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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그리고 약
게시물ID : today_5787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POCULASACRA
추천 : 8
조회수 : 186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7/07/03 19:06:25
약을 먹으면서부터 많이 괜찮아졌다.

마음이, 한 치의 여유도 없어 돌아가지 않던 망한 땅에서

이제 새로운 것들이 옮겨와 앉기라도 할 수 있게 된 정도로

많이 괜찮아졌다.

수 년 동안 쌓아만 왔던 온갖 버리지 못한 쓸모없는ㅡ분명 언젠가의 나에겐 요긴했던ㅡ것들이 방 안에 가득해지고 

반영적으로 내 마음에도 그렇게 발 딛을 틈 하나 없어진 지 오래였다.

더는 손을 쓸 생각도 마음을 정리할 기력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까지 가서야 나는 겨우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떠밀려 뭐라도 했다.

거부했던 약을 먹고 치료를 받고.

망설이고 감추었던 말들을 모두에게 쏟아냈다.

내뱉는 모든 말과 마음과 순간들이 솔직하다 믿었는데 실은 말하지 않음이 이미 솔직함과는 멀었다.

그 모든 솔직하지 못한 시간들이 남긴 나는 처참했고 삶을 모욕적으로 살고 있었다.

이제서야 겨우 정신이 조금 들어 방을 야금야금 치우고 있다.

정해놓은 분량도 없고 하다가 귀찮으면 대충 마무리를 빙자한 몰아넣기를 한 다음에 벌러덩 드러누워 버리는 게 다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조금씩, 까마득한 것들이 걷어지고 있다.

놀라운 한 가지는, 

내가 손을 댄 매 하루에 늘 새로운 사랑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언제나 사랑 속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었고, 사람들은 사랑 자체로서 나를 감싸고 나를 향해 멸을 모르고 빛을 쏘아 주었다.

알아먹을 순 없어도 그토록 좋아했던 물리학 수식과 풀이과정을 하얗고 반듯한 종이에 한가득 적어다 다 나를 주던 친구,

어릴 때 누나와 헤어져 아픔을 안고서도 나를 보고 내 누나라며 따뜻한 정을 나누어 준 깐죽이 녀석, 나는 얼마만큼의 용기가 있어야 그렇게 나를 자신의 누나라 불러줄 수 있는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

철없이 모진 모습이 멋진 줄로만 알던, 또한 아픈 시절에 다 되맞을 수도 없을 만큼 깊게 상처를 준 나에게 '사랑하고 사랑 받기를' 하며 따뜻한 카드와 선물을 보내 준 소중한 아이,

사회 초년생 때 아무것도 모르고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교대 때만 잠깐 마주치는 언니가 늘 메모로 이거 잘했더라 이거는 이렇게 하세요 보기 좋다 칭찬과 관심 애정이 가득한 대충 자른 전단지 뒷면을 활용한 메모들.

거의 웬만한 건 버릴 수가 없었다.

이건 이런 흔적이고 저건 저런 흔적이어서.

이제 약으로 잠시 눌러진 나의 감정 곧 기억들처럼 잠시 지워도 언제까지고 내 안에 나랑 함께할 것들을 다 버리는 중이다.

이건 참 이래서 못 버렸지 싶어서 별걸 다 싶으면서도 짠하고 그렇다.

나는 솔직하지 못했다.

다른 누구에게 다 솔직했다 해도 나 자신에게 절대로 솔직하지 않았다.

혼자 있는 시간이 유쾌하고 얻는 것이 많고 즐겁다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솔직한 말이었지만,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을 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말라죽고 말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그러고 살았다.

그렇게 살면서 내 주위를 둘러싸다 기어이 날 질식하게 만들 것들을 잔뜩 모아왔다.

그래서 나는 질식했고 삶의 응급실로 실려갔다.

너무 많은 것들에 마음을 쏟았고, 너무 많은 불안과 두려움에 가야 할 길보다 가지 말아야 할 길들에 집중했고 마땅한 곳에 충분한 힘을 쓰지 못했다.

두려움은 무엇이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할수록 남는 것은 두려움일 것이니.

방을 치우려고 손을 대는 순간마다 약을 먹는다.

사람들이 나에게 심고 내가 때맞춰 거두는 약으로 나는 매일 치유한다.

사랑이 사랑인 줄 지나고서야 알아 그 가치가 더한다 싶다.

앞으로는 오는 사랑을 절대 놓치려야 놓치게 될 수 없이 되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오래 전 많은 것을 나누던, 멀리 떨어져 있던 친구에게 몰래 쓰던 편지를 발견했다. 유학을 하던 친구였는데 귀국하는 날이나 그 며칠 다음 날쯤에는 주려고 했다.

총 아홉 칸의 빈 편지 중에 세 날, 세 칸이 차 있다.

그리고는 내가 돌연 그와 헤어졌다.

나는 아직도 그 나를 이해할 수 없지만 이건 내 마음의 영역 너머에 있는 어떤 행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생각했다.

분명 그 생각은 맞았다.

지금은 잠시만 내가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그 다음을 생각하기는 멈추었다.

1/3.

나는 어디쯤에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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