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시작되자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 습격, 무비월드 >
“자, 감독님도 한 말씀 하시죠. 이 자리의 주인공이신데.”
최 감독이 씩 웃으며 좌중을 돌아보았다. 그가 마이크를 내려놓자마자 그의 신작이 상영될 터였다. 솔직히 오늘의 시사회가 기대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영화 관람이야 둘째 치고, 나같은 무명배우한테 시사회 초청이라니. 최 감독의 전화를 받고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최 감독하고 일말의 접점도, 친분도 없는 사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 감독은 나를 직접 이 자리에 초대했다. 믿어지지 않지만.
나는 불편한 시선을 여기저기 던졌다. 분명 시사회에 초대받은 건데……. 이상하다. 주연 배우들 조차 참석하지 않은 시사회라니. 게다가 이 인원은 도대체 뭐지? 여기보단 유치원 학예회의 객석이 더 빽빽하게 채워진 느낌이다.
최 감독, 그가 괴짜로 유명하기는 해도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 그의 이름 옆에는 늘 ‘흥행’이란 단어가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게다가 최 감독은 이미 처녀작 때부터 해외 유명 영화제에서 각종 부문의 수상을 휩쓴 경력이 있었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최 감독의 신작 시사회인데, 겨우 이 인원밖에 안 왔다고? 그걸 믿으라고?
나와 마찬가지로 불편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왕진이. 그녀는 여배우 최초로 남자배우의 몸값을 앞지른 톱스타였다. 그것도 한때지만. 공백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출연료는 점점 곤두박질쳤다. 4년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선 어떻게든 흥행작 주연 자리를 꿰차야했다. 그녀는 지금 콧대 세울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없을 거다. 똥줄이 바짝 탈 테니까. 왕진이가 최 감독 도움을 받아서 헐리웃에 진출하고 싶어서 안달 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오늘 보니 사실이었구만.
그래, 좋다 이거야. 귀빈만 초청해서 여는 비공개 시사회라고 좋게좋게 생각하자고.
그런데, 기자는? 기자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감독도 아니고 최 감독이었다, 최 감독. 굳이 초대하지 않아도 스스로 냄새를 맡고 찾아올 그들이었다. 그런데 단 한명도 없다니. 이건 고의적으로 출입을 통제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왕진이의 옆 옆자리에 조각미남 원만이 앉아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유명 아이돌 출신이 앉아있다. 어? 그러고 보니 배우, 배우, 배우……온통 배우들밖엔 보이지 않는다. 얼굴이 낯선 사람들은 아마 나처럼 잘 안 알려진 배우일 테지. 꿀꺽. 침이 목울대를 건드린다. 뭐야, 여긴? 최 감독 저 작자 뭐하자는 플레이야? 이유모를 불안함이 발바닥을 살살 간질여댔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조명이 꺼졌다.
예고도 없이 불을 꺼버리다니, 어지간히 무례한 게 아니다. 심지어는 가볍게 비명을 지르는 여자도 있었다.
우울한 노랫소리가 먼저 귀를 자극했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느리고 기괴한 노래였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그 곡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불빛 하나 없는 곳에 앉아서 이상한 노래를 듣고 있으려니 솜털이 쭈뼛 서는 것만 같았다.
얼마뒤,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어둠에서 해방됐다. 스크린에 빛이 담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좋아할 건 아니었다. 첫 장면부터 피가 낭자했으니까. 사람을 물어뜯고 있는 건 좀비였다. 좀비 영화라니. 의왼데? 아니, 그보다 알려지지 않았던 게 더 의외였다. 좀비라면 환장하고 달려들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대한민국 관객들은 좀비 영화에 목말라 있었다.
영화는 식상하지만 식상하지 않게 흘러갔다. 저 내용을 가지고 잘도 요리하는군. 과연 최 감독다웠다.
바로 그때.
얼굴에 물기가 느껴졌다. 축축한 게 느껴졌다.
거대한 스크린 속에선 좀비의 학살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뺨을 손으로 문질러 닦았다. 반사적인 행동이었을 뿐이다.
물인가 싶었는데 붉다. 빨갛다. 그리고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건 피다. 피……?
“꺄아악!!!!!!!”
왕진이의 목소리였다.
“으아아악!!!!!!!!!!!!! 저, 저리가!!”
그녀뿐이 아니었다. 앞자리에 앉은 이들 전부가 기겁하며 도망치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관 의자의 구조 특성상 마음대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끝자리에 앉은 몇 사람을 제외하곤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건진 알 수 없었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일단 일어서서 뒤로 달리기 시작했다. 비상구가 어디였는지 기억할 리가 없다. 그저 뒤로, 뒤로 뛰는 거다. 앞자리에 앉지 않았던 걸 위안 삼으면서.
누군가 내 팔을 붙잡았다. 커다란 눈망울. 매력적인 긴 생머리를 가진 그녀가 내 팔에 매달려 있었다. 왕진이, 콧대 높은 톱스타께서 말이다. 그녀의 얼굴은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사, 살려…….”
“앞에 무슨 일이에요? 도대체.”
왕진이는 대답하려고 했다. 그러나 말할 수 없었다. 그녀 뒤에 서있던 남자의 머리가 부욱 뜯겨져 나갔으니까. 눈앞이 피로 물들었다. 온통 피, 피 밖에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찢어발긴 범인은 좀비였다. 조금 전까지 스크린 속에서 지들끼리 치고받고 하던 좀비.
쾅쾅쾅!!!
“시발, 이거 안 열려!! 꿈쩍도 안한다고!”
식은땀이 차올랐다.
“군비리 새끼가 그렇지 뭐! 이리 나와!!”
“뭐 이 새끼야?!”
“꺼져. 알짱대지 말고. 다 뒈지게 만들 심산이야?”
아니, 저 병신들이 왜……지금 저 지랄이란 말인가.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 솔직한 심정으로는 두 놈의 면상에 주먹을 한방씩 먹이고 꺼지라고 외치고 싶었다. 십여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출입구에 매달려서 몸을 부딪쳤다. 그러나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도 얼른 합세했지만 소용없었다.
쾅쾅!!!!
쿵!!!
쿵쿵!!!
“꺄아악!!!!!”
또 왕진이, 그녀였다.
왕진이가 소화기를 들고 있었다. 분명 비상용으로 비치돼있었을 소화기였다. 그 소화기를 무기 삼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녀린 팔뚝으론 변변한 위협조차 불가능했다. 좀비는 술래잡기 하듯이 왕진이를 바짝 추격해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수차례의 실패 끝에 텅!! 하는 타격음이 울렸다. 제대로 먹혀들어갔던지 좀비가 그대로 고꾸라져버렸다. 그리고 다음순간 왕진이가 쓰러진 좀비를 향해 돌진했다.
퍽! 퍽! 퍽!
“죽어, 죽어!!”
그녀는 머리를 집중해서 내려쳤다. 소화기가 한번씩 아래로, 위로 솟구칠 때마다 파편과 함께 피가 튀었다. 좀비는 사지를 부르르 떨더니 어느 순간부터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분이 안 풀리는지 몇 차례 더 소화기를 휘둘렀다. 좀비가 측은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게 얼마짜리 협찬인줄 알고……아 썅……하필 오늘…….”
퉁!
그녀는 사용을 끝낸 소화기를 집어 던지고 무릎을 폈다. 그녀가 문을 향해 걸어오자, 그녀의 괴력을 목격한 이들이 주춤주춤 길을 터줬다. 그녀는 몇 번 주먹으로 문을 두드려 보더니 의외로 빨리 포기했다.
“밖에서 잠근 거네.”
그 즈음, 실내를 가득 채우던 비명소리가 거의 사라져 있었다. 애초에 좀비가 몇 안됐다는 의미일 테지.
사태가 어느정도 진정되고 있었다.
짝짝짝짝!!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 주위로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남자가 서있었다. 최 감독이었다. 우리를 이 장소로 불러들인. 그는 롱테이크 촬영이라도 끝마친 것처럼 가뿐한 얼굴로 서있었다.
그 순간 조명이 환하게 들어왔다. 실내의 처참함에 나는 눈을 찡그렸다.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내장이 튀어나온 사람, 목이 뜯긴 사람, 그리고 왕진이가 짓이겨놓은 좀비의 시체까지. 붉은 카펫 위로 붉은 피가 덧입혀져 있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최 감독. 당신 미쳤어? 돌았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야. 당장 문 안 열어?! 감독 인생 끝내고 싶어??!!”
일본에서만 음반 몇 백 만장을 팔았다는 모 배우가 으름장을 놓았다.
타앙!
총성이 울렸다.
“!!!!!!!!!!!!”
누군가 풀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쓰러지는 소리였다.
조금 전에 으름장을 놓은 배우였다. 그는 미간 사이에 총알이 관통당해 있었다. 그리고 총을 들고 있는 사람은 최 감독이었다.
“제가 말하고 있잖아요.”
“………….”
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우리를 만족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여기 계신 여러분은 오디션에 참가 희망을 내비치신 분들입니다. 제 차기작의 주연을 정하는 오디션에요. 아주……노골적으로 희망을 내비치신 분도 저기 보이는 군요. 강도야 다르겠지만, 공통점은 제 작품에 관심을 보인 분들이라는 겁니다.”
노골적이란 대목에서 왕진이가 입술을 깨물며 눈가를 붉혔다.
“저는 늘 공평해요. 누가 더 예쁘고, 누가 더 말 잘한다고 해서 기회를 더 주고 더 뺏고 그러지 않거든요.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오디션에 참가한 것처럼 최선을 다해서 열정을 증명하시면 됩니다. 아까 그 익살맞은 좀비 친구들은 예선경기였어요. 고작 그 정도 시련도 못이기는 배우는, 솔직히 별로 아닌가?”
짝짝!
그가 얼어붙은 우리에게 활력을 불어 넣어주려는 듯 박수를 쳤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단순하니까. 여러분은 지금 제가 만든 영화 속 세계에 와있습니다. ‘어떻게?’ 라는 의문은 접어두세요.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니까요. 테스트를 무사히 통과하면 되는 거예요.”
그때 누군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마치 선생님한테 질문하는 학생처럼.
최 감독은 인자하게 웃으면서 “네, 질문하세요”하고 발언을 허락했다.
“혹시, 서바이벌입니까? 한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죽고 죽이는…….”
“에이, 그건 식상하잖아요. 더 이상 새로울 게 없어. 그리고 저는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 냉철한 판단력을 가진 배우를 캐스팅할 계획이거든요. 이건 일종의 두뇌 싸움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약간의 운이 필요한. 여러분은 이 영화를 끝마치기만 하면 돼요. 저라고 여러분과 영원히 노닥거릴 순 없는 거잖아요? 이 영화의 엔딩을 볼 때 까지만 잡아둘 거예요. 그러면 영화의 엔딩이 가장 빨리 볼 수 있는 방법이 뭘까요.”
“……주인공이 죽는 것…….”
내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최 감독이 번뜩이는 눈으로 나를 주시했다.
“그래요. 여러분은 주인공을 죽이면 되는 거예요. ‘주인공만’ 죽이면 다 끝, 엔딩! 누가 주인공이냐구요? 하하. 그걸 알려드릴 순 없죠. 그러면 모처럼 귀빈을 초청한 보람이 없잖아요. 힌트를 드리자면, 여러분 중에 누구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말했듯, 저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기회를 주고 있으니까요. 그 점만 유의하시면 돼요. 에이, 뭘 울고 그러세요? 과연 눈물의 여왕답네요. 어려운거 아니잖아요. 운이 좋다면 딱 한발만 쏘고도 풀려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반대로 말하면, 최후의 일인이 남을 때까지 계속될 수도 있는 거지만.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이 나라에서 내노라하는 대표 배우들 아니겠습니까? 행운의 여신은 이미 여러분 곁에 머물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너무 염려들 마시고. 자자, 그만 울라니까요? 이건 신파가 아니에요. 보고도 모르겠어요? 애송이들처럼 제발 이러지 말아요. 아마추어도 아니고. 오디션 처음 참가해보는 것도 아니잖아요. 잠깐. 거기 두 분.”
최 감독이 말을 멈추고 뒤쪽을 지목했다. 아까 투닥거리며 언성을 높였던 남자 배우 두 명이 그곳에 있었다.
“스릴러 영화의 빛나는 두 주역께서 도망치려 하시다니, 그러면 곤란하죠. 이탈자가 발생할 시에 범인이 얼마나 위협적으로 변하는지 잘 아실 텐데요.”
그가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권총이었다.
“그럼 시작합니다. 누가 먼저 쏘시겠어요? 총은 두개밖에 없답니다. 서둘러 주세요.”
“………….”
“………….”
뚜벅. 누군가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유달리 긴 다리, 떡 벌어진 어깨, 공허해 뵈는 두 눈. 인기배우 민우성이었다. 그가 총을 가지고 유유히 사라지자 남은 총은 이제 하나. 남자들의 눈이 번들거리며 빛났다.
최 감독이 손을 놓았다. 그의 손에서 떨어진 총이 의자 밑으로 굴러들어갔다.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달려들었다. 그 광경은 마치 시구장의 파울볼을 잡으려는 사람들 같았다.
그리고 그 모습은 카메라 안에 고스란히 녹화되고 있었다. 곁에 서있던 왕진이가 최 감독을 노려보며 경고하듯 말했다.
“찍으려거든 똑바로 찍어. 난 왼쪽 얼굴이 더 예쁘게 나오니까.”
* * *
아비규환.
그것 외에 다른 말이 더 필요할까?
죽고 죽이고, 뺏고 빼앗기고.
가장 먼저 살해당한 건 연기파 배우 김 모씨였다. 그는 늘 주연이었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배우라면 누구나 선망할 만큼 좋은 작품들로 반짝반짝 빛났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가장 먼저 죽음을 맞이했다. 모두 최감독의 말 때문이었다.
‘주인공을 죽여라.’
그래도 무명배우보단, 유명배우 쪽이 주인공일 가능성이 크지 않겠는가.
덕분에 늘 주연을 차지했던 이들 네 명이 가장 먼저 저세상으로 떠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람들이 살기를 원흉인 최 감독에게 돌렸을 땐, 그는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어떻게 빠져나간 걸까? 모든 출입구가 막혀 있는데. 비밀 문이라도 설치돼있는 건가?
타앙!
또다시 총성이 울렸다. 벌써 몇 번째 총성인지 모르겠다.
총성의 여파가 걷힐 즈음 민우성의 몸이 천천히 쓰러졌다. 두 명이 그의 총알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운 좋게 살아남은 한명은 허벅지를 부여잡고 쓰러져 있었다.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아마 이 말도 안 되는 영화의 엔딩을 보기 전에 과다출혈로 사망하겠지.
그때 왕진이가 재빨리 달려가 민우성이 떨어뜨린 총을 낚아챘다. 그녀가 척, 총구를 들어 올렸다. 총구는 순박해 뵈는 인상의 남자를 겨누고 있었다. 그는 나처럼 알려지지 않은 배우였다. 왕진이와 남자, 그리고 나. 이 세 명이 남은 생존자였다. 무명에다가 퇴물. 아무도 배역을 줄 것 같지 않은, 이 장소에서 소외됐던 사람들.
그가 비죽 조소하며 말했다.
“민우성. 그 자식이 총 몇 발을 쏘았지? 왕진이 씨한테는 너무 어려운 산수문제인가?”
“이……!!”
철컥.
철컥. 철컥. 철컥!!
그의 예상대로였다. 왕진이가 겨우 손에 넣은 총은 빈총이었다. 총이란 무기는 아주 위협적인 물건이었지만 총알이 없다면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우리들 중에 주인공이 있다고. 하, 참……이걸 기뻐해야 되는 건지, 슬퍼해야 되는 건지…….”
“당신은? 당신은 몇 발이나 남았지?”
“두 발. 당신들 둘을 죽이기엔 충분하죠.”
왕진이가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종아리를 가볍게 감싸던 길이의 디자이너 드레스는, 군데 군데 찢어져 있었다. 피투성이에 옷차림도 엉망이었지만 보기 싫지 않았다. 오히려 여전사 같았다.
내가 무기라곤 왕진이가 쓰고 버린 소화기가 다였다. 둘이서 나를 죽이려고 총을 들이대면 꼼짝없이 죽어야 되는 상황이었다. 누가 이기든 상관없었다. 둘 중 하나가 주인공이길 바라는 수밖에.
그때였다.
총이 허공을 날았다. 총알이 아니라 총이. 왕진이가 총을 집어 던진 것이다.
정말, 눈이 의심되지만 그녀는 돌팔매질을 하듯이 냅다 집어 던졌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에 명중시켰다.
“윽!”
다다다다!
그리고 재빨리 뛰어가서 남자가 놓친 총을 집어 들었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됐다. 그녀는 꽤 능숙하게 탄창을 빼서 확인했다. 전에 형사 역할을 했던데 그때 헛배운 건 아닌 모양이다.
“아씨, 한발밖에 안 남았잖아.”
남자가 주저앉은 채로 상체만 일으켜선,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광기가 엿보였다. 그는 배를 잡고 한참동안 웃었다. 꼭 미친놈처럼. 하기야 왕진이나 나나 미치긴 마찬가질테지. 여기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왕진이가 손을 까딱거렸다.
“이리로 와요. 당신은 내 편이죠?”
“……이왕이면 미인 손에 죽는 게 낫겠죠?”
나는 얼른 왕진이 옆으로 가서 섰다.
“확실한 거예요? 최 감독이 나를 주인공으로 정했을 리는 없거든. 그리고 솔직히 당신 얼굴 처음 봐요. 쉬는 동안 영화 드라마 안 가리고 다 봤는데 당신처럼 생긴 배우, 단역이래도 보지 못했어. 반면에 저 남자는 연극판에서 꽤 유망하거든.”
“………….”
“죽여요.”
“네?”
“가서 죽이라고. 총알은 한발 뿐이야. 그러니 가능성이 큰 쪽부터 없애자구요. 동의하죠?”
“……이 소화기로 내려치란 뜻입니까?”
“쪼다처럼 굴기는. 대가리를 부셔요. 멱을 따버리든가!”
그래. 쪼다처럼 굴지 말자.
무명인 것도 서러운데, 여기서 개죽음 당하지는 말자.
나는 남자에게 뚜벅뚜벅 다가갔다. 남자는 주춤거리며 나를 경계했다. 나는 소화기를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털썩 의자에 주저앚아 버렸다.
“당신 뭐하는 거야? 살고 싶은 마음이 있어?”
“이 사람이 좀비도 아니고. 멀쩡한 사람인데……난……그렇게까지 살고 싶은 마음 없습니다.”
“하! 마음대로 해요. 이 남자가 주인공이길 바라자구요. 그렇지 않으면 다음 차례는 당신이니까.”
여자가 권총을 브래지어 속으로 집어 넣었다. 봉긋한 가슴이 훤히 드러났지만 색욕은 들지 않았다. 이 상황에 발정하면 그게 개지, 사람이냐. 화난 기색으로 다가온 왕진이가 내게서 소화기를 뺏어 들었다. 그리고 남자에게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남자는 포기한 듯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마치 단두대의 칼날이 내려오기 기다리는 사람처럼.
왕진이가 소화기를 힘껏 치켜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쿵!!
그녀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남자가 한 짓이었다. 왕진이의 발목을 잡아챘다. 방심하고 있던 왕진이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박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깨진 머리통에서 피가 흥건하게 흘러나왔다.
“시발……언제까지 죽이란 거야.”
남자가 일어나고 있었다. 자기 몸을 깔아 뭉갠 왕진이의 몸을 치우면서.
그가 가장 먼저 할 일이 뭔지 알고 있었다. 브래지어 속에 숨긴 총을 찾는 거겠지.
나는 냅다 뛰었다.
그리고 소화기를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죄책감이니 양심이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퍼억!
수박이 쪼개지는 듯한 소리가 손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두 번 더 소화기를 휘둘렀다. 남자는 세 번을 맞고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헉헉 거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제 필요하지도 않겠지만 왕진이의 가슴골로 손을 집어넣고 권총을 끄집어냈다.
“……허억……허억…….”
들리는 거라곤 내 숨소리밖에 없었다.
살아……남았다.
난 살았어.
수많은 시체가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중에 특히 왕진이의 부릅뜬 눈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살아남았다는 성취감이 죄책감을 무디게 만들었다. 이제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건가? 살인죄로 경찰에 연행되는 건 아니겠지? 나도 피해자인데.
짝짝짝짝!!!!!
짝짝짝!!!!!
“브라보!!!”
빌어먹을 최 감독, 그 새끼였다.
언제 나타났는지 최 감독이 박수를 치고 서있었다.
“최후의 일인이네요! 축하해요. 하지만 아쉽네요. 일이 이렇게 돼서.”
너무 많이 죽었다. 너무……많이.
최 감독, 저 정신병자의 목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는 출입구로 걸어갔다.
이제 다 끝이다. 나는 살아남은 거다.
“……?”
그런데. 문이 열리질 않았다.
쾅쾅쾅!
문은 여전히 꽉 잠겨 있었다. 밀어도, 두들겨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유감이에요. 처음부터 머리를 썼다면 금방 끝낼 수 있었을 건데. 아무리 기회를 공평하게 준대도, 무명의 경험없는 배우를 내 시사회에 초청할 리가 없잖아요. 이유와 목적이 있다면 모를까.”
“……너……!”
“당신을 눈여겨보고 있었어요. 대학시절 극단에서 연기할때부터. 그것만은 알아줘요. 이런 결과를 의도했던 게 아니란 걸.”
그가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 모르겠다.
뭐? 뭐라고? 나를 초청한 목적이 뭔데? 이유가 뭔데?
“약속이 틀리잖아. 왜 내보내주지 않는거지? 넌 역시 싸이코, 또라이 새끼였을 뿐이야. 입만 나불댈줄 아는.”
“아직 영화는 끝나지 않았어요.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영화를 끝내라고. 그리고 당신이 대답했죠, ‘주인공을 죽여라’”
“…………!!!!!!!!!”
생존자는 나.
나 혼자밖에 없었다.
주인공을 죽이지 않으면 이 영화는 끝나지 않는다. 언제까지고 여기서 저 놈한테 농락당하는 수밖에.
이 영화를 끝낼 수 있는 열쇠를 쥔 주인공은 나였다. 감사하게도. 내가 주인공이었던 거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던 내가…….
지금 나더러 자살이라도 하란 건가?
“하, 하하하하!”
그는 박장대소하는 나를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그의 손에는 카메라조차 없었다. 빈 손으로, 실망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뚝 웃음을 멈추고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한걸음, 두걸음……걸을 때마다 미치광이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바로 코앞까지 걸어가서야 멈춰섰다. 그는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고 있었다.
“당신 말대로 다들 머저리에 병신이지. 머리는 그저 장식이야. 근데, 그건 당신도 똑같아. 저기 나뒹구는 놈들하고 수준이 똑같다고. 그거 알아? 영화를 끝낼 수 있는 방법은 주인공을 죽이는 것 말고도 또 있다는 거.”
스윽.
나는 총을 들어서 감독의 이마에 갖다 댔다.
바로 밀착된 상태였기 때문에 총구를 당기면 즉사하리라 확신했다.
“감독을 죽이는 것.”
나는 호흡을 멈추고 손가락을 바짝 당겼다.
“그러니까, 제발 뒈져버려. 개새끼야.”
타앙!!!
총이 불을 뿜었다.
* * *
“싸인 해주시겠습니까?”
“네, 주세요.”
나는 종이를 건네받았다.
펜을 뽑아 들고 휘리릭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남겨두고, 문득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그는 전에 없이 앞머리를 내리고 뿔테안경을 쓰고 있었다. 상처를 가리기 위해서였다. 나는 저 앞머리를 까뒤집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분명, 분명히 관통했을 텐데.
내가 쏜 총알이 최 감독의 이마 정중앙을 관통하던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달콤한 탄성을 내질렀을 뿐.
‘아아……!’
그는 총알에 머리를 관통당한 주제에 빙긋 미소 짓고 있었다.
‘내가 원하던 배우는 바로 당신 같은 분이었습니다!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단 게 증명되어 기쁘군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가 내 손을 붙잡고 앞장 섰다. 출입구가 점점 다가왔다.
벌컥.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린 것이다.
너무나 쉽게, 한번의 손짓으로 문이 열렸다. 그렇게 해도 안 열리던 문이.
바깥 공기가 느껴지자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바로 기절했던 것 같다.
“아시다시피 이건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이 작품으로 당신을 톱스타로 띄워놓고 말겠어요. 그리고 확정된 건 아니지만, 어쩌면 헐리웃 제작사하고 합작하게 될지도 몰라요. 어떻게 얘길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이 바닥 소문 잘 퍼지는 거 알죠? 그쪽에서도 긍정적으로 검토중이라니까, 우리도 기대해봅시다.”
최 감독은 웃음이 만연한 얼굴로 이런 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다.
나는 싸인을 끝마친 종이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그건 계약서였다. 계약서의 내용은 그의 차기작에 반드시 출연하겠다는 것과, 그날 일에 관해 누설하지 않겠다는 거였다. 잠자코 싸인을 하긴 했지만 최 감독에 대한 증오는 여전했다. 하지만 나한테 저 어마어마한 작품을, 프로젝트를 거절할 강단이 있을까?
며칠 뒤, 그가 비행기 표를 내밀었다.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한 걸 칭찬해주는 것처럼.
헐리웃 제작사 측에서 나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단다.
먼저 미국에 가서 기다리고 있던 최 감독은 내가 도착하자마자 누군가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삼십대로 보이는 금발의 여성이었다.
제작사 대표인가? 최 감독이 내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나하고 공동 메가폰을 잡을 감독이에요. 편하게 앨리스라고 부르세요. 한국판하고 미국판, 두 버전으로 무대를 달리해서 따로 제작할 계획인데……어떤 것 같아요?”
“좋은 것 같습니다. 신선하네요.”
“다행이네요. 아참 그리고 내가 급하게 오느라, 혼자 와서 그런데, 오후에 나 좀 도와주겠어요? 여기 배우들 하고도 눈도장 찍고.”
“무슨 일을 도와드리면 됩니까?”
최 감독은, 사교파티에 참석해 주면 된다고 했다.
일정 때문에 자기가 못 갈 것 같으니 내가 대신 가서 참석해 주기만 하면 된다고.
파티장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와,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촌스러워 보여도 어쩔 수 없었다. 영화에서 보던 배우들이 내 앞을 걸어 다니고 있었으니까. 내가 존경하는 배우가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나는 월드스타가 될 수 있을까? 아메리칸 드림을 꿈꿔도 되는 건가?
그때 마이크를 잡은 누군가가 말하기 시작했다. 희한하게도 그가 서있는 곳만 벽이 흰색 이었다.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팟!
갑자기 불이 꺼졌다.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자리를 이탈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벤트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유도 없이 소름이 쭈뼛 끼치기 시작했다.
이 상황이 어딘가 익숙했다. 왜 익숙한 거지? 데자뷰인가?
그리고 곧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우울하고 음습한 노래가 고요한 홀을 울려댔다. 노래 역시 낯설지가 않았다.
여전히 불은 꺼져 있는 상태였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노래가 끝나기를 꼼짝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동으로 제작될 거예요.’
‘주인공이 두 명 필요하니까.’
“!!!!!!”
공동제작, 두 명의 주인공…….
마이크를 쥔 놈이 서있던 곳은 흰색 벽이 아니었다.
스크린이었다.
이건 사교 목적의 파티가 아니었다.
한쪽 벽면을 차지하는 스크린 위로 광활한 우주공간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좀비 따위가 아닐 것이다.
주마등처럼, 그간 보아온 SF물의 괴물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나는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미친놈처럼 뛰어가며 씨발, 좆발, 가릴 것 없이 육두문자를 내뱉기 시작했다.
쾅쾅쾅!!!!!
문이 열리지 않는다.
아주 익숙한 상황이었다. 꿈에서도 못 잊을.
“야 이, 개새끼들아!!!!!!”
푸른 눈의 배우들이 나에게 찌푸린 시선을 보낸다.
그러나 그들도 곧 나처럼, 아니 나보다 더 처절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불과 몇분만에,
그곳은 지옥으로 변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