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서울로 시집간 언니의 편지를 기다려 본다
게시물ID : smartphone_2096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꼴쥐투윈수
추천 : 0
조회수 : 30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7/02 15:10:17


언니가 시집가는 날은 온 천지에 진달래가 흐드러졌다.

이장님 댁 둘째 오빠와 언니는 어릴적 부터 친하게 지냈었다.
오빠는 나를 보면 숨겨놓은 사탕을 하나씩 주곤 했었다. 막내를 업고 엄마가 밭에서 돌아올때까지, 언니가 학교에서 돌아올때까지 동구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항상 그 오빠는 나에게 사탕이나 강냉이 같은 주전부리를 주고 가곤 했다. 

주머니에서 내 주먹만한 사탕을 꺼내어 주고, 내 등에 업힌 막내 동생과 눈을 맞추고, 그리고 사람 좋은 미소를 씩 지으며 내 머리를 헝크러트리곤 했다. 

똑똑하고 공부를 잘하기로 소문이 많던 오빠는 읍내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을 갔다. 오빠가 서울로 유학을 떠나기 전날 밤, 오빠는 몰래 언니를 불러달라 그랬고, 나는 언니 손을 잡고 화장실에 가기 무섭다고 거짓말을 했고, 그리고 마을 어르신들이 모이시는 정자로 갔다. 오빠는 나에게 또 사탕을 하나 쥐어 주고, 언니와 잠깐 할 이야기가 있다며 기다려 달라 했고, 두 사람은 달빛 아래서 한참을 이야기했다.

사탕이 입 속에서 다 녹아 없어져버린 나는 심심함을 참지 못하고 두 사람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달빛에 비친 두 사람의 얼굴이 너무 슬퍼서, 다가갈 수 없었다. 

오빠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나라에서 제일 좋은 대학교에 들어갔다고 했다. 방학때 마다 농사를 돕기 위해 내려오는 오빠는 계절이 바뀌는 만큼 멋있어져 갔다. 

읍내에서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언니는 농협에 취직해서 일을 시작했다. 가끔 엄마를 대신해 나를 혼낼때는 귀신같이 무서운 언니였지만, 처음 감색 치마를 입고 읍내로 출근하는 언니를 보는 순간, 언니가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장님과 아버지가 조금 더 친해진 듯 했고, 엄마와 아줌마의 수다가 많아졌다는 것을 느꼈을때, 이미 오빠와 언니의 결혼은 약속되어졌는지도 모른다. 

어느 늦 가을의 일요일, 서울에서 큰 회사에 들어갔다는 오빠는 넥타이를 매고 선물을 들고 우리집으로 찾아왔고, 아버지는 잔치집에 갈때 입는 깔끔한 두루마기를 꺼내입었다. 엄마는 잔치날도 아닌데 닭을 잡았고, 그리고 언니는 출근하는 날도 아닌데 분을 바르고 엄마를 도왔다. 술 심부름을 하면서 나는 닭다리 한쪽을 얻어먹었고, 나보다 철없는 막내 동생은 오빠의 닭똥집을 결국 빼앗아 먹었다. 

언니가 시집가는 날은 온 천지에 진달래가 흐드러졌다.

몇달 되지 않아 우리 집에서는 잔치가 열렸다. 근처 이장님들이 오셨고, 농협의 조합장님도 우리집 마당에 상석에 자리를 잡으셨다. 마을 아줌마들은 며칠 전부터 전을 만들었고, 나와 막내동생은 명절도 아닌데 잔치음식들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순수하게 기뻐했다. 

결혼 전날 밤에 나는 언니와 엄마와 한 방에서 잤다. 잠에 취한 나는 금방 골아떨어졌지만, 잠결에도 엄마와 언니의 눈물을 느낄 수 있었다. 엄마는 그날 '잘살아야 한다'는 말을 백번도 넘게 했다. 그리고 나에게 사탕을 주던 사람 좋은 오빠는 형부가 되었다.

언니가 시집가는 날은 온 천지에 진달래가 흐드러졌다.

건너방에서 첫날밤을 보낸 두 사람은 이장님 댁에서 또 하루를 보내고, 서울로 떠났다.
하루에 두대 밖에 없는 읍내가는 버스를 타고, 흐드러진 진달래를 배경으로 언니는 그렇게 우리집을 떠났다. 

마을 사람들은 시집 잘갔다고 했다. 똑똑한 사위를 두었다고, 착한 사위를 두었다고 야단을 떨었다. 이장님도 참한 며느리를 얻었다고, 마을의 자랑인 처녀 총각이 시집을 만났다고 수다를 떨었다. 그러나 엄마는 버스가 보이지 않을때까지 마을 입구에 서 있었고, 아버지는 방에서 혼자서 술을 드셨다. 

그 이후 언니는 아직까지 우리 집에 오지 못했다

언니가 서울에 가고 반년도 안된 어느날, 오빠가.. 아니 형부가 갑작스럽게 미국에 발령을 받았고, 언니와 함께 미국으로 갔다는 사실을 엄마에게 들었다. 추석에 내려오면 밀린 이야기도 하고, 예전 처럼 손 꼭 잡고 자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이만저만 실망이 컸다. 미국이 얼마나 먼지 감이 잡히지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기다리는 나를, 엄마를 실망시킨 누나에게 섭섭하고 형부가 원망스러웠다.

가끔씩 테두리가 알록달록한 봉투로 편지가 오곤 했었지만, 이번 여름에는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다음 겨울에는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앏은 편지 몇 장으로는 언니에 대한 그리움이 해갈되지 않았다. 엄마는 첫 손자의 얼굴을 사진을 통해서 봤다. 미국에서 태어난 내 첫 조카는 언니와 형부를 꼭 닮은, 영어이름을 가진 남자아이였다. 

언니가 시집가는 날은 온 천지에 진달래가 흐드러졌다.

어느날 우체부 아저씨가 전해준 편지에 조만간 한국으로 들어온다는 내용이 적혀져 있었다. 형부가 한국 본사로 들어오면서 사진으로 밖에 얼굴을 못 본 조카를 대리고 귀국한다는 것. 그리고 선물을 한아름 샀다는 것. 한 가득 선물을 들고 내려 오겠다는 내요의 편지가 온 것이다.

우체부 아저씨는 '이제 다음 편지봉투는 하얀색이겠네요 허허' 하면서 웃었고, 아버지는 사위 오면 주겠다고 뒷마당에 담궜던 술을 유리병에 옮겨 담았다. 

내가 엄마에에 '언니 언제오나?' 하고 묻자, 엄마는 '다음 편지에 언니 오는 날이 써있을꺼다'라고 말해줬다. 테투리에 알록달록한 무늬가 없는 편지지, 영어로 air mail이라는 표시가 없는 편지가 오면 언니가 온다고 했다. 

그 날부터 나는 다시 기다림을 시작했다. 몇 년 전 막내를 업고, 언니가 돌아오길, 엄마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마음으로 우체부 아저씨를 기다렸다. 우체부 아저씨의 자전거가 신작로에서 멀리 보이면 한걸음에 달려가 '우리 언니 편지 있어요?' 하고 물으면, 우체부 아저씨는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 '오늘은 없네' 하고 웃음을 보였다. 그럼 나는 터벅 걸음으로 집으로 걸어가는 하루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그런 날이 계속 될 수록 편지가 올 것이라는 믿음은 더욱 강해졌다. 오늘, 아니 내일, 아니 이번주, 아니 아무리 늦어도 다음 주에는 편지가 올 것이다. 아무 테두리 없는 하얀 봉투에.. 언니가 오는 날이 적혀 있는 그 편지가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마을 입구로 나간다. 언니의 편지를 기다려본다................하는 마음으로 내 백아연을 가지고 오실 우체부 택배 아저씨를 기다려본다.

전화 끊긴지가 언젠데 왜 아직도 안오고 있냔 말입니다!! 5.3 백아연!!

아저씨 빨리 오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ㅠㅠ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