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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SA] 故 장준하 선생, 타살인가 자살인가?
게시물ID : sisa_41291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페사딜라
추천 : 10
조회수 : 39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7/09 19:01:57
나는 1975년 8월 장준하 선생 장례 얼마 후 김희숙 사모님(고 장준하 선생의 부인-편집자)을 만나 몇 가지 사실 확인을 한 후에 선생의 옥중기를 쓰겠다고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미루어 왔다. 그러나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내가 아는 장준하 옥중생활을 간단히 정리해 보고자 한다. 

그날이 1975년 8월 14일 목요일일 것이다. 내가 그날을 기억하는 이유가 있다. 남산 야외음악당 사건으로 구속된 박형규 목사께서 재판 받는 날이었다. 우리(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 실무자)는 재판에 가기 전에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 모여 기도회를 하고 재판에 참여했다. 그 기도회를 계기로 나중에 기독교회관 목요기도회가 구속자 가족들 중심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반독재투쟁의 합법공간으로 발전했다. 

장준하 "어떤 사람이 꼭 나하고 등반을 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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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8월 22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장준하 선생 장례식에서 아들 장호준 목사가 고인의 영정을 들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이해학 목사는 그 뒤의 맨앞에서 고인을 운구했다.
ⓒ 장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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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재판정에 장준하 선생이 나타나신 것이다. 장 선생은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 동지, 내가 이 동지가 섬기는 주민교회에 가려고 몇 번 시도했는데 못 갔어. 지난주는 고영하 동지와 무등산 계곡을 며칠간 뒤졌어. 그래서 다음주일에 갈려 했더니 말이야, 어떤 사람이 꼭 나하고 등반을 하제. 몇 번씩 졸라서 이번 주에는 약속된 등반을 하려고. 그 다음 주에 (주민교회에) 갈 게. 용서해줘." 

이게 마지막이었다. '그 다음 주'는 없었다. 사실 무등산 등반은 거짓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에 따르면, 장 선생이 광주에서 홍남순 변호사를 찾아뵙고 중요한 논의를 한 자리에 고영하는 인사만 갔을 뿐이다. 장 선생은 자신의 행적을 드러내지 않는 독립군 특유의 습관 탓인지, 아니면 그만큼 비밀리에 준비하고 있는 '거사'가 중요했든지 자신의 일정을 위장한 것이다. 

그 '약속된 등반'을 하던 일요일에 장 선생은 약사봉 골짜기에서 의문의 주검이 되셨다. 우리가 급보를 듣고 서울 상봉동 좁아터진 전셋집으로 달려갔을 때 문익환 목사, 계훈제 선생 등이 먼저와 계셨다. 문 목사는 비통해 하시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문 목사는 그 이후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 

"내가 불알친구 윤동주가 죽어서도 참고 살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윤동주와 장준하가 없는 세상을 살아야 한다니! 그들이 나를 부른다. 내가 이들의 한을 풀어야 하겠다." 

함석헌-장준하 선생은 나의 멘토 

나는 함석헌 선생에게서 역사와 신앙을, 장준하 선생에게서 민족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그분들은 나의 멘토다. 1960년 광주에서 4·19 데모를 하다가 부상을 입은 나는 상경해 순복음신학교 대조동 기숙사에서 친구 셋과 함께 함석헌 읽기모임을 했다. 그때 젊은이들은 <사상계>를 끼고 다녔고 을지로 대성빌딩 흥사단 강좌로 몰렸다. 나는 멀리서 뵈던 선생들을 거기서 직접 만날 수 있었다. 함석헌 선생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사상계>에 이렇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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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과 장준하, 둘 중 하나는 죽었어야 했어" 1975년 10월 49제를 맞이하여 열 장준하 추모의 밤에 참석한 재야 인사들. 함석헌과 김대중 등의 모습이 보인다. 타살을 확신한 함석헌은 장준하가 김대중과 화해하고 힘을 합쳤기 때문에 박정희 입장에서는 김대중과 장준하 둘 중의 하나는 죽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 장준하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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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은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 군대는 똥이다. 똥은 어쩔 수 없이 싸는 것이기에 가리고 뒤에서 싸는 것이지 드러내 놓고 자랑스럽게 싸는 것이 아니다. 군은 비극적 역사를 보호하기 위해 봉사하는 것이지 국민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 

그 뒤 함석헌 선생이 발행한 <씨알의 소리>가 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 되었다. 그때 장준하 선생은 <씨알의 소리>를 비밀리에 인쇄해 제본도 못한 채 가족들이 접어서 표지만 씌워 승용차에 실어 배부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내 친구 강은기가 책을 받아다가 나와 함께 팔기도 했다. 

우리는 버스에서 정부의 탄압의 부당성을 알리고, 이런 월간지를 못 내게 하는 정부의 조치를 규탄하는 연설을 한 후에 승객들에게 몇 권씩 나누어 주고 바로 다른 노선버스로 바꾸어 타 추적을 피해야 했다. 그 이후 몇 번 뵈었던 하늘같은 선생을 나는 나중에 감옥에서 만나게 되어 감격스러웠다. 

무엇보다 감격스런 장면은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비준을 반대하던 시절 해외여행을 하시던 함석헌 선생이 급히 돌아와 태평로 시민회관에서 사상계주최로 강연회를 열었을 때다. 사람들이 구름떼 같이 모였으나 경찰이 소수만 입장시키고 출입문을 차단하니 항의가 빗발쳤다. 기마부대가 왔으나 성난 군중을 진압하지 못하자 결국 장준하 선생이 발코니에 나와 가까스로 군중을 달래던 장면들은 눈에 선하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몸으로 배우는 과정이었다. 

문교부(현 교육부)에서 데모 주동학생 173명을 제적시키라고 명하고 학원에 군인을 투입한 1971년 10월 15일 위수령 파동이 있었다. 나는 이때 교수들이 마지막까지 저항했음에도 한신대에서 제적되었다. 결국 1972년 유신헌법이 발동하여 헌법상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유보할 수 있도록 조처했다. '합법적 독재'가 문을 연 것이다. 

1974년 1월 '긴급조치 1호' 공포...장준하와 안양교도소에서 '상봉' 

한편 근대화로 인해 한해 전국적으로 60만 명씩 이농해 서울에 빈민촌이 늘어나자 기독교에서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위원장 박형규 목사)가 결성되었다. 취지는 빈민을 조직하고 의식화시켜 민주시민으로 살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1973년 1월 나는 훈련실무자로 부름받고 당시 광주대단지(현 성남시)에 파송되어 그해 3월 1일 주민교회를 창립하였다.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가 공포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빈민조직선교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정치투쟁을 하기로 결의하고 1월 18일 김진홍, 인명진, 이규상, 박윤수 등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김관석 총무 사무실에서 외신기자만 참석한 가운데 '유신헌법 철폐하라. 긴급조치 취소하라. 민주주의 회복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는 곧바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조사받은 뒤에 옛 서울구치소(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전국에서 맨 처음 구속되었다. 그런데 1973년 말 헌법개정 청원 서명을 주도하던 장준하, 백기완 선생은 전해 12월에 이미 구속되어 긴급조치 위반 소급 적용을 받고 있었다. 처음에는 독방에 격리 수용되었지만 3월부터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고 긴급조치 수감자들이 봇물 터지듯 들어오니 교도소 측이 감당을 못하였다. 감옥은 '즐거운 놀이터'가 되었다. 1심 재판이 모두 15년 징역형으로 끝나자 항소한 사람들을 안양교도소로 이감 보냈다. 나는 이감 대열에서 장준하 선생을 뵐 수 있어 너무 기뻤다. 

감옥에서 이감을 겪어본 사람은 그 수치스런 경험을 안다. 구치소 측은 아직 쌀쌀한 날씨인데 옷을 다 벗기고 항문까지 열어보는 검사를 했다. 나는 왠지 이런 큰 어른과 함께 그런 경험을 한 것이 죄스럽고 부끄러웠다. 

안양교도소는 항소한 죄수들이 수용되어 이감을 기다리는 곳이다. 나는 운 좋게 장준하 선생과 함께 방을 배당 받았다. 2동상 2방인가였다. 내가 놀란 것은 우리는 구치소에서 가져온 책 보따리로 주체를 못할 때 선생은 새로 나온 신약성서 한 권만 달랑 들고 계셨다는 점이다. 

장준하의 옥중 설교 "군부만이 박정희 정권 타도할 수 있다" 

우리는 이감 첫날 저녁식사 후 오붓한 이야기꽃을 피웠다. 각자 살아온 라이프 히스토리와 자기 사건을 잠깐씩 설명했다. 바로 이어 장 선생에게 독재타도 방법론을 물었다. 우리는 깜짝 놀랐다. 그는 학생운동만으로는 이 정부를 끝장내지 못한다고 못 박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이 있습니까?" 
"있다. 총이다. 군부만이 이 정권을 타도할 수 있다." 

모두가 실망하였다. 민중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완성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우리에게 장 선생의 처방은 의외였다. 장 선생은 그 이유를 몇 가지로 말씀하셨는데 이런 논지였다. 

4·19로 무너진 이승만과 박정희는 출신 배경이 다르다. 이승만은 친미세력이지만 일본과 싸운 상해 임시정부 출신이다. 이승만 정권은 미국에 안주하는 무능과 관료부패 때문에 망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일본군에 자진 입대하여 충성을 맹세하고 독립운동가를 토벌한 일본군(만주군) 장교 출신의 친일세력이다. 부끄러운 과거를 가졌기에 과거가 들통 나지 않는 길은 계속 집권을 하는 수밖에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본군에서 훈련 받은 잔혹함으로 집권을 강화해 갈 것이다. 

요컨대 이런 정권을 타도하는 길은 학생운동으로는 한계가 있고 군부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군부 쿠데타가 유행처럼 번지는 것을 우려한 우리는 또 쿠데타를 해야 하는 의문점을 풀지 못한 채 "그러면 그런 군부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장 선생은 짧게 "있다"고만 답했다. 우리는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그 다음날인가 교도소 측은 나를 다른 방으로 옮기게 했다. 장준하 선생을 격리시키라는 명이 떨어진 것이다. 장 선생은 고영하 등과 계시다가 나중에 심장병 때문에 병동으로 옮겼고, 나는 공범인 김진홍 목사, 김석경, 성경식 등과 같이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교도소의 열악한 급식에 항의하는 단식을 계기로 나도 병동으로 옮겨가서 장준하 선생을 모시고 그분이 백병원으로 옮길 때까지 가장 오래 옆에서 지켜본 증인이 되었다. 

장준하 "친일분자인 박정희는 내게 열등의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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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군 장교 시절의 장준하와 일본 황군 장교 시절의 박정희. 동시대를 산 두 사람의 삶의 궤적은 정반대였다.

장 선생이 우리 가운데 목사가 있으니 예배를 드리자고 주장해 주일마다 환자들을 모아놓고 내가 설교를 하고 그 분은 경청을 했다. 그리고 잘못된 사안에 조언도 아끼지 않으셨다. 우리는 거의 매일 운동 시간 내내 대화를 나누었다. 때로는 독립 운동사를 듣기도 하고, <사상계> 시절의 비사를 듣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김재규 장군과의 인연을 확인하는 것은 충격이었다. 나는 운동을 하면서 왜 박정희가 유독 선생님을 학대하느냐고 물었다. 장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은 열등의식이 있다. 나는 독립운동가이고 그는 친일분자다. 나는 한반도 전체를 포괄한 정치를 구상하고, 김대중과 박정희는 남한 내부만을 보는 차이가 있다." 

장 선생은 박정희를 '밀수 왕초'라고 비난하고 구속되어 옥중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국방위원으로서 전방부대 국정감사를 가서 김재규 장군을 만났다. 당시는 부패가 너무 심해서 국정감사는 형식이고 요정에서 뇌물로 국감을 대충 끝내던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에 깊은 절망에 빠져있던 김재규 장군 부대를 장준하가 방문한 것은 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장준하는 다른 국방위 국회의원들과 달랐다. 요정을 거부하고 내무반에 들어가 사병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그리고 장병들과 대화를 통해 국정감사를 했다. 이런 모습이 김재규에게는 충격이었다. '모든 정치인들이 다 썩은 줄 알았는데 이런 분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그는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 후로 장준하 의원을 중심으로 모이는 그룹이 생겼다. 그분이 전방에 떴다하면 길을 막고 만나서 대접을 하기도 하고 나라 살리는 궁리를 했다고 한다. 이때 함께한 이들이 이종찬(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의 손자. 육사 출신으로 5공 때 정계에 투신해 김대중 정부에서 국정원장을 지냈다-편집자), 김경원(학자 출신으로 박정희-전두환 정부에서 대통령 국제정치특보와 비서실장, 주미대사를 지냈다-편집자) 등이었다고 들었는데, 나중에 박정희가 죽은 뒤에 이종찬 의원을 면담하고 사실관계를 확인하려 했으나 그는 답변을 피했다. 그러나 김희숙 사모님은 이와 관련 많은 증언을 해주었다. 

장준하와 김재규, 박정희 제거 '거사'의 동지적 관계? 

어느 날 내가 장 선생과 교도소에서 운동을 할 때 말씀도 없으시고 너무도 힘들어 하시길래 무슨 일이 있으시냐고 물었다. 그러나 장 선생이 "이럴 수가, 나를 배신하다니!" 하는 외마디만 뱉으시고 입을 닫아 더 묻지 못하고 교도관을 설득해 신문을 좀 가져달라고 해 보았다. 신문에서 김재규 장군이 건설부장관에 임명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 선생은 김 장군이 건설부장관 자리를 받은 것을 '박정희의 품'에 안긴 것으로 간주해 두 분만의 약속, 즉 박정희를 제거할 군부 쿠데타를 포기한 것에 대해 염려하신 것이다. 

그러나 김재규 장군은 그로부터 4년 뒤 중앙정보부장 시절에 정 선생이 없는 세상에서 '외로운 총잡이'로서 의리를 지켰다. 그때 장 선생이 계셨더라면 한국의 정치사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장 선생 타계 후 김희숙 사모님은 내게 김재규 장군이 위험을 무릅쓰고 어려운 가족을 돕기 위해 여러 가지 지원을 해줬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뒤 어느 언론 인터뷰에서는 그것을 부인했는데, 그 이유를 나는 아직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김재규 장군이 미국의 사주를 받아 박정희를 죽이고 버림받았다는 주장을 하는데 나는 미국의 사주 음모설을 믿지 않는다. 설령 그런 측면이 있더라도 "박정희를 제거한 후에 정치권에 정부를 이양할 '선한 군부'가 있다"는 장 선생의 신념이 확고했음을 똑똑히 기억한다. 

혹시 장준하와 김재규는 오랜 정치개혁을 꾀한 동지적 관계였고, 장준하 선생의 죽음은 그날 급하게 함석헌, 홍남순 등을 만나 상의한 '거사'와도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소선 여사의 증언) 

김재규 장군은 재판에서 박정희를 살해할 계획을 몇 차례 시도했음을 증언했다. 야전군 사령관 시절, 박정희의 부대 방문을 준비하면서 밖에서 안으로 못 넘어 오도록 밖으로 굽히는 철조망을 안에서 못 도망가게 안으로 굽혔던 것이다. 또 건설부장관 임명식에서 권총을 왼쪽 가슴에 품었던 것을 사진으로 제시하며 정치적 경쟁이나 최태민과 박근혜 문제로 인한 차지철과의 갈등만이 아니고 구국차원에서 거사한 것으로 주장했다(안동일 변호사의 증언).

"이 동지 당신은 내 몸을 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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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8월 명동성당에서 열린 장준하 선생 장례미사
ⓒ 장준하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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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중에 SBS <그것이 알고 싶다>(문성근 진행)의 '장준하편'과 '김재규편'에서 두 번 같은 증언을 했다. 또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을 위한 책에도 같은 증언을 기록했다. 

지금은 감방에서 수돗물을 틀어 몸을 씻을 수 있지만 그때는 매일 받는 물로는 몸을 씻을 수가 없었다. 하나뿐인 목욕탕에 가야 했다. 2동상 전체가 긴급조치 수감자들인데, 우리는 한꺼번에 벌거벗고 나와서 세면기에 비누와 수건을 담아 들고 줄을 서서 목욕탕까지 줄을 서서 행진하고 잠깐 씻고 돌아오곤 했다. 그때만 벌거벗은 몸으로 장준하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민망함을 느끼며 훔쳐본 장 선생의 몸은 여성 피부같이 하얗다. 그리고 살이 쪄 있었다. 그런 피부는 조금만 스쳐도 멍이 생긴다. 

법의학에 문외한인 내가 장준하 선생의 주검에 가진 의문의 출발이다. 장 선생에게 등산할 것을 조르고 산행 당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동행한 김용환은 왜 사고 직후에 가까운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거리가 먼 군부대까지 가서 신고했을까? 나중에 발견한 것이지만, 장 선생의 시계를 그가 차고 있었던 것은 오히려 중요하지 않다. 영웅심이나 호기심에서 그렇게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장 선생이 약사봉 바위 절벽 위에서 떨어졌다면, SBS가 방영한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같은 무게의 인형을 같은 장소에서 굴리는 실험에서 알 수 있듯이, 팔다리뿐 아니라 온몸이 상했을 터인데 어떻게 그처럼 깨끗하게 뒷머리만 찍힐 수 있는가. 장 선생이 차고 있던 수통도 상처 하나 없이 그대로였다. 장준하 선생이 지금도 나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이 동지 당신은 내 몸을 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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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73722&CMPT_CD=P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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