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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 산문 - 어느 누군가의 하루
게시물ID : humorbest_57634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녹차맛사탕
추천 : 15
조회수 : 746회
댓글수 : 1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2/12/03 09:27:04
원본글 작성시간 : 2012/12/02 22:23:44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말하려 듯이 조그만 입을 살짝 열었고 이내 그녀의 모습은 사라지고 익숙한 내 방의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몇 년 째 잊혀질만하면 계속되는 같은 꿈이었지만 꿈을 꾸고 난 뒤의 먹먹함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녀와 헤어진지도 벌써 십 년이 넘었지만 마지막 순간의 그녀의 모습과 그녀를 덮을 듯 매섭게 내리던 하얀 눈은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고 나를 찾아왔다.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니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피곤함에 잠시만 눈을 붙이려고 소파에 누운 것이 후회가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책상에 앉아 논문집을 펴고 컴퓨터를 켜 자료 정리를 계속하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타이핑 소리와 타닥타닥 창밖으로 내리는 빗소리만이 방을 가득 메웠다.

젠장......”

데이터를 분석하여 결과 값을 구했지만 오차율이 너무 컸다. 논문집과 컴퓨터 화면에 띄워진 보고서, 끄적여 놓았던 계산 과정을 비교하다가 중간 과정에서 잘못된 곳을 발견하고는 보고서를 다시 써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파졌다. 그녀가 나오는 꿈을 꾸고 나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녀의 기억을 지워보려 애쓰며 다른 일에 몰두하지만 일이 제대로 되기는커녕 평소에 간단하게 해 내던 일도 망치기 일쑤였다.

 

여자의 몸으로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되었지만 이 사회에선 어렵고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부드럽고 올록볼록 곡선진 여자의 몸도 좋았고, 풍부한 감수성으로 때로는 너무 감정적이라고 비난받는 여자들의 약함도 좋았다. 대학교 3학년 봄, 호기심으로 들었던 프로젝트 수업에서 그녀와 나는 같은 조가 되었다. 매 주 내야하는 보고서가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그녀와 나는 자주 만나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밤을 꼬박 새어 회의를 하거나 함께 밥을 먹으면서도 프로젝트 얘기를 해야 할 만큼 할 일이 많은 과목이기도 했고 서로 잘 맞는 것을 느끼고 친해져서기도 했다. 학기 중반 즈음 이었던가 어느새 그녀의 연락이나 프로젝트 시간을 기다리고 그녀와 만날 일이 있으면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고민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를 좀 더 보기 위해 항상 프로젝트 핑계를 대며 약속을 만들었고 그런 덕분인지는 몰라도 학기가 끝나고 좋은 성적도 받을 수 있었다. 한 학기 만에 그녀와 나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고 남은 학교생활을 돌이켜보면 거의 그녀와의 추억 뿐 이었다.


여중, 여고를 나왔던 나는 꽤나 어릴 적부터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매장되는지도 함께 볼 수 있었다. 감정에 취해서 아무한테나 고백을 했다가는 길을 지나면서도 손가락질 당하거나 자신에 대해서 수군거리는 말을 들어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정말 내가 어떤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이렇지도 저렇지도 않은 관계를 견딜 수 없을 때에만 조심스럽게 마음을 내 비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녀에게도 좋아하는 마음을 3년이나 숨겼었다. 그리고 졸업 직전, 그녀와 어차피 어떤 식으로든 멀어지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녀에게 내 마음을 고백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화창한 햇살과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나를 응원하듯이 느껴지던 그 날, 나는 그녀에게 진심을 담아 내 마음을 전했다. 그녀는 덤덤하게 내 말을 끝까지 듣고 있었다. 좋아한다는, 만난 지 얼마 안돼서부터 좋아하고 있었다는 내 고백이 끝났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자신도 알고 있었다고 이렇게 용기 내어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날부터 우리는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모든 것, 모든 시간이 맹목적으로 행복하고 좋았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도 그녀에게 내 모든 것을 주었고, 그녀도 나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말하려 듯이 조그만 입을 살짝 열었고

나 더 이상은 못하겠다. 주변의 시선 난 견디지 못할 거 같아. 미안해

라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녀와 나 사이가 소원해 진 것은 아니었다. 나야 성격상 주변을 신경 안 쓰기에 결혼 적령기가 되었다느니, 언제 결혼해서 언제 결혼할거라는 주변에 물음에도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계속해서 주변에서 주는 스트레스와 질문을 견디지 못하고 그녀는 평범한 여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울며불며 매달리고 그 뒤에도 몇 달간은 그녀를 찾았고, 그녀도 나를 크게 밀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결혼하려는 남자가 생겼다며 슬픈 표정으로 나에게 청첩장을 건네는 그녀의 모습을 본 이후로는 그녀에게 연락할 힘도 용기도 생기지 않았다. 그걸로 그렇게 끝이었다. 딱히 같이 친했던 친구가 있던 것도 아니었기에 그녀의 소식을 들을 일도 없었다.

 

추억에 잠겼던 나는 머리도 식힐 겸 바람을 쐬러 집 앞 공원으로 향했다. 비가 그치고 나서인지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좀 더 두꺼운 옷을 입고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옷깃을 여몄다. 저녁이라 그런지 공원에는 조깅을 하러 나온 사람들, 학교를 마치고 재잘재잘 떠들며 집에 가는 학생들, 나처럼 바람을 쐬러 나온 사람들로 꽤나 붐볐다. 그날따라 그네를 타고 싶었고 자연스럽게 발걸음은 놀이터로 향했다. 휘적휘적 걷다가 손을 살짝 적시는 느낌에 손등을 보니 작은 눈송이가 녹고 있었고, 하나 둘 떨어지던 눈송이는 금세 펑펑 내리고 있었다. 놀이터에는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나온 가족들이 꽤 있었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 그네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마음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그네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열 살 정도의 아이의 손을 꼭 잡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뻣뻣하게 굳은 몸을 돌려 집까지 뛰어와 문을 열고 숨을 골랐다. 신발을 내팽겨 벗고는 방으로 들어가 미친 듯이 논문집을 뒤지고 평소보다 좀 더 강한 힘으로 타이핑을 했다. 어차피 나중에 다 지우고 다시 쓰게 될 걸 알면서도 논문을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 뿐 이었다. 아니 그 생각 말고 다른 모든 생각을 지우고 논문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왠지 오늘은 잠을 이루지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계산기를 두드리다가 툭 하고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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