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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 산문 - 어느 후배
게시물ID : humorbest_57655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밀크대오
추천 : 24
조회수 : 1263회
댓글수 : 10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2/12/03 15:47:57
원본글 작성시간 : 2012/12/02 18:23:43

어느 후배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닭머리 인형을 쓰고 어색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못내 마음 걸렸던 낡디 낡은 브랜드 운동화가 없었다면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기십만원짜리 코트를 걸쳐도 자연스레 인상이 찌푸려지는 날씨는 저질 소재로 만든 닭머리 인형과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인형 밖으로 전해지는 그녀의 민망함과 추위로 굳어가는 씁쓸한 춤 역시 익살스레 윙크하는 닭머리 인형의 표정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몇 다리 건너 과 후배인 그녀는 언제나 휴학을 고민했다. 항상 소매가 해져 실나올이 묻어나오는 베이지 색 야상을 입고 두 손을 만지작거리며 수줍게 밥을 사달라고 했다. 학생 식당에서 나와 천원짜리 아메리카노를 사주면 작은 손으로 커피잔을 감싸쥐고 병아리처럼 나를 따라다니곤 했다. 나는 그 모습이 제법 괜찮게 보였다.


그녀는 내가 활동하는 동아리에 가입하고 싶어 했지만 매달 회비를 내야 한다는 말에 아쉬움 섞인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 표정이 마음에 걸려 우연찮게 과방에 들린 것처럼 위장해 회비 특별 면제 기간이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그녀는 아르바이트가 있어 힘들 것 같다고 정말 힘들게 말했다. 그 다음 주 금요일 저녁에 있었던 전과생 환영 술자리에 그녀는 참석하지 않았다.


 

처음엔 꽤 활발한 아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신입생 환영을 빙자한 23일 간 예비대 마지막 날에 그녀는 무대에 나가 동기들과 춤을 췄다건배 제의를 하는 나를 아무 것도 모르는 듯한 순진한 눈으로 쳐다 보곤 한 잔 술을 느리게 삼키고 미간을 찌뿌렸다.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 연거푸 술을 채웠다. 그 날 새벽, 그녀는 화장실 앞에 누워 선배들의 이름을 백번 정도 부르다 잠들었다.


입학식이 없는 대학교 입학 날, 그녀는 또래 동기들과 함께 밥을 사달라고 전화했다. 어색한 화장으로 잔뜩 멋부린 그녀가 비슷한 화장 기술을 가진 새내기 무리에 섞여 있었다. 일주일간 굶어야겠다는 농담을 던지고 들어간 일본식 돈까스 가게. 후식으로 나온 인스턴트 녹차를 마시던 그녀는 다른 또래들과 마찬가지로 사소한 질문을 쏟아내며 대학 생활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얼마간 캠퍼스에서 마주치지 못했던 그녀를 다시 만난 건 유채꽃이 지고 때 이른 매미가 우는 6월이었. 천원짜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두 손에 쥔 그녀는 그동안 뭐하고 지냈냐는 물음에 7시부터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돈은 적지만 일하면서 레포트와 과제를 할 수 있어 만족한다고 작게 웃었다. 술을 한잔 사주고 싶었지만 그녀는 아르바이트 늦겠다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일어섰다.


내심 안심했다. 혹여 외로운 남자들 앞에서 말동무를 해야 하는 일을 하진 않을까 걱정하고 있던 차 였다. 하지만 결국 힘내라는 말을 하진 못했다. 어줍잖은 위로의 말로 동정의 눈초리를 던지긴 싫었으니까. 시간내서 놀러갈게 라고 말했지만 난 결국 그녀가 일하는 PC방에 놀러 가지 못했다. 6월의 그녀가 달라진 것 소매가 다 헤진 베이지 색 야상을 벗었다는 것 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어학 연수를 빙자한 외국 여행을 떠나고, 누군가는 각종 스펙을 쌓기 위해 냉방병에 걸리고, 누군가는 농활이며 동아리 활동이며 쉬지 않는 학교 생활을 하고 또 누군가는 하릴없이 시간만 죽이던 여름 방학이 끝났을 무렵, 다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처음으로 술을 사달라고 했다.


그녀는 2학기 등록금을 내지 않았다. 아니, 내지 못했다고 했다. 소주 몇 잔에 힘을 얻은 그녀는 마른 입술을 열며 나도 남들처럼 살고 싶다고 조용히 외쳤다. 하고 싶은 것도 하고 먹고 싶은 것도 먹고 싶다고 했다. 다른 사람처럼 유학도 가고 싶고 농활도 가고 싶다고 했다. 하다 못해 학교라도 걱정없이 다녔으면 좋겠다며 엉엉 울어 댔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문득 몇 달 전부터 페이스북에서 그녀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


 

얼마 뒤, 운좋게 취업에 성공한 나는 다른 지역에 가서 지내게 됐다. 누구나 그렇듯 나 역시 그저 그런 세상살이에 치여 그녀를 잊었다. 못난 선배에게 소매가 다 헤진 베이지색 야상이나 천원짜리 아메리카노를 두 손에 꽉 쥔 후배의 존재는 한 장의 얇은 월급 명세서보다 가벼웠다. 종종 넉살 좋은 후배 녀석들에게 학교 행사에 와달라는 전화가 오긴 했지만 진득한 피로감은 내 발걸음을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어쩌다 찾아간 학교 행사는 과 동문회였다. 나는 또 다른 선배들에게 새파란 후배가 되어 명함 돌리기에 바빴다. 회사에서 처럼 허허 웃다가 잔이 비면 재빨리 잔을 채우곤 넉살좋게 안부를 물었다. 선배들의 넥타이가 조금씩 풀려 갈 때 쯤, 점 찍어둔 선배 옆에 앉아 업계 동향을 물었다. 잔뜩 취했지만 눈에 억지로 힘을 주고 다시 허허 웃었다. 다시 돌아온 학교도 별 거 없었다.


 

오랜만에 동기들에게 연락이 왔다. 외국에 오랫동안 나가 있었던 한 녀석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덧붙여 연말이고 하니 망년회 겸 동기 모임을 가지자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타지 생활에 지쳐 있었기에 흔쾌히 약속을 잡았다. 어짜피 취직한 녀석들만 나오겠지만, 다들 먹고 살기 힘들다고 칭얼대겠지만 오랜만에 녀석들과 바보처럼 떠들고 싶었다.


두 해만에 찾은 그 거리는 여전했다. 끝내 다시 만나지 못했던 옛사랑과 함께 걷던 공간도, 그 공간을 가득 채우던 풋내나는 청춘들도 다들 그 자리에 있었다. 변해 버린건 어색한 양복을 입고 서로에게 명함을 돌리는 우리밖에 없었다. 녀석들과 나는 그 사실을 애써 부인하려는 듯 예전보다 더 크게 웃고 소리쳤다. 결국 우리는 술집 사장님에게 주의를 받았다.


 

돈 잘 버는 동기 녀석이 호기롭게 지갑을 꺼내곤 자기가 계산한다고 했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벌떡 일어나 자기가 계산한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 중 몇몇은 계산대까지 따라갔지만 결국 돈 잘 버는 동기 녀석이 술값을 지불했다. 아쉬운 표정을 짓는 한 녀석이 그럼 2차는 자신이 쏘겠다며 밖으로 이끌었다. 물론 모두 못이기는 척 밖으로 나갔다.


 

그 곳에 그녀가 서있었다. 매서운 바람과 축축한 눈을 맞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낯익은 거리에서 낯익은 사람들과 술을 먹어서 일까. 나는 한 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닭 머리 인형을 뒤집어 쓰고 있었지만 분명 그녀라고 확신했다. 새내기 시절, 그녀가 매일 신고 다녔던 깨끗한 브랜드 운동화는 이미 낡을 대로 낡아 있었다. 천원짜리 아메리카노 잔을 쥐었던 두 손엔 치킨집 전단지가 들려 있었다. 문득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어깨가 움추러 들었다.


나는 결국 그녀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빨리 오라는 동기 녀석의 짜증섞인 외침에 못이기는 척 돌아섰다. 건널목을 건너고 코너를 돌 때까지 그녀는 같은 곳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결국 그녀가 휴학을 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저질 소재로 만든 닭머리 인형 옷은 소매가 다 헤진 베이지색 야상을 겹쳐 입어도 여전히 추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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