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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통일대박론의 허구성에 대하여 6
게시물ID : sisa_57393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자유게시파
추천 : 1/11
조회수 : 372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5/02/04 23:13:55
작성자: 구름~~
작성일: 2014-04-25 (금) 19:08
홈페이지: http://cloudstown.net

통일대박론의 허구성에 대하여 6 

해방이 되자, 국내에 있던 많은 정치인들이 자신의 지지세력을 동원하여 각종 단체를 만들었는데, 여운형의 건준(건국준비위원회)이 가장 규모가 컸다. 그러나 실제 해방 당시 가장 대규모의 조직을 거느린 사람은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이었다. 전국 시군구 및 읍면, 리동 단위까지 조직을 갖출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자는 박헌영이 유일했다. 수십만 명의 좌익이 전국 단위로 인민위원회를 결성했는데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에서의 공산당 활동은 김일성에게 주도권을 뺏기고 박헌영은 남로당의 지도자로 국한된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천부인권의 하나로 생각했던 것이 미국이었던 만큼 초기에 미군정은 공산당의 활동을 허용했고 좌익은 합법이었다. 그러나 좌익이 주도하는 파업과 폭동이 되풀이 되고, 친탁운동과 남한 단독선거 반대 등으로 군정에 배치되는 행보를 계속하자 군정은 공산당 활동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좌익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물론 그것의 물리적 수단은 경찰력과 군대였다. 아다시피 당시의 경찰은 대부분 일제시대의 순사들이었고 대표적인 친일세력이었다. 좌익들은 대부분 크던 작든 일제시대의 항일투쟁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해방된 나라에서 친일파들이 항일투쟁가들을 잡으러 쫓아다니는 형국이 벌어졌다. 좌익들은 졸지에 수배자가 되어 도망다녀야 했고, 체포되면 빨갱이로 몰려 사형 아니면 장기간의 수형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좌익척결은 친일파들에게는 기사회생의 무대가 되어주었다. 반공이 살길이었다. 

해방은 한민족의 대박이 되어야 했다. 그 대박은 일제시대 때 일제에 항거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의 것이어야 했다. 그리고 그럴 것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믿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 해방의 대박은 친일파들의 것이었다. 토지개혁과 적산(敵産: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재산)의 불하는 지주와 자본가 계급의 노다지가 되었다. 토지개혁과 미곡의 매점매수, 그리고 적산의 불하로 친일세력은 해방정국 속에서 떼돈을 벌었다. 해방이 대박이긴 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에게 대박이었는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통일도 대박일 것에 틀림없다. 그러나 단언컨대 모두의 대박은 아닐 것이다. 통일대박의 주인공이 누가 될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통일에는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통일의 대박이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남의 집 잔치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수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무엇으로 표출될지 나는 그것이 두렵다. 박근혜 대통령이 과연 통일 후에 기다리고 있는 일들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서 ‘통일은 대박’이라고 말했는지 나는 궁금하다. 만약 모르고 한 소리라면 박대통령은 지극히 경솔하고 무책임한 사람이며, 알고서 했다면 놀라운 용기의 소유자다. 

경찰의 수배를 받고 쫓기게 된 좌익은 이 좁고 섬이나 다름없는 한반도의 남반부에서 도망갈 곳이 없었다. 다시 지리산으로 기어든다는 것은 끔찍하고 궁상맞은 짓이었다. 결국은 도로 지리산이 되고 말지만 그때 좌익들에게 경찰의 수사권이 미치지 않는 성역의 문이 열렸다. 그것이 바로 군대였다. 남한단독정부의 수립이 기정사실화되자 국군의 창설이 시작되었고 국군의 전신이 되는 국방경비대가 모병을 시작했다. 징병제가 아직 실시되지 않아서 초기의 국군은 지원병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당시의 군대라는 것은 급식에서 시작하여 모든 보급과 처우가 바닥이었고 사병으로서 군에 복무한다는 것은 대단히 고생스러운 길이었다. 모병이 쉽게 될 턱이 없었다. 그래서 군은 과거의 전력이 어떠하든, 사상이 어떻든, 빨갱이던, 노랭이던, 광복군 출신이던, 일본군 출신이던, 범죄자이던을 가리지 않고 지원만 하면 무조건 받아주었다. 일단 군인이 되고 나면 경찰의 수사권이 미치지 않았다. 민간인이 아니기 때문에 경찰은 체포를 할 수도, 구속을 할 수도, 조사를 할 수도 없었다. 수배를 받고 도망다니던 좌익이 군에 입대만 해버리면 경찰은 닭 쫓던 개가 되어 버렸다.

장교들의 출신이력은 다양했다. 중국의 국민당군 출신, 팔로군 출신,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만주군 장교 출신, 일본육사를 나온 일본군 장교 출신이 뒤섞여 있었는데 그중 가장 많은 수가 만주군과 일본군 출신들이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국군의 상층부는 친일파가 다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사관들과 사병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경찰에 쫓겨서 타의로 입대한 좌익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는 하사관들과 사병의 70% 이상이 좌익이었다. 제주도의 국방경비대도 상황은 별 다르지 않았다. 이들 좌익군대가 역시 좌익성향인 민간인들과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 효시가 제주의 43사건이다. 여순반란은 제주43의 속편이다. 제주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로 출동하게 된 제14연대는 배에 오르기 전에 반란을 일으켰다. 제주도 인민을 진압하기 위한 출동을 거부한다는 것이 반란의 명분이었다. 제14연대의 하사관들이 주축이 된 반란군들은 소, 중대장들을 비롯하여 대대장 연대장까지 대부분의 장교들을 사살하고 여수 시내로 진격했다. 순식간에 광양, 구례, 순천이 반란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여수, 순천 일대는 남한 내의 해방구가 되었다. 제주도에 이어 두 번째 해방구가 생겨난 것이었다. 제주도와 여수, 순천의 해방구 안에서 벌어진 일이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목격하게 되는 계급투쟁, 계급청소의 광란극이었다. 해방구내의 모든 경찰과 경찰가족들이 끌려나와 처형되었다. 지주들과 기업인들이 그 다음 차례였다. 판검사나, 의사, 교사 등의 지식계급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여수, 순천의 시내에 맞아죽고 찔려죽은 시체들이 널렸다. 어제까지 지주어른 지주어른 하며 굽실거렸던 소작인들이 지주와 그 가족들을 개잡듯이 때려죽였다. 그 장면을 눈앞에서 보게 된 사람들의 느낌은 이것들이 과연 한민족이 맞는가 하는 것이었다.
교회와 성당을 불태우고 신부들을 목매달고, 수녀들을 닥치는 대로 강간하는 인민전선의 해방군들을 보면서 스페인사람들이 느꼈던 것을 그때 한국인들은 느꼈다. 그리고 묻게 됐다. “너희들이 과연 같은 민족이며, 동포이고, 겨레인가?”
“이게 같은 나라 사람끼리 할 수 있는 짓인가?”

미군정 당국은 군의 반란에 대해서 단호한 응징에 나섰다. 동원가능한 전 병력이 호남으로 집결했고, 여수와 순천을 포위했다. 반란군은 병력과 장비에서 열세였다. 무엇보다 화력이 상대가 되지 않았다. 진압군은 멀리서 포위하고 박격포를 쏴댔다. 해방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반란군들은 시내에서 쫓겨나 여수 인근의 산과 들로 흩어져 달아났다. 잔당들에 대한 추격이 시작됐고, 시내에서는 복수극이 벌어졌다. 도망갔다가 돌아온 경찰들이 반란군에 부역하고 동조한 시민들을 색출하여 무자비하게 처단했다. 경찰서와 파출소 마당에 이번에도 시체들이 쌓였다. 가장 사납게 설친 것은 경찰과 군이 아니라 서청(서북청년단)단원들이었다. 제주도에서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것도 서청이었다. 이들은 북한에서 탈출하기 전에 인민재판을 받은 자기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삼촌들이 죽창에 찔려죽는 것을 보고 온 사람들이었다. 제주도와 여순의 해방구에서 벌어진 계급청소는 그 이전에 이미 북한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진 일이었다. 서청단원들은 그 계급청소의 목격자들이며, 피해자들이었다. 이미 한반도에는 더럽고 추악한 계급투쟁의 도화선에 불이 붙은 상태였다. 이것이 육이오동란이라는 대폭발을 일으키게 된다.

계급청소는 보복과 보복의 악순환을 거듭하면서 갈수록 잔인해지고 참혹해지게 된다는 점에서 가장 추악한 형태의 전쟁이다. 외적의 침입이나 외국의 지배 하에서도 사람은 살 수 있다. 설사 나라가 외적에 정복을 당한다 해도 정복자들이 피정복민 전부를 죽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외적의 지배 하에서도 연명은 할 수 있다. 복종하기만 하면 사는 것을 허락받을 기대는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급의 원수들은 그렇지 않다. 같은 민족이고, 같은 나라의 국민이고, 같은 동포인데도 상대를 살려주지 않는다. 지면 죽어야 한다. 살기 위해서는 이겨야 하고 자기가 상대를 죽일 수밖에 없다. 이게 계급전쟁의 본질이다. 때문에 계급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계급간의 적대감을 고취시키고 계급간의 투쟁을 선동하는 자들은 가장 악독한 비극의 씨앗을 뿌리는 자들이다. 이들이 바로 공산주의자들이며 좌익이다.

43폭동을 일으킨 제주도의 좌익이나, 반란을 일으킨 여순의 좌익들은 뒷감당을 할 능력이 없었다. 진압군에 맞서 싸우는 것은 결과가 뻔했다. 이게 다른 전쟁이라면 항복하면 된다. 전쟁을 하다가 항복하면 포로가 되고, 포로는 국제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다. 포로가 된다는 것이 죽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제주43과 여순반란은 전쟁이 아닌 계급투쟁이었다. 그래서 항복을 한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했다. 손들고 투항한다고 살려주는 그런 전쟁이 아니었다. 항복한 사람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하지 않은 투항자의 가족들까지 잡아서 죽이는 전쟁이었다. 그런 추악한 전쟁을 먼저 시작한 것은 좌익들이었다. 그러나 그 보복은 시작한 자들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부모와 형제를 눈앞에서 죽인 자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우익이라고 해서 덜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고, 우익이라고 해서 태어날 때 덜 잔인하게 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너가 할 수 있는 짓은 나도 할 수 있다. 너가 하는 만큼 나도 해주겠다. 이것도 인지상정이다.

진압군에 몰려 인근의 산으로 쫓겨간 반란군들의 희망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싸워도 죽고 항복해도 죽는 것이 자기들한테 남겨진 길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저지른 짓을 생각해보면 항복한다고 해서 살려줄 리가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당중앙의 구원이었다. 산으로 쫓겨간 반란군의 잔당들은 구원의 손길이 북으로부터 올 것이라고 믿었다. 당중앙은 자기들을 버리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이대로 진압군들 손에 자기들이 전부 죽어나가도록 당중앙이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그들을 지탱해주는 유일한 희망의 끈이었다. 그들이 살기 위해서는 삼팔선에 포화의 섬광이 번쩍여야 했다. 영용한 인민의 군대가 삼팔선을 넘어 남반부 전체를 해방시켜야 했다. 반란군들은 인민군을 영접할 그 날을 기다리며 길고도 힘든 빨치산의 길을 걷게 된다(이들을 일컬어 신빨이라고 한다).

한국전쟁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 추악한 계급전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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