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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옥 대법관후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수사축소,은폐 검사로 밝혀져
게시물ID : sisa_57356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베오베오베오베
추천 : 18
조회수 : 994회
댓글수 : 26개
등록시간 : 2015/02/03 09:13:4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2030600055&code=940301

역시 이정도는 되야 대법관 감이죠....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59·사진)가 1987년 검사 재직 당시 검찰의 축소·은폐 의혹이 제기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수사를 맡았던 것으로 2일 확인됐다.



당시 서울지검은 1987년 2월 1차 수사에서 고문 경찰관 2명으로부터 “고문치사의 범인이 3명 더 있다”는 진술을 받고도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으며, 이 같은 사실은 5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폭로됐다. 검찰은 이후 재수사에서 고문 경찰관 3명을 추가 구속했다. 

박 후보자는 1, 2차 모두 수사팀에서 일했다. 당시 수사팀은 2차 수사에서도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을 “범인 축소 조작에 가담한 혐의가 전혀 없다”고 무혐의 처리했으나, 민주화항쟁 이후인 1988년 1월 검찰은 강 전 치안본부장을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는 2009년 보고서에서 “검찰은 사건 진상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제대로 수사하지 못하다가 정의구현사제단이 정부의 은폐 사실을 폭로한 이후에야 최소한의 관계자만 기소해 결과적으로 정부 관계기관대책회의의 부당한 개입을 방조하고 은폐했다”고 밝혔다. 

박 후보자가 국회에 제출한 임명동의안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담당검사였다는 내용이 빠져 있어 고의 누락 의혹이 일고 있다. 

권력의 외압에 굴복해 수사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던 박 후보자가 대법관 후보로 지명된 것을 두고 ‘부적절한 인사’란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정의당 서기호 의원은 “외압에 굴복해 헌법과 법률에 부여된 수사권을 포기했던 박 후보자가 대법관 후보로 지명된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박 후보자 측은 “당시 수사팀 일원으로 최선을 다해 수사했고, 수사 과정에서 외압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박종철이란 누구인가?

박종철(朴鍾哲, 1964년 4월 1일 ~ 1987년 1월 14일부산광역시 출생)은 대한민국의 민주운동가이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이던 그는 제5공화국 말기에 공안당국에 붙잡혀 폭행과 전기고문물고문 등을 받다가 죽임을 당했다.[1] 당시 이 사실을 은폐하려던 군사독재정권의 불의는 당연히 민중들의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항의인 6월 항쟁의 계기가 되어, 시민들의 대대적인 저항에 부딪혔고, 결국6·29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민주화 요구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2]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추위’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였다. 취조실에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여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11시 45분 경 중앙대 용산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의사가 검진했을 당시 이미 숨져 있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6월항쟁의 불씨가 됐다. 1987년 중앙일보의 기자 신성호는 한 검찰 간부가 “경찰, 큰일 났어”라고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서 단서를 잡고 1월 14일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2단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자 다음날 당시 치안 본부장 강민창은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공식발표 했다. “탁 치니 억”은 한동안 군사정권의 궤변과 비도덕성을 조롱하는 유행어로 널리 사용되었다.

이어 동아일보는 당시 부검의 의사 오연상의 진술을 확보했다. 1월 14일 경찰의 요청으로 대공분실 509호를 제일 먼저 목격했던 중앙대병원 내과전문의 오연상은 1월 16일 사건현장에 물이 흥건한 것을 목격했고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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