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0월18일. (흐림,비)
서울 경희대 교정에 학생들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유인물이 뿌려졌다.
유신반대 시위였다.
어쩐 일인지 선언문을 읽기로 한 동료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즉석에서 몇몇 학생이 시도했지만 학교 관계자들이 모두 제지했다.
3학년 문재인은 속이 탔다.
"우리 팀은 아무도 모르게 시위 준비만 해준 후 잠적해 버리기로 했다"던 계획이 틀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문재인이 연단에 올랐고,
동료들이 둘러싼 가운데 그는 선언문을 읽어 내려갔다.
"할 수 없이 내가 선언문을 읽었다. 비가 내려 선언문이 젖었다.
그래도 내가 쓴 글이어서 문제없이 읽을 수 있었다." (문재인, '운명')
"문재인은 기숙사비도 학교에서 주는 법대 장학생이었다.
데모를 하면 장학생 신분이 다 박탈되니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기획팀에 있었다.
그런데 74년 10월18일에
그런 기득권을 버리고 (연단에) 나간 것"이라고 회고했다.
(학생운동을 함께 참여했던 학생 '이상호 전교조 해직 교사'의 인터뷰)
유신반대 시위를 하다 주동자로 구속 수감됐고
나오자마자 강제로 군 입대를 하게되었다.
'시범케이스'로 공수부대에 배치되었다.
문재인은 특전사시절 군인으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폭파과정 최우수 표창 비롯 전두환 전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80년 서울의 봄. 문재인은 복학합니다.
2차 사법시험 결과를 기다리던 그는
전두환 군부를 막아내기 위해 다시 민주화투쟁에 앞장섭니다.
그리고 다시 체포됩니다.
그러다 유치장 안에서 들은 2차 사법시험 합격소식을 듣게되고..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눈물로 바치고 싶었던 합격소식.
문재인을 밖으로 내보낼 수 없었던 경찰은
유치장 안에서 술도 마시고 노래도 하는 역사에 없는 축하파티를 허락했다고 합니다.
이후 사법연수원을 차석 졸업.
사법연수원 내 최고상인 법무부장관상도 수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차석.
(이는 과거 학생운동 전력때문에 차석 수석이 되지 못되었다는 설이 있다)
학생운동 전력때문에 판사 임용이 무산되고
부산으로 내려가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볍률사무소를 운영하며
인권변호사로 생활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