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무명논객
우리의 삶의 모습이 천차만별이듯, 민주주의에도 수 만가지 뜻이 있다. 학술적 다의성 이외에도 민주주의는 우리들의 삶 속에 투영되어 각기 다른 프리즘으로 비춰지고 다루어지고 있다. 이제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대세’가 되었다. 그리고, 대세임과 동시에 민주주의는 우리 삶 곳곳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려고 한다. 처음에는 단순히 선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던 민주주의가, 이제 그 의미를 넘어 우리에게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 노동 현장에서의 민주주의, 학교 현장에서의 민주주의, 가정에서의 민주주의, 기업에서의 민주주의… 우리에게 주어진 민주주의는 너무도 작은데 반해, 우리가 앞으로 고민하고 넓혀가야 할 민주주의의 영역은 너무도 넓다. 이 글의 고민은 바로 이곳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민주주의를 보다 어떻게 더욱 급진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까? 민주주의에 대한 사고가 급진적으로 발전하면,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더 많은 곳으로 확대되지 않을까?
한 때, ‘민주화’라는 가치가 성역으로써 군림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제한적으로’ 이루어내고, 민주화의 타이틀만 단 채 권력 싸움에 골몰하였다.그들에게 민주주의는 곧 ‘권력’의 문제였고, 때문에 권력을 가지게 된 그들은 우리네 삶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민주주의’에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소위,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칭송되며 시행된 지방자치제는 이제 그 한계를 너무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보여주기식 행정, 주민의 참여 저조 및 의식의 미성숙 등등… 국가 차원에서 ‘외부에 의해’ 강제적으로 도입된 민주주의는, 그 훌륭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지역 사회에 스며들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아니, 정확히는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너무도 익숙치 않은 단어였다.우리에게 ‘학습된’ 민주주의는 시험지 상에서나 존재하였다. 가령, 철수와 영희가 같이 밥을 먹으러 가는데 민주적으로 토론을 한다던가! 시험지 속에나 존재하는 민주주의는 우리의 체험들을 더욱 더 박제화시킬 뿐이었다.
실제로, 우리의 많은 기억들은 박제화된 채 존재한다. 우리에게 5.18의 기억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죽어갔던 광주사람들’ 정도로 기억할지 모른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총을 들게 했는가. 그 울부짖음을 우린 느낄 수가 없다. 이제, 그 ‘민주주의’는 잊혀졌다.그들의 살아있는 체험들을 우린 기억하지 않는다. 다른 한 편에서, 박정희의 기억은 어떠한가? 누군가는 그를 ‘국부’로 부르자고도 하고, 누군가는 그를 ‘악마의 독재자’라고 부르자고 한다.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학습하지 않아서’ 박정희를 받아들인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오히려, 민주주의에 대한 ‘체험’이 사람들로 하여금 박정희를 받아들이게 한 큰 요소일 것이다.
각기 다른 체험 속에 민주주의는 다르게 발현되고 다르게 수용된다. ‘민주주의는 다원성을 인정한다.’라는 대명제는 민주주의 그 자신의 다원성에 대해서도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적 함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더 ‘올바른 민주주의’를 위해서, 우리는 어떤 것을 살펴보아야 할까? 빼어난 사회주의자였던 로자 룩셈부르크는 ‘체험 속의 급진화’라는 명제를 제시한 바 있다. 실로 그러할까?
먼저 민주주의를 바라볼 때, 한국 사회는 크게 두 가지 변동을 겪어왔음을 알아야 한다.첫 째는 기나긴 장기 군사독재 정권을 거쳐, 민중에 의한 민주화의 쟁취(비록 그것이 ‘민정 이양’이라는 명목 하에 이루어진 또 다른 군벌의 집권이라는 형태로 나타났지만, 어쨌든 민간정부의 쟁취와 이후 민주화 운동 세대의 집권), 둘 째는 ‘민주’ 정권에 의한 시스템 개악과 더불어 그로 인한 민주주의의 장기적 후퇴가 그것이다.
한국 사회에서의 민주주의는 이토록 두 가지의 모순된 인식을 안고 있다. 박정희, 전두환에 저항하여 이루어낸 ‘우리의’ 민주주의라는 자긍과 함께, 소위 ‘민주’ 정권에 의해 이루어졌던 시스템적 개악은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삶의 현장에서 기능하기 어렵게 만드는 후퇴를 낳았고, 그로 인해 박정희, 전두환 독재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두 가지 모순된 인식은 매우 징후적으로 버무려져 있다.
지금 우리 삶에서 민주주의는 어떻게 기능하고 있을까. 진정한 민주주의란 단순한 선거민주주의를 뛰어 넘어 우리 삶에서 구체적으로 발현되어야 한다는 점에 초점을 두고, 지인 분과 인터뷰를 해보았다.
Q. 현재 무슨 일을 하고 있나?
“삼성 애니카 콜센터에서 상담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Q. 상담원으로써 애로 사항은 없나?
“정말 많다. 상담을 요청하는 고객들은 크게 두 부류가 있다. 한 부류는 정말 순하게 나의 지시를 잘 따라주어서 해결이 되는 경우고, 다른 한 부류는 상담원을 바보로 아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 안에서도 또 몇 가지로 나뉜다. 보통은 구체적인 상황 설명과 함께 상담을 요청하는데, 자동차 보험 회사라는 점에서 다짜고짜 돈 달라는 사람들, 그리고 자기가 실수해서 사고를 내고 상담원에게 화풀이하는 경우. 이런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는 형국이다.”
Q.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
“결국 돈이다. 모든 게 돈으로 결정이 된다. 돈으로 사람도 사고 파는데 자동차 같은 기계야 오죽 하겠는가. 무조건 돈으로 달라고 한다. 요즘 사고 현장 가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아도,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상황이 발생해도 어떤 인간적 감정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냥 돈. 사람이 죽으면 ‘돈을 얼마나 물어줘야 하나’ 이 생각 밖에 안한다. 두 번째가 ‘내 차 망가진 건 어떻게 보상이 되나.’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도 오로지 돈 뿐이다. 그다지 바람직한 세상은 아니다.”
Q. 자신에게, ‘돈’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돈은 필요한 물건이다. 살아가는데, 사람 사이에 거래가 없을 순 없잖나. 이런 거래가 성립하려면 어쨌든 일정한 교환 가치를 지닌 것이 있어야 하고, 돈은 필수 조건이다. 그런데,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최고다. 사람도 필요 없다. 돈이 무조건 1순위가 된다.”
Q. ‘자본주의’를 어떻게 생각하나?
“두 가지를 구분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는 학술적으론 어떨지 모르지만 둘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에서는 돈이 무조건 최고지만, 시장 경제는 우리가 흔히 가는 동네 시장 생각해보면 될 거 같다. 차라리, 인간미가 좀 더 남아 있는 곳이라면 시장 경제다. 굳이 말하자면 ‘자본 경제’와 ‘시장 경제’의 차이라고 할까?아, 대형마트와 시장을 비교해보면 내 말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Q. 결국 자본주의 사회는 그다지 바람직한 사회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내가 원해서 된 세상은 아니니까. 결국 힘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적응해가며 살 수 밖에 없다.”
Q. 기업은 어떤 곳인가?
“기업은 노동자를 필요로 한다. 나도 노동자고, 기업에 속해서 임금 받는 사람들은 결국 다 노동자다. 그러나, 기업은 노동자를 소모품 취급한다. 굉장히 모순된 거다.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우리를 소모품 취급하는데 기분이 어떻겠나. 그래도 이들은 나한테 임금을 주고, 어쨌든 나는 임금을 받는 입장이니까 이런 구조 자체게 뭐라고 할 수가 없다.”
Q. 노동조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난 원래 현대제철에 들어가려고 했었다. 거기엔 금속노조가 있다. 내 권리는 확실하게 보장 받는다. 그런데 삼성엔 노동조합이 없다. 노동조합은 필요하다.”
Q. 노동조합이 생긴다면 가입할 의향은 있나?
“노동조합이 생긴다면 가입할 생각이 있다. 그런데, 다른 기업이라면 내가 기꺼이 가입하겠지만 삼성이라서, 가입하기가 꺼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삼성의 입김이 있으니까. 내 앞 길이 막히니까. 어쨌든 먹고 살아야 할 거 아니냐. 돈 잘 벌고 잘 먹고 잘 살면 그게 최고다. 지금으로써는, 노동조합이 생긴다면 가입하진 않을 거다.”
Q. 민주주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사실 표 한 장 가지게 된 게 그렇게 크게 와닿지는 않는다. 당장 내 먹고 살기 바쁜데,뉴스에는 정치인들 더러운 이야기만 나오고, 투표하고 싶어지겠나. 일단은 내 권리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그런데 기업에서조차 내 권리가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소모품 취급 받는 마당에 무슨 민주주의인가.”
Q. 민주주의가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나?
“아니다. 어쨌든, 그렇게 민주주의가 생김으로써, 조금이라도 우리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출구가 생기지 않았나. 그러나, 지금 이런 식이라면 무력감만 느낄 것 같다.”
Q. 마지막으로,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점 몇 가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최고다. 민주주의에서는 사람이 주체다. 돈과 사람은 정말이지 모순된 거다. 어쨌든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다워지려면, 내가 먹고 살 문제 정도는 내가 해결할 수 있게 여건을 조성해줘야 한다. 취업은 안되고, 실업률은 높고. 이런 상황에서 무슨 민주주의인가. 국민이 힘이 있다곤 하는데, 난 내가 힘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국민이 진짜 힘을 가졌다고 느끼려면 저 썩어빠진 정치인들부터 우리 말 좀 듣게 해야 할 거 아닌가. 고칠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인터뷰를 진행하며 지인을 통해 만나본 민주주의는 늘상 자본주의와 함께 다녔다. ‘한국’이라는 공동체를 인식할 때, 지인은 언제나 ‘자본주의’를 먼저 꺼냈지, ‘민주주의’를 꺼내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어떤 가치가 더 중요하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지인분의 삶의 체험 속에 민주주의는 ‘아주 작은 출구’ 정도로 인식되고 있었다. 누군가는 우리에게 투표권이 주어졌으니 우리에게 힘이 생겼다고는 하지만 실상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꽉 막힌 세상에서 불만을 토해낼 수 있는 작은 출구’정도 밖에 안되는 셈이다.소위 ‘민주화’는 경제적 양극화로 인한 삶의 질 후퇴로 말미암아 거의 폐기 수준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지인 분은 시종일관 삶의 주체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하며, 민주주의 역시 이러한 주체의 올바른 발현을 통해 진정으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현 시대는 삶의 주체가 ‘나’ 자신이 아니라, 무언가에 끌려가는 ‘비주체적’ 삶이라고 하였다.
“내가 너무 건조해진 것 같다. 정신 없이 돈만 보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아등바등 했더니 정작 지금 와서 나를 돌아보니까 내 정신이 너무 메말라 있더라. 이게 사는 건가 싶기도 하고.”
문제는 다시 시스템으로 환원된다. 지인 분이 강조하신 부분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고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돈’으로 귀결된다. 최소한의 바람직한 사회가 되려면 ‘인간미’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지인 분의 생각이었다. 내가 내 삶 정도는 스스로 꾸려나갈 수 있게끔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인간다운 세상이다.
위르겐 하버마스 등을 위시한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세계를 양분했다. ‘생활 세계’와 ‘체계’로 나누고, 주체적 의지와는 상관 없이 주입되는 체계에 의한 생활 세계의 식민지화를 비판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지인 분의 생각과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다.지인 분은 돈에 의해 끌려다니는 생활에 불만족스러워 했지만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지만, 그 ‘필요성’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매여 있는 상황이었다. 올바른 사회에 대한 생각은 있지만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꺼려 했다.
지인 분께 세상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았다. 지인 분 역시 그에 동의했다.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것도 없거니와, 지금으로썬 절망 밖에는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일단 자신이 살기 급급했기 때문에. 결코 이것이 올바른 ‘민주주의’에 가깝지는 않을 것이다.
한 가지 결론점을 찾을 수 있었다. 민주주의가 삶의 양태로부터, 그리고 체험으로부터 발현된다는 것, 그리고 그 체험으로부터 우리의 민주주의는 갈수록 퇴보하고 있음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바꿔 말하면, 이는 민주주의를 급진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제 그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다. 더 올바른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가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할 때다. 민주주의가 우리 삶을 더욱 윤택하게, 그리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도록, 그리고 진정한 ‘힘’을 우리가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체험의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