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을 문득 보다가,
오래전에 쓴 일기들을 다시 읽으면서 책갈피 하나를 줏엇다.
정확히는 대략 15여년 전의 내가 쓴 책갈피,
한땀 한땀 십자수와 함께, 단풍잎으로 화사하게 장식하려고 노력 하는듯, 꽃을 눌러서 압화를 해놓앗다.
그리고 작혀 있던 작은 메모,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전부 거짓말이 아닐까?
누군가를 공감하고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착각이 아닐까?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같은 애들과 속하지도 못한다.
작게 봐서는 공부를 썩 잘하지도 못하고, 밖에 나가서 뛰어놀기에는 몸이 약하다.
크게 봐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안 가는 괴물
나는 왜 태어난 걸까,
그렇게 멍하니 기력없이 살던 나에게, 수녀님이 오셧었다.
수녀님은 다른 애들과 나를 놀게 하시고는, 언제든 그 품에 나를 안아주셧다.
집에서는 꿈도 못 꾸는 정말이지 다정한 포옹으로,
나도 나중에 수녀님같은 할머니가 되야지.
그렇지만 이 작은 메모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니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겟지.
나는 그대로 큰 체 법적으로 '성인 남성'이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몸은 처음보는 사람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을 못한다.
심지어, 왜 중학생때 입은 교복이 그대로 맞는 걸까. 그 때문에 겪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많고 많지만,
그래도, 나라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수녀님처럼 애들을 보살피는 것은 꼭 할머니가 아니여도 돼,
'여자'가 아니여도 돼,
'남성'도 치유하는 성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그건 수녀님이 알려준 사실이니까,
누군가 바보같이 왜 굳이 시간내서 봉사시간을 가느냐고 물어보았다.
난 솔직히 말했다.
자기만족이라고,
응, 그렇지만, 품에서 애들의 특유의 어른보다 좀 더 높은 체온을 느끼며 그 애들과 같이 놀고,
햇볕속에서 잠이 든다는 것 그건 하나의 축복이다.
서로를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해주는 것,
서로를 보며,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 것,
서로를 껴앉으며 체온을 느끼는 것,
언제라도, 힘들어도, 슬퍼도, 괴로워도, 쓰러질 것 같아도,
간직하자, 그 체온을, 그 기억을
그래도, 나도 치유하는 성이 되어서 그 애들과 놀러 갈 수 있다.
상처는 잊을 수 없지만, 그 위로 추억은, 즐거운 것들은 얼마라도 쌓을 수 있다.
힘들어도, 슬퍼도, 쓰러질 것 같아도 웃다 보면, 웃을 수 있는 날이 온다.
난 적어도 그렇게 생각해,
이리와, 너도, 같이, 함께, 웃으며, 보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