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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국민 대다수가 반대했고,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이하 dj)과 야당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했다는 얘기는 이제 하나의 ‘가공된 역사’가 됐다. 본래는 4대강사업에 대한 반대를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반대로 ‘교묘하게’ 등치시키며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다.
여기에다 청계천도 마치 반대가 많았다는 식으로 언급되곤 한다. 원래 청계천 사업은 한겨레신문 등이 내건 진보적 의제였음을 벌써 잊고 있다. 하지만 경부고속도로 공약이나 건설 당시 국민은 반대하지 않았다. 차근차근 자료를 바탕으로 살펴보자.
고속도로 건설 공약을 내건 박정희 대통령을 선택했다 첫째, 1967년 4월 29일 박정희 대통령은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고속도로의 건설을 공약하기에 이른다. 이를 실천하고자 5월 1일에는 서울-인천간 고속도로 건설을 기공하는 한편, (7대 대통령 임기를 시작한 이후인) 1967년 11월 7일에는 제2차 5개년계획기간(1967~1971년) 중 계획에도 없던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을 건설부장관 주원씨에게 지시하게 되고, 이로써 우리나라에서 고속도로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김용환 회고록 『임자, 자네가 사령관 아닌가』, 매일경제신문사, 2002년, 53면 이하 참조).
이때 당시 김용환은 재무부 이재국장이었다. 선거는 1967년 5월 3일에 있었다. (선거 공약에 대한 반대차원에서 고속도로 건설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윤보선 후보가 아니라) 고속도로의 ‘전면’ 건설을 내건 박정희 대통령이 당선됨으로써 국민들은 ‘고속도로 건설’에 동의한 셈이다. 그렇다면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국민들이 반대했다는 말은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1968년 1월 여론조사도 압도적 찬성이었다.
둘째,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발표된 직후 월간 <세대> 1968년 1월호가 각계 인사 100명에게 찬반 여부를 조사했다. 그 결과, 68%가 무조건 찬성, 27%가 조건부 찬성, 5%가 반대를 표했다. (한상진, <고속도로와 지역불균등 발전>,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2 근현대편』, 역사비평사, 350면 이하 요약)
이때 이미 우리 사회는 근대화와 개발, 성장주의의 세례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한편, 조건부 찬성을 포함하여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유보적인 32명의 의견은 무리한 재정지출에 대한 우려가 12명, 투자 우선순위상 시급하지 않다는 주장이 8명, 제외된 지방의 발전지체 우려가 4명, 기타 8명의 분포를 보였다.
당시의 여론조사가 이런 결과라면 국민이 반대했다는 것은 결코 옳은 해석이 아니다. 그리고 국민들이 이렇게 동의하는 이상, 정치권의 반대 또한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음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한상진, 앞의 논문)
반대는 세계은행(ibrd) 등 국제기구였다 셋째, 가장 중요한 반대는 국내가 아니라 국제기구였다. 세계은행의 자매 기구인 국제개발협회(ida)는 “경부고속도로와 같은 남북종단보다는 횡단도로가 더 시급하다”고 함으로써 차관 지원에 난색을 표했다. 그 후 대한국제경제협의체(iecok)에 경제협력과 지원을 타진하였으나 성과는 마찬가지였다(경제기획원, <개발연대의 경제정책>, 김용환 회고록에서 재인용)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 시찰에 나선 박정희 대통령 | |
사실 ibrd의 반대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왜냐하면 돈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국내 투자가 불가능한 우리 현실에서 돈은 세금인상과 채권, 그리고 사용료, 거기에다 국제기구로부터 차관을 받아오는 수밖에 없었는데, ibrd가 반대하고 나서니 한마디로 큰 일이 난 것이다. 실상 가장 중요한 반대는 바로 이쪽에 있었다.
넷째, 반대는 나름대로의 근거와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국도와 지방도의 포장이 선결과제라는 것이었다. “교통부의 의뢰를 받아 1965년 11월부터 1966년 6월까지 한국 교통상황을 조사한 ibrd의 보고서는 철도 중심의 수송체계를 도로 중심으로 전환시켜야 함을 강조하면서도, 유료 고속도로의 건설보다는 국도, 지방도의 포장에 치중할 것을 주문했다.(한상진, 앞의 논문)”
둘은 당시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강사였던 기우식의 논리이다. “경부고속도로 완공시점인 1970년 9월호 월간 <신동아>에서 당시 서울대 행정대학원 강사였던 기우식은 그 같은 논리를 따라, ‘지역경제의 생활공간이 충분히 이용될 수 있도록 지역 내부를 잇는 교통망, 지역 간을 잇는 교통망이 서서히 형성된 다음에 비로소 고속도로를 건설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한상진, 앞의 논문)”
셋은 조선일보 논설위원 김성두다. “더 나아가 <조선일보> 논설위원 김성두는 ‘가격정책 등 농민소득수준 향상을 저해해온 경제순환의 메커니즘을 근본적으로 시정하지 못한다면 고속도로 개통에 따른 국민시장권의 공간적 확대는 생각대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교통의 편익증대에 따른 전시효과의 확대로 지방민의 서울 집중을 촉구할 수 있고 농공 간 부등가교환이 촉진되어 지역소득의 도시흡수가 더욱 심해질 가능성’을 제기했다.(한상진, 앞의 논문)”
dj는 고속도로 건설 자체는 동의하면서도 지역불균형을 비판했다 다섯째, 같은 맥락과 논리에 dj가 있었다. “한편 고속도로 건설이 지역불균등발전을 가져온다고 주장한 논객으로는 당시 건설위원회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김대중이 단연 돋보였다. 그도 고속도로 건설 자체는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랑과 긍지를 느낄 일이라고 보았다.
그럼에도 그는 1967년의 제62회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해 한마디로 ‘머리보다 다리가 크고 양팔과 오른쪽 다리가 말라버린 기형아 같은 건설’이라고 규정했다. 그 의미는 두말할 나위없이 영남 지역으로의 교통망 집중이 강원‧호남과의 불균형을 심화시킨다는 것이었다.(한상진, 앞의 논문)”
6대 대통령 선거 당시 야당후보는 윤보선이었다. 이때 dj는 단지 국회의원일 뿐이었다. dj는 결코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역구인 호남만을 고려하는, 호남푸대접만 강조하는 것도 아니었다. 국제기구의 조언과 보고에 합당한 영동고속도로의 건설을 먼저 주장했다. 이는 결코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었다.
“그는 1968년의 제63회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ibrd의 보고서에 근거하여, 서울-부산간에는 철도망과 국도, 지방도가 잘 갖추어져 있으므로 오히려 서울-강릉간 영동고속도로를 가장 먼저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원도에는 지하자원과 관광지가 많음에도 아예 철도조차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는 호남 차별정책도 거론하면서 경부선 복선철도에 비해 호남선 철도는 단선인 데다 낡아빠졌는데도 경부고속도로를 우선 추진하고 있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한상진, 앞의 논문)” 사실이 이러함에도 역사적 사실은 왜곡되고 있다. 모든 대안은 그저 반대로만 묘사된다. 나와 다른 생각은 무조건 반대로 해석된다. 대안마저도 반대다. 논쟁은 불가능하다. 논쟁 자체는 아예 봉쇄된다. 예나 지금이나 말 많으면 공산당일 뿐이다.
문제는 돈이었다. 다시 김용환 전 장관의 회고다. “‘국가 간선 고속도로 건설계획 조사단’은 최저액인 서울시의 180억 원과 최고액인 건설부의 650억 원의 중간치인 315억 원과 현대건설의 280억 원을 비교 검토하여 300억 원 규모로서 사업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 건설비는 뒤에 건설부의 건의에 따라 예비비 10%를 가산하여 330억 원으로 재조정되었고, 실제로 시공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수정되어 결국 약 430억 원이 소요되었다(건설부, 『국토건설 20년사』).”
결국 세금을 올리기로 했다. 휘발유세를 100%에서 200%로 올려 돈을 만들기로 했다. 여기에서 145억원이 마련됐다. 당시 예상했던 소요공사비는 365억 인데, 이 중 145억 원을 세금인상분으로 마련키로 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여기에 대해 동의했다. 재원 마련 계획에 대한 보고가 있던 날,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만찬을 베풀었다. “복 요리를 곁들인 성찬이었다.”
역시나 세금에 대한 인상은 야당보다는 집권여당 내부에서 더 큰 문제로 작동하는 것은 옛 정치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결국 돈 문제가 가장 무섭다.
“한편 재원조달 방안의 일환으로 보고한 휘발유세를 인상하기 위해서 휘발유세법을 개정하려 하자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에서조차도 정부안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급기야 휘발유세의 인상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대신, 이것이 당정간 불협화의 원인이 되어 서봉균 장관이 책임을 지고 사임하는 불상사를 겪게 되었다. 지금도 그 분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있다. (김용환, 『임자, 자네가 사령관 아닌가』, 60면)” 마지막 한 가지. 지역 감정이라고 비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역시나 지방분권, 지역 균형개발 차원에서 이해했으면 좋겠다.
“박정희는 1967년 6대 대통령 선거 때 호남 푸대접을 들고 나온 호남인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호남선 복선화를 공약했다. 그러나 이것은 착공만 했을 뿐 실제 공사는 조금도 진척이 없었다. 1978년 3월 30일 겨우 대전-이리(익산)간 복선이 개통되었을 뿐이고, 이 문제는 90년대까지도 국회에서 논란이 되었다.(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사실 경부고속도로 반대와 관련된 진실게임의 아이디어는 강준만 교수의 <한국 현대사 산책>에서 시작됐음을 정중하게 적어두고자 한다. 가르침에 감사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