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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노비매매
게시물ID : history_1056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늙은국삵도
추천 : 15
조회수 : 1489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07/12 15:50:39
 
同日
訂主人李天
李日乃
筆執記官安有拜手 四十六
各各号牌現納白等節敎首奴
婢子買得時汝矣等訂筆隨
參眞僞現告亦推白敎是臥乎在
狀者介㖰曹丁伊處婢汗眞
丁丑生身一口後所生幷以准給
價買得時矣徒等果以訂筆各
各■■的只乎事
 
초사와 동일한 날짜에 작성된 문서로 향교 수노 개똥이에게 양인 조정이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여비 말단이의 후소생 한진이를 방매한다는 사실을 관에 고하여 공증을 얻고자 하니 이에 증인 이천과 증보 이일내, 필집기관 안유방이 각각 착서하여 작성한 문기로 후일 있을지도 모를 소유권 분쟁의 증거로 입안 작성에 있어 그들의 증언을 초사로 기록하여 남긴다 하고 있다.

노비의 생사여탈을 마음대로 한 시대가 조선시대라고 흔히들 알고 있습니다.
과연 그랬을까요?
위의 문서는 경상북도 영양군에 위치한 영양향교에 소장되어 있는 1731년에 발행한
노비매매 관련 초사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노비는 향교지기 노비 개똥이,
양인의 가솔노비 말단이,
말단이의 여식인 한진이,
 
총 3명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향교지기 개똥이는 관노비입니다. 즉, 향교운영에 있어 재정적, 인적 자원이 필요한데
향교가 건립되면 나라에서 관노비를 보내거나, 지정해 줍니다. 개똥이는 아마 죽을때까지 영양향교를
지키고, 향교의 토지를 관리하는 등의 잡역을 담당했을 것입니다. 나라의 노비니 만큼 그 누구도 그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없었을 것이구요. 또한 향교가 공립 학교이기에 실질적으로 개똥이가 영양향교에서는
실세 아닌 실세였을 겁니다. 수노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거든요. 향교가 학교니만큼 글도 왠만큼 알아야
향교일을 할테고, 향교에 있어 변이 있을 시에는 위에 보이는 것 처럼 관에 가서 보고도 해야하는 인물이니
일반 소사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다음으로 말단이. 말단이의 경우 자세한 인적사항이 없지만, 여식 한진이를 통해 어느정도의 유추가 가능합니다.
통상 여자 비의 경우 시기에 걸쳐 약간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자식을 낳는다는 장점으로 남자 노에 비해 경제적
가치는 상상이상이었습니다. (사극같은데서 노비를 우마 몇마리와 대비하는데 시기별로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노비의 가치가 훨씬, 그것도 아주 높습니다.) 죽이거나 때려서 앞으로 줄곧 노비를 양산해줄 비를 함부로 할까요?
결정적으로 문서에 적시한 부분을 보면 '...한진이와 후소생을 포함한다...' 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노와 달리 비는 그 후소생에 대한 명확한 소유권을 적시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끝순이라는 비를 누구에게 매매한다고만 하였을 경우는 끝순이의 자식은 원 주인댁의 노비로 귀속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생사여탈의 오류를 결정적으로 잡을 수 있습니다.
한진이의 경우는 후소생을 포함한다고 적시했으나, 예를 든 끝순이의 경우,
매득한 집안에서 열받아서, 혹은 끝순이가 얄미워서 죽였다!
그럼 끝순이 매매한 집안에서 바로 관가에 가 호소합니다.
후소생을 판 건 아닌데, 그 집안에서 우리노비의 대를 끊어놨다고 난리가 납니다.
 
한진이도 곧 소생을 가질 연령이었을 것입니다. 즉 가임여성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말단이와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향교에서 잡역을 담당할 노비를 매득할 경우, 비의 연령을 크게 따지지는 않으나
가급적이면, 가임기간이 넓은 비가 향교입장에서는 유리했을테니, 말단이 보다는
한진이가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었을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차치하고, 한진이가 향교의 비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사노비에서 공노비로 전환된 것이지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엄밀히 말해
처우는 더 좋아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 향교는 공립학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학교에는 여자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이 별로 없는 것이지요.
그저 유생들 밥이나 차려주고, 향사때 음식 정도만 하면 되는 것이니, 사가에 있을 때
보다 훨씬 처우가 좋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노비가 매매대상이 된 것을 현대적 관점에서는 비윤리적이고, 인간적이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지만, 다분히 당시의 개념을 설명드리기 위해 글을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의 문서는 공증을 거치는 개념을 포함하는 문서입니다.
다시말해, 조선시대에 있어 노비계층을 함부로 대하는 경우를 간혹 보시더라도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노비지만, 매매에 있어 증인도 필요하였고, 거기다 관의 공증도 거쳐야 했습니다.
이 문서는 초사라서 '소지'와 점철되어 있습니다.
즉, 소지(공증문서)가 있고, 그것을 관으로부터 한번 더 공증받는 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절차상에 있는 것을 기록한 것으로 두 문서가 함께 철로 되어 있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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