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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구 총리 후보자의 청문회를 보다보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게시물ID : sisa_57629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ydney_park
추천 : 15
조회수 : 775회
댓글수 : 34개
등록시간 : 2015/02/12 14:42:06
이완구 총리 후보자의 청문회를 보다보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제 아버지 이야기입니다.
이십대 중반부터 공직에 몸을 담은 제 아버지는 평생을 한 길만 걸으신 분이셨습니다.
저 어릴 적 집 에서는 가끔씩 소동이 나곤 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선물로 들어온 사과 한 박스 선물에 아버지는 노발대발 하셨습니다. 명함 한 장 없이 어머니가 안 계신 사이 들어온 과일 한 상자가 모두 썩어나가도록 저희는 한 알도 먹을 수 없었지요.
아버지가 일본에 첫 해외출장을 다녀오신 기억이 납니다. 1967년의 일이었습니다. 변변한 선물 하나 안 사 오신 아버지는 그 후 어머니에게 듣기로 숙소를 바꿔 출장비를 절약하고 그것을 반납하셨다고 했습니다. 어린 네 자식을 키우며 어머니가 부업을 해야 살림을 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사무관 시절 3년이면 집을 몇 채 사고 나간다는 농림부 농지과장을 8년을 하셨어도 저희 집에는 대학생 하숙생이 항상 서너 명씩 있어야 했었습니다. 한 두 마디 귀띔만 해 줘도 될 것을 어쩌면 그럴 수 있냐고 하는 일가친척들의 원망이 제 귀에도 들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해병대에 입대한 장남은 백령도에서 근무했지만 엉덩이가 피 떡이 되어 휴가를 나올 때 까지 아버지는 어떠한 간섭도 안 하셨습니다. 그것도 나라를 지키는 군인으로서 감내해야 한다는 생각이셨겠지요.
 
제가 양 쪽 어깨 습관성 견갑관절 탈구로 1980년도부터 3년을 내리 무종 판정을 받았을 때에도 아버지는 자식의 군대문제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려 하지 않으셨지요. 정밀 신체검사를 마치고 돌아 나올 때 뒤따라 나온 상사 계급을 한 하사관이 면제 이야기를 하며 더도 아닌 술값 삼십 만원을 이야기 할 때, 아버지를 닮은 아들은 법대로 하라고 소리를 치고.......
집에서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을 때 아버지는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몸은 힘들겠지만 “군대에 다녀와라. 대한민국의 남자로 군대에 가지 않는 것은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입니다.
진해 육군대학에서 군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몸 불편한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듭니다.
면단위 주사로부터 시작하여 부산 생사검사소 소장, 중앙부처 국장을 거쳐 정부 투자기관 해외본사의 장에 이르기까지 자식의 입장에서 지금 돌이켜보면 제 아버지는 첫째도 둘째도 그리고 셋째도 오로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위한 인생이었지 싶습니다.
멀리 타국에서 이완구 총리지명자의 청문회를 보다보니 내 아버지 세대 오로지 애국심과 희생만으로 나라를 세우기 위해 애쓴 선배 공직자들의 정신을 도대체 이들은 어떻게 보고 이렇게 살아가는가 싶어 참담함이 그지없습니다.
지금도 국가부처 곳곳에 저의 아버지와 똑 같은 자세 똑같은 정신으로 일하는 수많은 공직자들이 있을 터인데 그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고 말입니다.
오늘 저녁은 멀리서나마 아버지께 전화라도 드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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