인의 가슴에 손을 집어 넣어, 심장을 꺼내고 있었다. 그 옆에 서서 눈을 꼭 감고 부들부들 떨고있는 준수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데이빗이 심장을 다윗의 손에 주었다. 다윗이 방금 꺼낸 피가 뚝뚝 떨어지는심장을 높이 처들었다. 문득, 데이빗에서 본 그림이 떠올랐다. 소년의 모습은 골리앗의 가슴에서 심장을 꺼낸 다윗, 바로 그 모습이었다. 다윗은 연단 앞에 마련된 모닥불에다 심장을 휙 집어던졌다. 광신도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입을 모아 뭐라고 외쳤으나 무슨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연단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은 피범벅이 되어있었다. 준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광신도들은 방금 치른 끔찍한 치른 피의 대제전도 불구하고, 준수를 원했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준수를 십자가에 매달으라고 외쳤다. 나는 길게 심호흡을 하고 광신자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피에 취했는지 아무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너무 긴장한 때문인지 가스통의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야구방망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연단에는 준수가 서 있었다. 그 앞에 데이빗이 서서 죄를 심판하고 있었다. 이성을 잃은듯한 광신도들의 웅성거림에 묻혀 뭐라고 하는지 앞 부분은 잘 들리지 않았다. “......열등인종이며, 유색인종인 이 자는 우리의 적인 기독교를 숭배하고 있다. 또한 우리의 성스러운 땅에서 더러운 음악을 연주했다.코래쉬 님이 가장 혐오하는 그런 음악을.......이 자의 추악한 영혼을 이 세상에서 추방해야한다.” 그들은 준수를 눕혔다. 이번에는 해머와 철못이 아닌 칼을 데이빗이 번쩍 치켜들었다. 그칼은 곧바로 다윗의 손에 옮겨졌다. 더 이상 주저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맨 뒷줄에 서서 횃불을 치켜들며 환호하고 있는 한 사내의 어깨를 야구방망이로 내리쳤다.신음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서 맥없이 쓰러졌다. 주위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돌아보았다.연단 위를 보았다. 다윗이 준수의 손 위에칼을 놓고, 그 칼을 밟으려 하고 있었다. 나는야구방망이를 버리고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사내의 횃불을 집어들었다. 광신도들이 서서히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횃불을 얼른 가스통 위에 올려놓고 가스통 밸브를 잡으며 연단을 향해 외쳤다. 목청이 터져라고....... “멈춰!” 내 외침에 연단 위에서 막 발에 힘을 줘 준수의 손가락을 절단 내려는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나를 돌아보았다. 400여 개의 광기어린 눈동자가 나에게 꽂혔다. 짧은 순간, 그렇게시끄럽던 이곳에 죽음과 같은 적막이 흘렀다.“물러서!” 나는 한 손에 햇불을 들고 한 손으로는 사스통 밸브를 움켜쥔 채 소리쳤다. 광신도들은 나의 의중을 알아차렸는지 슬금슬금 뒷걸음질쳤다. 나는 그들의 사이를 뚫고서 연단을 향해다가갔다. 가슴은 쿵쾅거리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너무 긴장한 때문인지 어지럽기까지 했다. 사람들의 얼굴이 커다랗게 보였다가 작아지곤 했다. 하지만 한치도 방심할 수 없었다.누가 어디서 누가 덮쳐 올지 모르는 일이었다.사실 가스통을 들고 집회장으로 올 때만 해도 밸브를 열어 자폭할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참혹한 죽음을 당하는 흑인을 보고 나니까 마음이 바뀌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내 누군가 섣부른 짓이라도 하려든다면 정말로 터뜨려 버려야겠다는 오기가치솟았다. 나는 모세의 바닷물처럼 갈라진 한가운데로연단을 주시하며 천천히 걸어갔다. 연단 위의데이빗과 다윗, 그리고 추종자들은 당황하는빛 없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냉소로 가득 차 있었다. 준수는 분위기가바뀐 걸 깨달았는지 돌아보려 했다. 하지만 손위에 칼이 놓여 있어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연단 바로 앞까지 갔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지나온 길은 다시 사람들이 메꾸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나갈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나는 갈 때까지 가 보자는 심사로 연단 위로올라갔다. 연단 위로 올라서자 그제서야 준수가 나를 발견했는지‘일한아!’하고 불렀다. 준수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우리를 보내 줘!” 나는 데이빗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데이빗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다시 한 번‘LET US GO!’하고 위협적으로 외쳤다. 그러자 데이빗과 둘러선 사람들이 준수의 손 위에 칼을 밟고 서있는 다윗을 바라보았다. 마치 다윗의 허락을구하는 것처럼....... 나는 집감적으로 다윗이라는 꼬마가 이 광신도들이 섬기는 숭배 대상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꼬마만 인질로 잡으면 탈출도 가능하리라....... 나는 가스통과 횃불을 든 채로 다윗에게 다가갔다. “빨리 발을 떼! 그 나이에 죽고 싶지는 않겠지?” 가스통을 열 것처럼 위협하면서 다윗을 향해 외쳤다. 다른 사람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다윗과 나를 지켜보았다. 당연히 발을 뗄 거라고 예상했으나 아니었다. 다윗은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다윗의눈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인간이 그토록싸늘한 눈빛으르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눈빛이었다. 도저히 어린애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말로 악마와 마주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다윗은 정말로 악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한순간, 다윗이 나를 씨익웃었다. 비웃음이담겨있는, 경멸어린미소였다.나는 직감적으로 다윗이 가스통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갑자기놈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물러서! 빨리!”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가스통 밸브를 잡았다. 놈은 내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칼을 밟았다. 칼날 위로 몸을 날리다시피 해서....... “아아악!” 준수의 처절한 비명과 함께 손가락들이 피를 뿜어내며 잘라졌다. 손가락들이 꿈틀거리며 연단 위로 굴렀다. 당황해서 어떻게 해야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광신도들이 환호성을 올렸다. 그리곤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낮으막하게 다시 합창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심 겁이 나기도 했지만, 표정 하나바꾸지 않고 준수의 손가락을 잘라 버린 다윗에게 분노를 느꼈다. 놈은 여전히 칼날을 밝고 서서 나를 경멸의눈으로 바라보았다. 몸부림 쳐 봤자 소용없다는 식의 조소를 물고서....... 놈의 당당한 모습에 용기를 얻었는지 다른 사람들이 가스통을두려워하지 않고 점점 나에게 다가왔다. 다윗은 궁지에 몰린 내 모습이 재미있다는듯이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사냥을 즐기는 포수처럼....... 놈들은 사방에서 압박해 들어왔다. 연단 밑의 광신도들이 입을 맞춰‘죽여라! 죽여라!’하며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가까이 오면 너희들도 끝장이야!” 다시 한 번 횃불을 가스통에다 들이대며 협박했지만 놈들은 더 이상 겁을 먹지 않았다.어린 다윗의 행동에 용기를 얻은 건지, 종말뒤에 올 영생을 믿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내가 정말로 가스통을 폭파시키기 전까지는 아무도 다가오는 발걸음을 멈출 것 같지 않았다.“미친놈들!” 이를 갈아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제 모든 게 끝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걸 체념한 채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한순간, 준수의 잘리워진 손가락과 잘려진 손마디에서 흐르는 핏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쳐들었더니 다시 다윗의 경멸어린미소가 보였다. 나는 다윗의 웃는 얼굴을 보면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준수의 손가락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잘라 버린 저런놈에게 당할 수만은 없다는 오기가 불끈 치솟았다. “이야앗!” 나는 쏜살같이 몸을 날려 준수 옆에 서 있는다윗의 턱을 주먹으로 내질렀다. 놈은 악마 같은 감정을 지닐고 있을 지라도 신체적으로는아직 12살 어린아이였다. 불시에 날아온 나의주먹을 맞은 다윗은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다가오던 사람들이 뜻하지 않은 사태에 모두들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나의 주먹 한 방에 널부러진 다윗의 모습을 보자 자신감이 치솟았다. 광신도들의 눈에게는 우상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내 눈에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나는 틈을 주지 않고 일어서려는 다윗에게다시 달려들었다. 데이빗이‘잡아!’라고 소리쳤을 때는 내 발이 이미 다윗의 목을 짓누른뒤였다. 다윗이 고통스러운지 내 다리를 잡았다. 나는 다리에 힘을 줬다. “다윗을 풀어 줘!” 데이빗이 잔뜩 화가나 다가오면서 소리쳤다.“멈춰 서! 목뼈를 부러뜨려 버리기 전에!”나의 기세에 눌린 데이빗이 주춤 멈춰 섰다.나는 그들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계속해서 명령했다. “내 친구를 풀어 줘! 빨리!” 오른발에 힘을 주면서 소리치자 다윗이 고통스러운지 손을 허공으로 휘저었다. 데이빗이 당황해서 시끄는 대로 하라고 말했다. 데이빗 옆에 있던 사람들이 준수에게 달려가서 결박을 풀었다. 준수는 결박이 풀리자 잘린 왼손을 잡고서신음을 삼켰다. 고통스러워하는 준수의 모습을 보자 다윗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밟고있는 발에 다시 힘을 주었다. 다윗은 신음을삼키며 증오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놈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악마의 화신이 분명한 것 같았다. “준수야, 고통스럽겠지만 참아. 일단 미치광이들이 소굴을 벗어나고 보자.” “그래.......” 내가 한국말로 말하자 준수가 잘린 손마디를 힘껏 쥐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준수야, 네 옆에 떨어져 있는 칼을 가지고이리와.” 준수는 아직도 피가 흐르는 왼손을 오른손겨드랑이에 꼈다. 그리곤 오른손으로 피가 채응고되지 않은 채 묻어 있는 칼을 들고서 비틀거리며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티셔츠는 금세피로 물들어 갔다. 붉은 피를 보자 흥분이 됐다. 나는 횃불과 가스통으로 놈들을 위협했다.“접근하지 마! 이 밸브를 돌리면 이 꼬마는물론이고 너희들도 죽어!” 놈들은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았는지 우리를 빙 둘러싸고 기회를 노렸다. “준수야! 악마새끼를 일으켜 세워!” 나는 횃불을 휘둘러 놈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한국말로 말했다. 준수는 이를 앙물고서 잘린 손으로 다윗을 잡았다. 그리곤 칼을 든 오른손으로 다윗의 목에 겨눴다. 준수가 다윗을 일으켜세우자 광신도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교주격인 다윗을 준수가 죽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우리를 보내 줘! 다윗을 살리고 싶다면...”나는 데이빗을 향해서 소리쳤다. “그렇게는 안 될 걸. 우린 죽음따윈 두려워하지 않아!” 데이빗은 우리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비켜! 개자식들아!” 준수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정말로 칼로 다윗의 목을 찌를 태세였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준수의 외침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아끼는 손가락을 잘려 버린 준수이기에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데이빗과 그 추종자들이 주춤주춤 한쪽으로물러섰다. 나는 가스통과 횃불을 들고서 피 묻은 연단을 내려갔다. 준수가 다윗을 끌고서 따라내려왔다. 앞에는 광신도들이 버티고 있었다. 내가 한가운데를 향해서 걸음을 옮기자 그들은 순순히 옆으로 길을 터 줬다. 내 뒤를 준수가 나에게 등을 기대다시피 해서 사방 경계를 하며 따라왔다. 놈들은 호시탐탐 다윗을 구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한걸음 옮기기가 만만치 않았다.광기와 증오어린 시선을 받으며 나는 인파 속을 헤치고 나갔다. 무리 속을 빠져 나오는데 실제는 10분도 안걸렸겠지만 서너 시간 이상이 걸린 것만 같았다. 우리가 무리 속을 다 빠져 나오자 놈들은일정한 거리를 두고 우리를 천천히 쫓아왔다.걷다 보니 발에 걸리는 걸이 있었다. 내가버리고 간 야구 방망이였다. 나는 가스통을 잠깐 내려놓고 재빨리 야구 방망이를 주웠다. 방망이를 재빨리 옆구리에 차고는 다시 가스통을 잡았다. 걷기는 불편했지만 야구방망이가있으니 마음이 다소 놓였다. “따라오지 마!” 준수가 놈들에게 거듭 소리쳤지만 소리칠때뿐이었다. 우리가 멈추면 놈들도 멈춰 섰고우리가 걸으면 놈들도 걸었다. 그 놈들 등 뒤로 피의 향연이 자행되었던 제단과 십자가가 보였다. 십자가에는 흑인이 심장이 빠진 채로 피투성이가 되어 못박혀 있었다. 피투성이의 십자가는 놈들이 지닌 광기와함께 섬뜩한 공포를 느끼게 했다. 마음은 급했지만 놈들의 손아귀에서 쉽게벗어날 수 없었다. 오랫동안 긴장한 때문인지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정신력으로버티던 준수도 피를 많이 흘린 때문인지 기력이 눈에 띄게 많이 빠져 있었다. 정신을 차리려고 힘겹게 눈꺼풀을 깜빡이곤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빈도수가 잦아졌다. 나는 일단 펑크가 난 차라도 타고서 놈들의손아귀에서 벗어날 생각었다. 실질적으로는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참으로 아득하게만 보였다. 놈들은 준수의 협박에 이십 미터 가량 뒤로처져서 우리를 쫓아오고 있었다. 햇불을 들고말없이 쫓아오는 놈들의 모습은 마치 공동묘지에서 막 일어난 시체처럼 으시시했다. 이마의 땀방울이 흘러내려 손등으로 닦는순간이었다. 준수가‘악!’하는 외마디 비명과함께 쓰러졌다. 다윗이 자기 목에 대고 있는칼을 맨손으로 잡은 다음, 준수의 다친 손을팔꿈치로 내지르고 나서 칼을 뺏어 준수의 허벅지를 찌른 것이었다. 순식간에 일어진 일이어서 눈을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열두 살짜리 아이의 행동으로는 보이지 않는 아주 민첩한 동작이었다. 다윗은 악마의 얼굴에서나 나올 듯한 미소를 지으며 달아나려 했다. 나는 다윗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이것저것 계산하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가스통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곤 달아나는다윗의 머리를 향해 내던졌다. 정통으로 맞았다면 놈은 두개골이 박살났으리라. 하지만 가스통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놈의 어깨에 맞았다. 둔탁한 소리가나는 걸로 봐서 어깨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나는 다시 달려가 가스통을 잡았다. 놈에게최후의 일격을 가하려고 가스통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곤 놈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놈의눈동자에 일순간 공포가 어렸다. 이 놈을 죽이는 건 살인인가, 정당방위인가?뜻하지 않았던 의문이 불쑥 들었다. 잠시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다윗은 부서진 어깨를 감싸고 일어났다. 나를 경멸어린 눈으로 쏘아보더니 순식간에 마을 놈들 쪽으로 도망쳤다. “야, 인마! 뭐하는 거야?” 준수의 외침에 제정신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다윗이 풀려나자 마을놈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우리를 잡으려고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가스통을 내려놓고 밸브를 열었다. 횃불을 들고 달려오던 놈들이 주춤 멈춰 섰다.나는 재빨리 땅에 떨어져 있는 횃불을 들었다.쓰러져 있는 준수를 부축해서 공터 쪽으로 달렸다. ‘쉬익’하고 가스가 새어 나오는 소리가 등뒤에서 들려 왔다. 마을 놈들은 일제히 횃불을던져 버리고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준수를 부축한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기가힘들었다. 마을 놈들과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이십미터 가량 가서 뒤를 돌아보니 마을놈들이 가스통에 10미터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어둠 속에서도 놈들의 눈빛은 광기로 번뜩였다. 무수한 뱀눈들이 먹이를 향해 달려오고있는 형상이었다. “이 개새끼들아! 죽어라!” 나는 한국말로 힘차게 외친 다음에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가스통을 향해 던졌다. 횃불은허공을 가르고 밸브가 열려진 가스통을 향해날아갔다. 횃불은 가스통을 넘어서 2미터 가량 앞쪽에 떨어졌다. 몰려오던 놈들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뒷사람들에게 떠밀리다시피 해서 앞쪽의사람들이 다시 전진했다. 맨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땅에 납짝 엎드렸다. 가스통이 폭발하기를 기다렸지만 내가 기대했던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잠자코 숨을 죽이고 있던 마을 놈들이 땅에 떨어진 횃불을 쳐다보았다. 횃불은 점점 불길이 약해져 갔다.나는 준수를 부축한 채 뒷걸음질 쳤다. 내계획은 완전히 실패로 돌라간 셈이었다. 어쩌면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들었다. 가스가 폭발하지 않자 놈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옆구리에서 야구 방망이를빼들었다. 몇 명이 될지 모르겠지만 죽기 전에놈들의 골통을 최대한 대로 부숴 버려야겠다는 각오를 하며 야구 방망이를 힘껏 휘둘렀다.맨 앞쪽의 사람들이 횃불을 넘어서 다가왔다. 그 순간이었다. ‘꽈과꽝!”’하는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가스통이 폭발했다. 시뻘건 불기등이 허공으로 높이 치솟았다. 나는 준수와 함께 폭발의 여파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거리가 순식간에 불바다로 뒤바뀌고 말았다. 놈들과의 사이에 거대한 불의 장벽이 생긴것이었다. 치솟는 불길을 통쾌한 승리감에 젖어바라보다가 준수를 부축해 달리기 시작했다.준수의 팔과 다리에서 출혈이 계속됐다. 몇발짝 달리다가 거의 기절하다시피 한 준수를등에 업고 펑크난 차로 달렸다. 준수를 차에태워 놓고 뒤를 돌아보니 아직도 불길은 치솟고 있었다. 펑크난 차로 달아나 봤자 놈들이 쫓아오는것은 시간 문제일 것 같았다. 칼이라도 손에쥐고 있다면 타이로를 모조리 펑크내 버리겠는데 칼도 놓고 온 상태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늘어선 차들의 헤드라이트를 박살내기 시작했다. 칠흙 같은 밤에가로등도 없는 산길을 헤트라이트도 없이 쫓아온다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헤드라이트를 모조리 박살내고 나서 우리차의 미등을 깨뜨렸다. 펑크난 차로 쫓아온다해도 우리가 탄 차의 뒤를 쫓아올 수 없게끔...차에 오르려고 하는데 미처 발견하지 못한차가 한쪽 구석에 움크리고 있었다. 낡은 정도로 봐서는 폐차 같았지만 만약을 몰라 달려갔다. 헤드라이트를 깨뜨리고 돌아서는데 불길을뚫고 시꺼먼 물체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왔다.개였다. 어젯밤에 보았던 시커먼 두 마리 사냥개였다. 그 놈들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쏜살같이 나에게 달려왔다. 하얗게 빛나는 송곳니를 보니 등골이 오싹해지고 덜컥 겁이 났다.하지만 놈의 먹이가 될 수는 없었다. 나는입술을 꽉 깨물며 야구방망이를 검도할 때 죽도를 잡듯이 양손으로 쥐었다. 훈련된 개들은 사냥감, 특히 인간을 공격할때는 허공으로 뛰어올라서 체중을 실어 사람을 쓰러뜨린 다음, 이빨로 공격한다는 구절을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났다. 나는 놈이 허공으로 뛰어오르는 순간을 눈을 부릅뜨고 기다렸다. 앞서 달려온 개 한 마리가 커다란 입을 쩍 벌리고 내 앞에서 펄쩍뛰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체중을 실어 뛰어오르는 개의 정수리를 내리쳐다.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개가 맥없이 허공으로 떨어져 내렸다. 벌렁 누운 사냥개는 네 다리를 한동안 부르르 떨다가 쭉 뻗었다. 이어서 다른 개 한 마리가 숨 돌릴 틈도 없이 공격해 왔다. 미처 자세를 수습할 시간적인여유도 주지 않은 기습적인 공격이었다. 나는야구공을 치듯이 그대로 개의 얼굴을 향해 배트를 힘껏 휘둘렀다. 팔목에 은은한 통증이 왔다. 턱뼈에 맞았는지‘깡!’하는 소리가 났다. 족히 육십 킬로는넘을 것 같은 개가 옆으로 풀썩 떨어졌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쓰러진 개들을 보았다. 턱을 맞은 개의 늘어진 목덜미가 숨가쁘게출렁거렸다. 한번에 힘을 너무 쓴 때문인지 극도의 피로감이 느껴졌다. 땀을 닦으면서 보니 놈들이 손에 각목을 들고 우르르 몰려 오고 있었다. 불길 한 가운데에 서서 다윗이 한손으로 어깨뼈를 감싼 채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재빨리 차에 올라탔다. 서둘러 시동을걸었지만 시동은 뜻대로 잘 걸려 주질 않았다.놈들은 순식간에 차를 에워쌌다. 가까스로 시동을 건 나는 힘차게 액셀러레이턱를 밟았다.차는 앞으로 나가기는 나갔지만 타이어가펑크가 난 때문에 속도가 제대로 나지 않았다.차를 둘러싼 마을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각목을 휘둘렀다. 나는 핸들을 도로 쪽으로 꺾고속력을 높였다. 각목에 맞아 차 옆유리창에 균열이 갔다. 나는 둔탁한 소리를 들으면서 도로 쪽으로차를 몰았다. 핸들은 심하게 흔들렸지만 놈들을 떨궈 놓기 위해 속력을 높였다. 따라오면서차를 향해 각목을 휘두르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갔다. 대신 이번에는 차들이 따라왔다. 바퀴가 도로 위에 부딪히면서 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사방은 먹물을 뿌려놓은 물 속처럼 깜깜했다.허공에 떠 있던 초생달마저 구름 속에 가리워져 있었다. 우리가 탄 차는 워낙 속도가 느렸지만 놈들은 헤드라이트가 없어 우리 차를 따라잡지 못했다. 둔탁한 소리가 들려 오는 걸로 봐서는갓길로 차들이 처박히는 모양이었다. 조수석의 준수는 옆으로 길게 드러누워 있었다. 잠시 의식을 읽은 모양이었다.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차 안을 가득 메웠다. 백미러로 보니 저 멀리 마을이 보였다. 처음마을에 들어서서 불빛을 발견하였을 때는 구원의 불빛 같았는데 지금은 마치 악마의 불빛같았다. 정말로 지옥에서 탈출하는 기분이었다. 마을에서 보낸 이십사 시간이 마치 십 년이나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숲에 가려 불빛이 사라지자 마음이 다소 놓였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놈들에게 다른 차량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설령 공터에 놓여 있던 차가 전부라 해도 놈들이 헤트라이트를 고치고 나면쫓아오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만약을 대비해서 최대한 멀리 도망가야 했다. 타이어가 펑크 나 있다 보니 속력을 낼 수없었다. 작은 돌멩이에도 차가 덜컹거리며 튀었다. 나는 차의 속력을 15마일 정도로 유지했다. 시속 15마일이라면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의 거리가 60마일이니까 4시간은 가야 하는셈이었다. 나는 일단 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차의 진동이 심해 이대로 4시간을 달렸다가는 준수의 출혈이 너무 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일단 여행 가방에서 속옷을 꺼내 준수의 팔과 허벅지를 단단히 묶었다. 손에서는 피가 빠져 나갈 만큼 빠져나갔는지 출혈이 금세 멎었다. 하지만 준수는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혼수 상태에서 깨어나질 못했다.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겠는데 어디까지나 마음뿐이었다. 자동차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갔다. 바퀴가 심하게 덜덜거리기 시작했다. 금세라도 주저앉아 버리거나 바퀴가 빠져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조심해서 차를 몰았음에도불구하고 차는 정말로‘쿵!’하는 소리와 함께멈춰 서더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퀴를 지탱하는 축이라도 부러진 모양이었다. 트렁크에서 작은 손전등을 꺼냈다. 만약을몰라 야구 방망이를 옆구리에 찾ㅆ다. 그리곤신음하고 있는 준수를 업고서 걷기 시작했다.정확한 거리는 모르겠지만 마을에서 멀리 벗어난 것 같지는 않았다. 놈들이 이대로 우리를놓아 준다면 좋겠지만 그들의 태도로 보아서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플래쉬로 앞을 비추며 부지런히 걸어갔다. 혼수 상테에 빠져 있다가 잠깐 정신이 돌아왔는지 준수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일한......아...... 나...... 놓고 가....... 나중에...... 데...... 리러......오면...... 되......잖아....... 나...... 틀렸어.......” “미친놈! 헛소리 하지 말고 가만 있어. 너를데려가야 나중에 술이라도 한잔 얻어먹을 거아니냐!” “바보...... 같은...... 자식.......” 준수의 욕설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놈을놔 두고서 도망가지 않은 나의 판단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거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초생달이 다시 구름 속에서 나와 앞이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손전등을 끄고 걷기 시작했다.만약 놈들이 쫓아오더라도 위치를 노출시키지않기 위해서였다. 도로변으로 하늘을 찌를 듯한 나무가 서 있었다. 차로 추격해 온다 해도 숲 속으로 숨으면 도저히 못 찾을 것 같았다. 걷다 보니 가끔씩 부엉이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숲에서 야생동물이라도 불쑥 튀어나올것만 같았다. 준수는 다시 의식을 잃었는지 축늘어졌다. 아무도 없는 어둠 속을 터덜터덜 걷다 보니피로가 몰려 왔다. 숲 속에서 그냥 밤을 지새고 싶었지만 피를 흘리고 있는 준수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멀리 차 헤드라이트가 보였다. 놈들의 마을과는 반대편 도로에서 오는차였지만 나는 혹시 놈들이 다른 길로 돌아오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무 뒤에숨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점점 다가왔다. 자세히보니 자동차 지붕 위에서 빨갛고 파란불이 돌아가고 있었다. 순찰차, 순찰차였다. 나는 손전등을 켜고 도로로 나갔다. 순찰차가 우리 앞에 멈춰 섰다. 헤드라이트 불빛 때문에 눈이 부셔서 차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와 주세요!” 나의 외침을 들었는지 차 문이 열리고 정복차림의 사내가 내렸다. 건장한 체구였다. “무슨 일이요?” 그는 나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친구가 많이 다쳤어요. 빨리 병원으로 옮겨주세요!” “그래요? 어디서 오는 길이어오.” “앤센빌...... 앤센빌에서 도망쳐 오는 길입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요!” “앤센빌?” 사내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와 준수를 쏘아보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차에 타시오. 뒷자리에!”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뒤로 갔다. 미국 순찰차의 뒷자리는 범인 호송용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안에서는 문을 열 수 없을 뿐만 아니라앞좌석과는 철망으로 단절되어 있었다. 뒷자리에 타라는 것이 약간 꺼림칙했지만두 사람이라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시키는대로 뒤로 돌아갔다. 사내는 문을 닫아 줄 속셈인지 따라왔다. 준수를 부축해서 태우는데준수가 뭐하고 헛소리를 했다. 차 안에 귀에 익은 음악이 들려서 준수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헛소리를 하는 건가 보다 생각하고 차에 오르려는데 준수가 다시 한국말로 뭐라고 중얼거렸다.“준수야, 뭐?” “일...... 한...... 아..... 이...... 음악.......”“음악? 음악이 뭐?” 내가 준수에게 다시 물었다. 뒤에 서 있던경관이 빨리 올라타라고 재촉하더니 급기에는나를 확 밀었다. 그 순간, 준수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머리카락이 쭈삣하며 섰다. 차에서 흘러나오던 그 음악은 바로 광신도들이 피의 의식에서 쓰던 합창곡이 분명했다. 차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경음악으로 편곡되어 있지만, 분명 그노래가 맞았다. 음악에 민감한 준수가 실신 상태에서도 용케 그 곡을 알아들었던 것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경관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났다. 그의 손이 허리춤의 권총으로갔다. 나는 재빨리 상체를 차 안에서 빼냈다.그는 총지갑에서 권총을 빼내려 했지만 잘 빠지지 않았다. 나는 야구 방망이를 옆구리에서 빼들었다. 그가 총지갑에 있는 단추를 끌르고 총을 빼냈지만 내가 한발 앞서서 그의 머리를 야구방망이로 후려쳤다. 그가 바닥으로 굴렀다. 나는달려가서 그의 얼굴을 힘껏 내질렀다. 얼굴에서 피가 튀었다. 막상 쓰러뜨려 놓고 나니 진짜 경찰을 쓰러뜨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플래쉬를 들고 와서 놈의 소지품을 뒤져 보았다. 경찰 뱃지가 나왔지만 다행히도 사진 속의 인물과 생김새가 달랐다. 놈이 경찰 차를 탈취한모양이었다. 놈은 데이빗의 전화를 받고 우리를 잡으러온 다른 마을에 사는 그의 신도인 모양이었다.광신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순찰차로 돌아갔다. 차를 몰고 마을을찾아 달렸다. 단조로운 도로를 달리다 보니 피로와 함께 졸음이 몰려 왔다. 간간이 들려 오는 준수의 신음소리가 이 모든 일들이 악몽이아님을 일깨워 줬다. 몇 시간이나 달렸을까? 희부염한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한참 달리다 보니 마을이 보였다. 빠삐용이 마지막으로 탈출하기 위해 뗏목에 올랐을 때의 기분이 이런 것이었을까. “살았어! 준수야, 우리는 살았다고!” 나는 클랙슨을 요란하게 울리며 마을을 향해 차의 속력을 높였다. 그런데 마을 입구에들어서는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을은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나는 마을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아니, 이럴 수가....... 우리는 필사적으로 도망쳐 온 지옥 같은 그마을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나는 다급히 방향을 돌렸다. 차는‘끼익!’하고 급정거하면서 회전했다. 액셀레이터를 밟는 순간, 차는 중심을잃고 옆가로수를 들이받았다. 나는 핸들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쳤다.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사람들이 몰려 오는 소리를 들으며 서서히 의식을 잃어 갔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마을과는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는데....... 제기랄! 이제 다 끝났어!누군가 차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아련하게들려 왔다. 사람들이 두런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시커먼 그림자가 눈앞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의식을 잃기 전의 상황이 머릿속에 하나, 둘떠올렸다. “이제 정신이 드시나요?” 어느 남자의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사내는 놀랍게도한국말로 물은 것이었다. 나는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생김새도 한국 사람이었다. “거의 40여 시간 혼수 상태였어요. 의사 말로는 심한 외상은 없다고 하더군요.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한 거죠?” 사내는 30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그의 등뒤로 의사와 간호원이 보였다. 나는 현재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기는 어디지? 지옥 같은 마을로 다시 돌아왔는데....... 내가 기억을 되새기고 있자 사내가 내 눈동자를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겁 먹지 마세요. 저는 뉴욕의 한국 영사관에서 연락을 받고 나온 영사관 직원입니다. 이마을 보안관으로 부터 연락을 받았지요. 한국학생 둘이 한 달 전에 도난당한 경찰차를 타고서 마을로 들어왔다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불쑥 준수가 걱정됐다.“준수는 괜찮나요?” “그 환자 이름이 준수인가요? 그래요. 피를많이 흘렸지만 워낙 건장한 체구라 생명에는아무런 지장이 없대요. 커다란 부상을 입었던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이 마을 이름이 뭐죠? 앤센빌 아닌가요?”“엔센빌? 아니에요!” 그의 단호한 음성을 듣는 순간,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녘에 너무 피로한 상태여서 내가 착각을 한 모양이었다. “상황을 설명해 주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에놓일 수도 있어요. 이 지역 보안관은 당신들의이 마을 방문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어요.도난당한 차량을 몰고 나타났으니 당연하겠지만...”영사관 직원의 재촉에 나는 한국말로 그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대략 설명해 주었다. 영사관 직원은 주의깊에 내 말을 들었으나 그대로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는 내 말을 보안관에게 해 줬다. 보안관은우리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앤센빌이라는마을은 이 근처에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도난당한 차량을 몰고 나타난 우리를 구속할 뜻을 비쳤다.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믿어 주고 싶어요. 하지만 보안관은 그렇지 않군요. 아무래도 철창 신세를 면하려면 당신의 말이 맞다는 걸 증명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영사관 직원이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좋아요! 그럼 당장, 우리 차가 펑크난 채로버려져 있는 곳으로 가 보죠.” 나는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원을 나섰다. 경찰 차 앞 좌석에는 영사관 직원과 보안관이 탔고, 나는 뒷좌석에 경찰 두 명 틈 사이에 타야만 했다. 나는 모든 사실을 증명해내지 못하는 한 용의자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사관 직원이 건네 준 햄버거로 허기를 채우며 온 길을 더듬어 갔다. 훤한 낮에 보니 도로는 평화롭기 그지 없었다. 한참 달리다 보니갈림길이 나왔는데 우리가 빠져 나왔던 길은전혀 길처럼 보이지 않았다. 포장은 되어 있었지만 나무에 가려 집입로가 제대로 보이지도않는 길이었다. 낮에도 찾기 힘든 길을 어떻게밤에 기어들어갔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보안관도 이런 곳에 길이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는지 연신 사방을 살폈다. 그 길로 접어들어 한참 올라가다 보니 경찰차를 탈취했던 자리가 나왔다. 가짜 경찰은 보이지 않았지만 도로에 피가 응고되어 있었다. 다시 이삼 킬로 정도 가다 보니 도로변에 우리의 펑크난 코로라가 보였다. 코로라는 이틀전과 그대로였다. 완전히 폐차 직전에 이른 차안에서 우리가 여행용 가방을 꺼내자 그제서야 보안관은 내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시트에 묻은 준수의 피를 유심히 살펴보던보안관은 무전기로 견인차를 불러서 차를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 보안관은 두 갈래 길에대해서 한참이나 설명했다. “자, 이제 그럼 앤센빌로 가 봅시다!” 보안관이 차에 오르면서 말했다. 나는 기겁을 해서 단호하게‘NO!’라고 외쳤다. 내 목소리가 너무 컸던지 다들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보안관은 지원 병력을 부를 테니까 같이 가보자고 설득했다. 영사관 직원도 그런 마을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증명해야지만 우리에 대한의심이 완전히 풀릴 거라며 가 보자고 했다.다시는 그쪽으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씌워진 혐의를 벗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한참 뒤에 경찰차 한 대가 도착해 다시금 지옥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만일 마을에 접근하게 되면 당신들은 내 곁은 떠나면 안 돼요? 알았죠?” 나는 달리는 차 안에서 옆에 앉은 두 명의경찰관에게 신신당부했다. 마을이 가까워져가자 데이빗과 다윗의 광기어린 눈빛이 떠올랐다. 횃불을 들고 합창을 하던 광신도들의 모습도 언뜻언뜻 차창을 스쳐 지나갔다. 한참 들어가자 저 멀리서 연기가 났다. 차가점점 다가서자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마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자차안의 사람들은 모두 긴장하기 시작했다. 보안관이 그냥 지나치는 것처럼 속력을 내서 마을의 동태를 살펴보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그러기로 합의하고 빠른 속도로 달렸다. 마을이 점점 다가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40여 채 가량 서 있던 앤센빌이라는마을은 모조리 타고 있었다. 보안관은 애초의 약속을 깨고 차의 속력을줄였다. 집들은 앙상한 뼈대만 남은 채 연기를피어 올리고 있었다. 차로 마을을 돌아보았지만 마을 사람들은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모조리 떠난 모양이었다. 공터에는 아직도 깨어진 헤드라이트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피와 죽음의 향연이 열리던 제단으로 가 보았다. 제단에는 두 개의 불 탄 십자가만 앙상한 뼈대를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십자가에매달렸던 흑인의 시체는 찾을 수 없었다. 잿더미를 헤집어 보았지만 뼈는 나오지 않았다. 데이빗의 집 지하실에도 가 봤으나 마찬가지였다. 숲 속 어딘가에다 모조리 묻고 떠난건지 개들의 시체 역시 변견할 수 없었다. 보안관과 영사관 직원은 마을의 잔해를 보고는 나의 말을 어느 정도 믿는 눈치였다. 하지만 마을에 살던 이들이 두 명의 흑인을 죽이고 준수의 손가락을 잘랐다는 마땅한 증거가없었다. 보안관은 조용히 사건을 처리하고 싶어하는눈치였다. 그는 차량 탈취 부분에 대해서는 무혐의로 처리해 주었고, 또한 고철이 되다시피한 렌트카에 대해서는 부득이한 피해였다고보증을 서 줘 보험으로 처리할 수 있게끔 도와줬다. 또한 병원비도 알아서 처리해 주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사건은 더 이상 파헤치려 하지 않았다. 숲 속을 뒤져 보면 개와 두 흑인의 시체가나올지도 모른다는 나의 제안도 숲이 너무 넓다는 이유만으로 거절했다. 영사관 직원은 지방검사 선거가 임박해 있어서, 시끄러운 스캔들을 피하고 싶은 모양이라고 귀엣말을 했다. 결국 유리의 사건은 유야무야 처리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우리에게, 특히 준수에게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겨 주었다. 의식을회복한 준수는 한동안 겁에 질린 정신병자처럼 아무 말도 못 했다. 하긴 기타리스트를 꿈꾸던 그의 손가락이 잘려 나갔으니 그 충격은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리라. 준수는 충격에서 서서히 빠져 나왔다. 그는고통스러운 기억에 몸부림 치다가 가끔씩 잘려 나간 손가락을 보며 오열하곤 했다. 수민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으나 수민이와의관계도 점차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수민은 극진하게 준수를 보살폈지만, 잘려나간 손가락때문에 자포자기하는 준수의 모습에 실망했는지 심한 말다툼을 한 끝에 다시 인디아나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는 준수의 치료 때문에 그 마을에 이 주가량 머물러야 했다. 이 주가 지나자 허벅지의상처는 어느 정도 아물었다. 약속대로 보안관이 와서 퇴원를 시켜 줘서준수와 함께 병원을 나설 수 있었다. 손에 붕대를 감은 준수와 함께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인디언 노인이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옷차림을 보니 토착 인디언이었다.“젊은이들이 앤센빌이란 마을에서 살아나왔다는 두 젊은이인가?” 보안관은 쉬쉬 했지만 이미 마을에는 우리에 대한 소문이 퍼질 대로 퍼져 있었다. 나는노인이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그러는 줄 알고내키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준수가자리를 옮기자고 잡아끌어 노인을 지나쳐 가는데 등 뒤에서 노인이 다시 물었다. “앤센빌, 앤센빌이 무슨 뜻인 줄 아나?”나는 순간, 걸음을 우뚝 멈췄다. “인디안 말로‘광신’이라는 뜻이라네. 그러니까 앤센빌은‘광신의 마을’을 뜻하는 거지.인디안 전설에도 그런 마을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지. 그 마을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의식의 제물로 희생당하곤 한다고... 참으로 무서운 일이지.” 인디안 노인은 말을 끊고서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노인장, 그건 어디까지나 전설이지 않소?”노인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백인 운전사가커피잔을 들고 와서 물었다. “모르는 소리....... 아주 오래 전부터 이 마을을 지나간 사람 중에서 실종자들이 종종 있었지. 가끔씩 실종자의 가족들이 마을로 들어와서 사람을 찾다가 돌아가곤 했다오. 그런데놀랍게도 그 중에 백인은 한 사람도 없었지.만약 백인 실종자도 있었더라면 보안관이 나몰라라 하지는 않았을 텐데.......” 기다리던 필라델피아행 버스가 왔다. 나는노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돌아서야만 했다. 등 뒤에서 노인이 또렷한 목소리로덧붙였다. “젊은이들 웬만하면 고향으로 돌아들 가게나. 그놈들은 자신들의 비밀을 아는 사람을 절대로 그대로 놓아 두는 법이 없다네. 아마도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갈 걸세. 이 땅은 너무위험해.......” 나는 준수 뒤를 따라서 버스에 올랐다. 인디안 노인은 차가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한 곳에붙박인 듯이 서서 버스 뒤꽁무니를 쳐다보았다.필라델피아로 돌아온 우리는 서둘러서 귀국준비를 했다. 인디안 노인의 경고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이 저주받은 땅에 남아 있고 싶지않아서였다. 귀국 준비를 하면서 준수는 거의 말을 하지않았다. 내가 무심코 음악을 틀면 준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을찾아 자리를 옮겼다. 그의 얼굴은 석고상처럼굳어 있어서 나는 준수가 자살이라도 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하곤 했다. 우리는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했지만 가족을만날 수 있다는 설레임도 미국을 떠나는 데서오는 아쉬움도 느낄 수 없었다. 우린 착잡한심정으로 창 밖만 바라보았다. 준수의 옆자리에는 교포 할머니가 앉았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할머니는 준수에게 교회를다니냐고 물었고 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늘어놓으면서 간간이 준수에게 교회에 다니라고 설득했다. 준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고일부러 자리를 뜨기도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죄인을 구제하라는 기독교인의 사명감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도에 지나치게 준수를 귀찮게군다 싶어 내가 나섰다. 준수는 다른종교가 있으니 그만하시라고 할머니를 만류했지만 그때 뿐이었다. 할머니는 성경 구절까지 인용해 가며,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고서 영생을 얻으려면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침을 튀겨 가며 설교했다. 한순간, 머리카락 속에 두 손을 파묻고있던 준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앞에 놓여 있는 맥주캔과 책들을 던지며 고함을질렀다. “종교에 모든 것을 팔어 버린 것들아! 봐라.네 놈들 때문에 내 한손이 날아갔단 말이다!나의 인생과 꿈들이...... 흐...... 흐흑!”비행기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승무원들이 달려와 흐느끼는 준수를 만류했다. 할머니는 너무도 놀랬는지 움직이지도 못한 채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스튜어디스가달려와서 할머니에게 진정제를 먹였다. 그리고는 준수와 격리시키기 위해서 앞쪽으로 데려갔다. 다른 승객들이 힐끔거리며 준수를 쳐다봤다. 나는 준수의 오른손을 꽉 잡았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준수를 욕한다 해도 난 준수를 이해할 수 있었다. 비행기가 서울에 다가갈수록 준수의 앞으로의 생활이 걱정되었다. 종교에 대해 지독한 혐오감과 증오심을 지니고 있는 준수가 서울에서 잘 지낼 수 있을지 은근히 불안했다. 공항 출입구를 나서니 가족들이 기다리고있었다. 준수 가족들은 애써 준수의 왼손을 외면했다. 준수 아버지는 태연한 척 준수를 위로했지만, 준수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잘린 손을붙잡고 주위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성통곡을 했다. 나는 준수네 가족을 뵐 면목도없어 마중나온 동생 손을 붙잡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그 뒤로 준수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가끔 연락을 시도해 보았지만 준수가 나를 피하는 눈치여서 이내 포기하곤 했다. 얼마 뒤에 거리에서 우연히 준수 어머니를만나 준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준수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었다. 집으로 전도하러 온 전도사와 집사를 테니스채로 폭행하는 바람에 교회에서 몰려오는 등 한바탕 난리가 났다고 했다. 다행히도 상처가 심하지 않은 데다 피해자 쪽에서 쉽게 합의를 해 줘서풀려 났으나, 그 뒤로도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질 않아 아예 입원을 시켰다는 것이었다. 나는 준수를 찾아가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나를 보게 되면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치료에 나쁜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서울에 와서 나는 한동안 악몽에 시달렸으나 생활이 바빠지자 그때 일도 차츰 잊혀져 갔다. 복학을 하고 정상적인 사람들과 웃고 떠들다 보니 앤센빌에서 있었던 일이 실제 일이 아니라 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그러던 어느 날, 나는 뉴스를 보고 있다가도저히 잊을 수 없는 이름과 다시 접해야만 했다.“......한국 시간으로 28일 새벽, 미국 텍사스주 웨이코의 집단 거주지에서 다윗파라는 사이비 종교 집단과 경찰간의 무력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데이빗 코레시가 교주로 있는 다윗파는 교주를 체포하러 온 경찰에 총격을 가해사상자를 낳았으며 현재 경찰과 대치 중에 있습니다. 코레쉬는 자신이 예수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다윗파는 제7일 안식교일 예수 재림교의 한 분파로 알려져 있습니다. 교주 코레쉬는 15명의 아내를 거느리고 마약 밀매와 아동 학대를 자행하는등 종교를 압세워 끔직한 만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져, 경찰이 검거에 나서자 신도들을 이끌고 대항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요새화된 집단 거주지에는 대략 80여 명의 신도들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들은 고레쉬의 명령에 따라 결사 항전태세를 갖춘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경찰이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할 경우 집단 자살 등을 택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대치 상태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경찰 고위 간부가 밝혔습니다.” ‘다윗’과‘코레쉬’라는 단어는 나에게 잊혀졌던 악몽을 다시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내가 갔던 지옥의 마을 앤센빌은 동부에 위치했고, 텍사스 웨이코는 서부에 있어 비슷한느낌은 들었지만, 내가 경험했던‘다윗교’와같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날부터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시간별 라디오 뉴스를 들었고, 텔레비전의 정규 뉴스는 물론이고 수시로 AFKN을 보았다. 결국 그 대치극은 코레시를 포함한 86명의신도가 불을 질러 집단 자살하는 끔찍한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사건이 어이없이 끝나자 매스컴은 미 정부의 무능과 리노 법무장관의 성급한 진입 지시를 비판했다. 결국 미 정부에 대한 비난으로 매스컴의 초점이 맞추어졌고, 그 바람에 다윗파라는 종교집단에 대해선 별다른 언급없이 넘어가고 말았다. 나는 그 사건을 앤센빌 마을과 별개의 문제로 정리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나는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다시 그 사건을 떠올려야 했다. 난데없이 미국 대사관에서 전화가 걸려 온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다. 미국 대사관에근무하는 한국인 이유직이라는 사람이 전화를걸어와 잠깐 만날 수 없느냐는 거였다. 미국에체류했던 대학생들에게 미국에 대한 인상과생각을 알아 보기 위한 설문 조사를 하기 위한거라고 했다. 나는 귀찮기도 한 데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인상도 좋게 남아 있지 않아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자 설문 조사에 응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미국 비자를 발급받거나 미국 관련 업무에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며 은근히 협박을 해왔다. 막상 협박을 당하고 나니 이상한 생각이들었다. 미국에 다녀 온 사람은 수만 명이 될텐데 하필 그런 설문 조사에 나를 지목했을까의아스러웠다. 나는 기분도 상하고 해서 완강히 거절한 뒤에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도찜찜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나는 곧 장난전화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그 일을 잊어버렸다. 다음날 학교에 가니 후배가 과사무실에 누가 나를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과사무실로 갔다. 그곳에는 두 명의 덩치큰 외국인과 동양인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일한아, 미국대사관에서 나온 분들이래. 급하게 너를 만나야 할 일이 있어, 여기까지 찾아왔대.” 조교 형이 들어가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며소개를 했다. “저하고 어제 통화했었죠? 정식으로 인사하죠. 저는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유직이라고 합니다. 저희는 일한 씨에게 한 가지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왜 이렇게 나에게 집착하는 건지 한편으로는 호기심도 일었지만 한편으로는 불쾌하기도했다. “설문 조사 건이라면 어제 분명히 거절했을텐데요.” “잠깐 조용한 곳으로 가서 이야기나 좀 하죠.”이유직 씨가 정중하게 말했다. 나는 두 미국인을 바라보다가 설마 나를 해꼬지하겠냐 싶어서 순순히 과사무실을 나섰다. 나는 그들을데리고 학교 건문 옆뜰로 갔다. 자리에 앉자 두 미국인이 사방을 살폈다. 그리곤 가방을 열어 녹음기와 여러 개의 파일을꺼내 놓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죠?” 나는 이유직 씨에게 한국말로 물었다. 미국인들도 간단한 한국말은 하는지 한 사내가 사진을 한 장 건네 주며 아는 사람이냐고 영어로물었다. 사진 속의 사내는 30대 중반의 서양인이었다. 인상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기이하게 빛나는 눈빛을 지닌 사진 속의 사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시선을 교환하더니 다시 나에게 두장의 사진을 건네 주었다. 나는 그 사진을 보는 순간, 큰 충격을 받았다. 중반에 지저분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 눈만은 기이하게 빛났다. 나는 모른다고 하면서,누구냐고 반문했다. 그들은 시선을 교환하더니 아무말 없이 다시나에게 두장의 사진을 건네 주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큰 충격을 받았다. 사진 속의 인물은 앤센빌에서 만났던 다윗과 데이빗이었다. 다윗의 눈을 보자 그때의 악몽이 떠올랐다. 내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이유직이 말문을 열었다. “역시 알고 계시는군요. 처음 본 사진의 주인공은 데이빗 코레쉬입니다. 본명은 버논 하웰. 얼마 전 텍사스에서 집단 자살한 다윗파의교주입니다. 나이는 33세. 학력은 중졸. 자동차 정비사, 막노동꾼, 가수 등을 전전하다 80년대 중반 다윗교에 입교하여 87년에 총격전을 통해 교주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 후 종교 조직을 이용해 마약 밀매, 살인,아동 학대 등을 일삼다가 얼마 전 뉴스에서 나온 것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가족은84년에 14세였던 레이첼 존스와 결혼한 것을비롯해서 15명의 부인과 7명의 자식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보고 계신 사진 중 오른쪽 사내는 데이빗 윌링. 본명은 조너단 케인입니다. 나이는41세. 다윗교의 2인자로 코레쉬의 오른팔입니다. 프린스턴에서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을정도로 뛰어난 수재입니다. 88년부터 다윗교의 일을 맏게 되었는데 능력을 금세 인정받아제2인자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코레쉬에게 종교적 이론을 세워 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죠.왼쪽 아이는 빅터 코레쉬. 데이빗 코레쉬의큰아들로 11세입니다. 다윗교 내에서는 이 아이를 구세주로 신봉하고 있습니다. 교단 내에서는 다윗이라고 불리고 있죠. 데이빗 윌링이 이아이의 교육을 전담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도대체 알고 싶으신 게 뭐죠? 저는 이 두미치광이에게 잡혀 처참하게 죽을 뻔했어요.그것 때문에 저를 찾아왔나요?” 나는 한시라도 자리를 빨리 뜨고 싶어서 이유직 씨에게 물었다. 흥분한 때문인지 내가 듣기에도 커다란 음성이었다. “그렇습니다. 코레쉬는 지난번 텍사스 사건때 불에 타 죽었습니다. 경찰이 치열까지 검사해서 그의 죽음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86구의 시체 중에 빅터 코레쉬와 데이빗 윌링의 시체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경찰과 대치하고 있을 때는 그들의 존재를확인했었죠. 결국 그들은 살아서 그곳을 탈출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죠. 그런데 문제는바로 이 두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FBI의 조사에 따르면 미 전역에 퍼져 있는 다윗교의 신자가 2만에서 3만 명 정도라는 겁니다.이번 사건으로 다윗교도들은 미국 정부와현 체제에 대해 광기에 가까운 증오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코레쉬는 죽었지만 정작 구세주로 양육되어 온 이 아이와 2인자인 데이빗 윌링이 건재한 이상 언제 어떤 식으로 참혹한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 다윗교의 교리에는 무시무시한 목적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유색 인종을 말살시키겠다는 것이 그중 하나입니다. 이들은 백인들만이 신을 닮은 진정한 인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유색 인종을 말살시키게 되면 천국의 완성을 앞당길 수 있다는 거죠. 그들은 이러한 내용을 교리에 명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도들은 코레쉬와 부인들 사이에서태어난 아이들이‘다윗 가족’을 구성, 코레쉬와 함께 비신도들을 모두 죽인 뒤에 이 세상을지배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다윗교는 이처럼 배타적이며 폭력 지향적인 사이비 종교의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일한 씨를 찾아온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일한 씨는지난번 미국 방문시 다윗교 신자들에게 수난을 당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친구와 함께....... 그 친구 이름이 박준수인가요?그 분도 수소문해 보았지만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것 같아서 일한 씨에게 전적으로 매달리게 된 겁니다. 미 정부에서는 집단 자살이발생한 후, 비밀리에 다윗교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앤센빌이라는 마을과 거기서생존해 나온 두 명의 한국인 학생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조사를 해 보니 당시 경찰서장이 사건을 축소 보고한 사실이 드러나 앤센빌이라는 마을에 대해서 재수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나는 이윤직의 말을 듣고 잠시 동안 멍하니앉아 있었다. 우리가 앤센빌이라는 마을에서탈출했을 때, 정밀한 수사를 했더라면 어쩌면텍사스에서 발생한 집단 자살은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지금이라도 수사에 착수했다니 천만 다행이었다. 그들은 앤센빌의 마을에 들어섰을 때부터 탈출하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들려달라고 했다. 기때의 기억을 되살린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그들로 인한 또다른 희생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끔찍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들은 가끔씩 질문을 던지기도 하면서 주의깊게 들었다. 질문을 받다 보니 미국인 두사람 중 한 사람은 종교 전문가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는 의식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표명했다. 다른 한 사람은 눈초리나 절제된 몸짓으로 봐서 FBI 같은 곳에 근무하는 수사관같았다. 두 시간이 넘게 걸린 내 이야기가 끝나자 이유직 씨가 준비해 온 설문지를 보며 질문을 던졌다. 마을 사람들의 생활 형태, 남녀 비율, 아이들의 수, 공동 예배, 식사 방식 등등에 대해서 물었으나 절반 가량은 나로서도 대답할 수없는 질문들이었다. 종교 전문가는 나에게 별도로 합창곡과 흑인을 죽일 때의 의식, 데이빗의 집에서 본 다윗의 그림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가방에서 낡은 책을 꺼내더니 나에게 그림을 하나 보여 주었다. 색깔도 다르고 크기도 다른 그림이었지만,흑인으로 묘사된 골리앗의 심장을 꺼내들고서 있는 백인 아이 다윗의 모습은 내가 본 그림과 정확히 일치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그는 그림의 유래에 대해서 들려 주었다. “이 고서(古書)는 구약성서에 외전에 해당한다고 할까요? 약 600여 년 전 정통 성서와는달리 유대교의 한 종파가 자기들 나름대로 새로운 성서를 기록했는데 거기에 나오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 종교는 신과 악마와의 투쟁을 혼란스럽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선하고 어느 쪽이 악한지 쉽게 구분이 안 가는거죠. 다윗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골리앗을 해치운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그리기 보다는, 정권욕으로 인해 골리앗을 잔인하게 죽인 다음에이스라엘을 폭압적으로 지배한 독재자로 묘사했습니다. 이 종파는 또한 비신도는 전부 말살해야 한다는 교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일부 종교 학자들은 이 종파를 악마숭배교의 일종으로 보고있습니다. 하여튼 이 그림이 데이빗의 집에 걸려 있었다면, 이 종파와 다윗교는 뭔가 연관이있겠죠.” ‘악마숭배교’라는 말을 듣고 나니 생각나는것이 있어 종교 전문가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 웨이코에서 진압시에 불이 났을 때연기에 악마의 얼굴이 보였다는 얘기가 있던데...”“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있다면3류 사진작가가 조작한 사진에 의해서나 가능하겠다죠. 하지만 사실 알려지지는 않았지만좀 끔찍한 일이 있었습니다. 불을 다 끈 후 거기에 들어간 소방대원의 증언에 의하면 그곳은 상상할 수도 없는 지옥이었답니다. 86구의 탄 시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코레쉬를 가운데 두고 둥굴게 원을이룬 채 가지런히 앉아 있었대요. 자세히 보니앞사람을 등 뒤에서 꼭 껴안고 타 죽었더라는거예요. 고통에 못 이겨 뛰쳐 나가고 싶어도뒷사람에게 잡혀 어쩔 수 없이 타 죽을 수밖에없게끔요. 정말 미친놈들이죠!” 종교 전문가는 몇 개의 질문을 더 던지고 나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수사관인 듯한 사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절대 발설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이유직 씨는 준수가 당한 내상과 외상에 대해서 위로의 말을 하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이제 이념 문제가 사라진 지구상에 종교가가장 큰 갈등의 불씨로 남아 있습니다. 미국만하더라도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종교 냉소주의가 만연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빈 자리를 사이비 종교가 자리잡아 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종교가있는 한 사이비 종교도 분명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각한 일이지요. 분명히 그 빅터라는 아이와 윌링이라는 놈이 앤센빌 같은 마을에서 죽음의 의식을 되풀이하면서, 뭔가 커다란 살륙을 꿈꾸고 있을 겁니다. 그들의 교리를 실천하기 위해서....... 그 놈들이 커다란 사건을 저지르기 전에 잡아들인다는 게 미국 정부의 방침이지만 제가 볼 때는 솔직히 가망 없어 보입니다. 하여튼 협조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무슨 일이 생기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그 뒤로 수사가 어떻게 진척되고 있는지 무척 궁금했지만 더 이상 연락이 없었다. 외신에보도가 되지 않고 있는 걸로 봐서는 아직 잡히지 않았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다시 그 일을 잊을 만하니까 이번에는 오클라호마 연방빌딩 폭탄 테러 사건이 터졌고 콜로라도 기차 탈선 사건 등의 대규모 데러 사건등이 터졌다. 미 정부는 극우 단체들의 소행이었다고 공식 발표했지만 다윗파의 소행 같다는 의심을지워 버릴 수 없었다. 그것이 단순한 나의 망상이 아니라는 것을 타임지에 실린 폭탄 테러용의자의 사진을 보고 이내 곧 확인할 수 있었다.용의자의 왼쪽 팔에는 문신이 있었는데, 그글자는 다름 아닌‘DAVID’였다. 바로, 다윗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보고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었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지만그 미친 다윗교도들이 교주의 죽음에 대한 피의 복수를 시작했다고....... 나는 타임지를 덮으며 어딘가에서 차갑게웃고 있을 빅터라는 금발의 소년과 윌링을 떠올렸다. 옆자리의 청년들은 술이 몇 순배 돌자 목소리가 좀더 높아졌다.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준수가 불쑥 물었다. “일한아, 종교가 뭘까?” 준수의 눈동자는 물기에 젖어 있었다. “글쎄......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스스로의지하고 위로받기 위해 만든 체계적인 논리가 종교가 아닐까?” “네 말대로라면 결국 인간은 자신들이 만든논리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셈이군.” “그렇지. 인간의 내면 속에는 지배당하고 싶은 심리가 깔려 있으니까.” “정말 신이 있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면신은 지금 어떤 심정일까? 자신들 편한 대로논리를 세워 놓고 신의 뜻이라고 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본다면.......”준수는 자조 섞인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는 검은 장갑을 낀 의수로 테이블을 툭툭 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의 잘린 손은 신의 뜻이었을까, 아니면신의 뜻을 빙자한 인간의 만행이었을까? 가끔궁금해질 때가 있어.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신이 나를 벌한 거라면, 창조할 때부터 내가 죄를 못 짓게 만들었어야 하는 것 아니겠어? 죄를 짓도록 창조해 놓고 이제 와서 벌을 내린다는 건 말도 안 돼! 흐흑!” 술 기운 때문에 감정이 격앙되었는지 준수가 고개를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갑자기 옆자리가 조용해졌다. 돌아보니 한 청년들이 곱지 않은 눈길을 우리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중에서 덩치 큰 사내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나더니 우리 쪽으로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당신들 뭐야? 아까부터 듣자듣자 하니까말을 너무 심하게 하는구만.” 사내는 상당히 취해 있었다. 그는 우리의 대화 때문이 아니라 취기 때문에 나선 것 같았다. “기분이상했다면죄송합니다. 이해하십시오.”나는 엎드려 흐느끼고 있는 준수를 일으켜세웠다. 술값을 계산하기 위해서 지갑을 꺼내는데 이죽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술자리마다 꼭 저런 저런 놈들이 있단 말야. 자신의 어설픈 지식을 뽐내기 위해서 꼭종교를 도마에 올려놓고 씹으려 들지. 자기가무슨 니체라도 되는 걸로 착각하고 있는 건지...”준수가 그 소리에 불끈해서 돌아섰다. 나는준수의 어깨를 잡아 만류했다. 준수가 숨을 고르더니 돌아섰다. 우리는 가게 앞에서 악수를나눴다. 준수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돌아서서 걷는데 준수가 불렀다. “일한아, 나를 구해 줘서 정말 고마워! 살아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거라는 걸 알았어.이건 진심이야! 오늘 너에게 이 말을 해 주고싶었어.” 준수가 미소를 띄운 채 검은 장갑을 낀 손을흔들었다. 나는 준수를 마주 보고 서서 손을흔들었다. 검은 장갑을 낀 키보드 주자로서 당당히 살아가기를 빌며....... 화려한 도시의 불빛 속으로 준수의 모습은이내 묻혀 버렸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 역쪽으로 가다 보니‘재림교’라고 쓰인 이상한플랜카드가 보였다. “예수님이 재림했습니다. 재림교를 믿으세요! 세상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재림교를 믿어야 영생할 수 있습니다!” 웬 때늦은 휴거인가 해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앞을 스쳐지나갔다. 젊은 여자가 찌라시를 나누어 주었다. 나는 건성으로 찌라시를 훑어 보았다. 조작한 사진 옆에 세상의 종말이다가오고 있는 여러 가지 징후가 나열되어 있었다. 쓰레기통을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주머니에 넣고서 지하도로 내려갔다. 플랫폼에서 전동차를 기다리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좀전의 찌라시를 살펴 보았다. ‘재림한 예수님의 실제 모습’이라는 커다란글씨 아래 한 장의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순간, 머리가 멍해지면서 전신에 전율이 왔다.사진 안에는 빅터, 아니 다윗이라는 소년이기분나쁜 미소를 띄운 채 나를 차가운 눈길로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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