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단편] 특명 : 냉장고를 유기하라
게시물ID : panic_5278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뿡분
추천 : 20
조회수 : 231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7/16 11:01:57
(전에 상, 중 올렸던 거랑 같이 합쳤습니다.
  하편이 많이 늦어져서 상, 중, 하 한편으로 같이 올립니다)
 
 
 
 
 
< 특명 : 냉장고를 유기하라 >
 
 
 "냉장고가 고장났어."
 
 나는 멍하니 신음을 내뱉었다. 응당 내 뱃속은 물론 뼛속까지 시리게 만들었어야 했을 생수는 뜨끈미지근했다. 생수를 담았던 입속은 설탕물을 머금은 것처럼 미적지근했다. 나는 침착을 유지하면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냉장고의 전원 코드를 뽑았다가 꼽았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고장나버렸다고....어쩌지?"
 
 요며칠, 밤이면 이상하게 잠이 잘온다 했다. 그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한다. 이놈의 수명이 슬슬 다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 지경이 된데는 무관심이 첫째 잘못이요, 돈 아낀다며 중고 냄장고를 산 쓸데없는 절약정신이 둘째 잘못이었다.
 
 나는 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지 손톱이 앞니 사이에서 부서져나가고 있었다. 붉은 속살이 드러나 미간을 찡그리게 했지만 멈출수가 없었다.
 다리를 떠는 정도로는 이 초조함을 반감 시킬수가 없었던 것이다.
 몇번의 신호음이 지나고 태준이 전화를 받았다.
 
 [왜?]
 
 용건만 말하라는 식이었다. 싸가지없는 놈, 하고 중얼대면서도 썩은 동앗줄을 잡는 심정으로 전화통에 매달린다.
 
 "냉장고가 안돌아가."
 [그래서, 어쩌.......!!]
 
 놈이 화들짝 놀라는 것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심드렁하던 목소리는 다급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럼 냉동실도 고장났단 거냐?]
 "우리집에 있는 건 싸구려 중고 냉장고라고. 냉장하고 냉동 쪽이 분리될리가 있겠어?"
 ['그거' 확인했냐?]
 "냉동실은 열어볼 엄두도 안나."
 [녹으면 냄새날텐데. 2년이나 된건데....]
 
 녀석이 읊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여전히 잠잠하기만 한 냉장고를 바라보았다.
 이때 기적이라도 일어나 탈탈탈...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기를 기도했으나,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제길, 어쩌다가...네놈의 가난한 자취방에 맡기는게 아니었는데!!]
 "그래서 말인데 아이스박스 하나 얻어다가 너희집으로 옮기는게 어떨까?"  
 ['그걸'들고 어떻게 오려고? 버스를 탈거냐, 택시를 탈거냐??]
 "낚시 조끼를 하나 얻어가지고 낚시 갔다오는 길이라고 연기하는 거야."
 [터미널 부근도 아니고 도심 한복판에서? 나 의심스런 놈이에요, 광고를 해라 아주.]
 
 "그럼 어쩌라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핸드폰을 고쳐 잡으면서 비장한 목소리로 마지막 패를 꺼냈다.
 
 "수산시장에 가서 생선 대가리를 떨이로 좀 얻은 다음에, 냄새를 없애고 택시를 타는 거야. 택시기사는 생선 썩은내가 난다고만 생각하겠지. 어때?"
 
 [그만 좀 얻어! 거지새끼도 아니고, 원.]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부자인 줄 아냐."
 
 빈정이 상해서 이죽거리고 말았다.
 그때 전화 너머로 "태준씨, 이리 와봐요"하고 녀석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부터 잘나가는 기업에 입사하기로 보장받은 녀석은 한창 근무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언제 퇴근하냐?"
 
 [퇴근하고 바로 그쪽으로 간다. 그때까지 쓸데없는 짓하지 말고 얼음이라도 구해서 채워놔.]
 
 그렇게 말하고도 못미더웠는지, 태준이 다시 경고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마!]
 
 그 말을 남기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너덜너덜해진 오른쪽 손톱을 입에서 빼고 천천히 일어났다.
 우선 창문을 꼭꼭 닫았다. 분명히 냄새가 고약할테지만 이웃의 소문내기 좋아하는 아주머니가 눈치챘다간 골치아파지니까.
 집 구석구석을 뒤져서 신문지를 찾아 냉장고 앞에 펼쳐놓았다. 내 나름의 대비였다. 고작 그걸 움직인 것만으로도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긴장감 때문에 땀이 두배는 더 흘렀다. 땀이 송글송글 맺힌 이마를 쓱 닦았다. 더위를 참지 못하고 선풍기를 끌어다가 작동시켰다.
 그러나 뜨거운 바람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냉동실 문에 손을 댔다. 평소 틈새로 느껴졌던 냉기는 확실히 느껴지지 않았다.
 내 불길한 예측대로 냉동실마저 고장난게 확실했다.
 침을 꿀꺽 삼켰다.
 침이 목울대를 지나는 순간 냉동실을 한번에 팍 열어젖혔다.
 그리곤, 
 
 탁!
 
 곧바로 닫아버렸다.
 
 "헉.....헉....."
 
 이마에 맺힌 땀이 비처럼 흘러내렸다.
 
 태준의 불길한 예측역시 맞아들었다.
 녹아 있었다.
 2년동안 잠잠하게 내 자취방의 냉동실에 잠들어 있었던 놈의 머리가,
 흉측하게 녹아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치미는 토기를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변기통을 붙잡고 머리를 박았다.
 
 "우욱!"
 
 위 속에서 찰랑거리고 있던 미적지근한 생수가 역류해 변기를 온통 적셨다.
 2년간 잘도 먹고 마셨는데. 새삼 그동안 먹었던 것들이 놈의 머리가 들어있는 냉장고 속에서 꺼낸 것들이란 자각이 들었다.
 그게 역겨워서 다시 머리를 박고 구역질을 했다.
 
 역겨울망정 
 죄책감은 없다.
 
 최민섭은 악인이었으니까.
 
 그런 놈 때문에 우리가 감옥에 갈 이유는 없었다. 우리의 행동은 분명, 정당방위였으니까.
 하지만 경찰이 믿어줄지는 의문이었다.
 
 나는 물이끼가 가득한 화장실 타일에 털썩 누워버렸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으나 일어날 기력이 없었다.
 
 그러다 태준의 말이 떠오른다.
 
 "얼음....얼음을 어디서 팔더라?"
 
 나는 언제 힘없이 누워있었냐는 듯 발딱 일어나서 옷을 주워입었다.
 그리고 사야할 목록에 방향제를 올렸다. 심적인 영향인지 냉동실에서 흘러나온 냄새로 온 집안이 고약한 냄새로 가득한 것 같았다.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똑바로 걸으려고 노력하면서 편의점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최민섭의 몸의 일부는 전국 곳곳에 흩어져 유기되었다. 2년전, 우리는 심야 열차를 타고 무작정 떠났다. 우리의 손에는 묵직한 가방이 들려져 있었고 가방 안에는 냉동포장된 최민섭의 손이나 다리 따위가 들어 있었다. 덜컹덜컹 열차가 흔들릴때마다 가방이 달아날까 싶어 다리를 오므렸다. 태준은 옆에서 나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나 역시 그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가시돋힌 시선을 이해했다. 우리는 애초에 친한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연주라는 공통점이 없었더라면 평생 모른척 하고 살았을 터였다.
 
 목적지는 여행자들이 주로 찾는다는 관광명소가 대부분이었다. 괜히 인적이 드문 으슥한 곳은 피했다. 어느집에 누가 사는지 빤히 아는 시골 동네를 어슬렁거렸다간 목격자만 만드는 셈이었으니까. 내 잦은 여행에, 어머니가 넌 어떻게 사진 한장 찍어오질 않느냐고 타박했다. 태준과 나는 여행을 빙자한 유기의 길을 걷고 있었다. 경치가 눈에 들어올리 없었다. 그 사정을 알리 없는 어머니는 자기도 산중에 있는 큰 절에 한번 다녀오고 싶다고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전국 순회가 끝나고 나니 남은 것은 머리였다. 머리는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염산에 녹인다든지 믹서기로 갈아버린다든지 하는 잔인한 방법까진 쓰고 싶지 않았다. 태준과 나는 가위바위보로, 누가 최민섭의 머리를 보관할지를 정했다. 참으로 안일한 결정이었지만 당시로서는 그게 최선으로 여겨졌다. 마침 토막살인으로 전국이 들썩거리던 시기이기도 했고, 다른 부위면 몰라도 머리는...살갗과 조직이 썩어서 백골만 남았더래도, 남은 치열로도 신원을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었다. 적어도 우리가 보아온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그랬다.
 
 그런 연유로 놈의 머리가 내 자취방 냉동실에 처박히게 된 것이다.
 
 "얼음은 이것밖에 없는데요?"
 
 편의점 조끼를 입은 아르바이트생이 컵에 든 얼음을 달랑달랑 흔들었다. 그 손동작에도 쉽게 떨어져 나가 흔들리는 작은 얼음조각들로 뭘 하라는 걸까.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기는 커녕, 집에 가는 도중에 반은 녹아버릴 듯한 모양새였다.
 
 "대용량은 마트에 가셔야 있을 거예요. 어떡할까요, 드릴까요?"
 "그거라도 주세요."
 "커피는 안가져가세요?"
 "커피도 주세요. 얼마죠?"
 
 나를 보는 아르바이트생의 눈빛엔 '저 놈 수상하다'고 써있었다. 아르바이트생이 내 등 뒤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십여개는 족히 되어보이는 커피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여름이면 편의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커피였다. 나는 손에 집히는대로 아무거나 꺼내 내밀었다. 아르바이트생의 표정이 조금 더 미묘해진다. 내가 내민 것은 레모네이드였다.
 
 '머저리같은 자식아!'
 
 분명 태준이 옆에 있었다면 가감없이 독설을 퍼부었을 테지.
 
 밖으로 나오면서 상상한다.
 옆집 아줌마가 기웃대다가 냄새를 맡고 내가 없는 사이에 119를 불러서 집을 수색한다. 대원들은 냉장고에서 풍기는 악취를 어렵잖게 발견할 것이고, 경악을 금치 못할 거다. 곧 경찰에선 탐문수사를 시작할 것이고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증언할 것이다. 사체가 발견된 날에 수상한 남자가 '얼음을 달라'고 주문했으며, 커피를 달래놓고 레모네이드를 사갔다고. 아니, 그 전에 119가 들이닥친 집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이 나니까 수색할 것도 없이 용의자에 오르겠구나.
 
 머릿속에 스릴러 영화 세네편이 뚝딱 만들어져서 상영됐다가 엔딩크래딧이 올라가기를 반복한다.
 
 아스팔트 위를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걷어찬다. 그러나 속은 풀리지 않는다.
 나는 걷는 속도를 올렸다. 서둘러야 했다. 마트까지 가려면 10분을 걸릴테고, 다시 오는데 10분, 얼음을 찾고 계산하는데 5분, 총 25분이 소요될 것이다. 그때까지 냄새가 새어나가지 않기를. 나는 끝없이 이어진 내리막길을 노려보다가 컵의 포장을 뜯고 얼음을 와작와작 씹어 먹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동네는 한적했고 평화로웠다. 이 평화로움은 모두 '비밀'로 포장돼있단 생각이 들었다. 이 한적한 거리에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중에는 분명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이들도 살고 있을 테지. 매일 밤 딸의 방으로 숨어들어가는 못된 아버지, 같은반 아이를 잔혹하게 괴롭혀 자살로 몰고간 가해자, 유산을 받기 위해 노모를 행방불명되게 만든 비정한 아들....등등. 가능성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우리집 냉장고에 절단된 살인자의 머리가 들어있는 것처럼. 매일 동네를 어슬렁대는 평범한 총각인 내가, 실은 살인자를 살해한 살인범이라는 것처럼. 겉보기엔 너무나 평범했지만 그 누구도 진실을 꿰뚫어볼 수는 없을 터였다. 비밀들이 감춰졌기 때문에, 그 덕분에 세상은 멀쩡한 듯 굴러가고 있었다. 
 
 "어딜 돌아다녀?"
 
 태준이었다.
  나는 자랑스레 얼음팩을 들어 올렸다. 마트 봉지 한가득 들어있는 얼음 때문에 양손이 묵직했다. 나는 그를 스쳐지나가며 질문했다.
 
 "회사는?"
 "쨌지." 하고 심드렁하게 답하며, 내 뒤를 바짝 따라왔다. 두 사람이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좁은 통로에 울려 퍼졌다.
 
 “그 전활 받고 어떻게 사무실에 앉아있겠냐.”  
 “하긴 그렇지.”
 
나는 가볍게 응수했다. 태준은 벌써 계단을 올라와서 내가 현관문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철컥. 잠금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제법 묵직했다. 자취방에 들어서는 순간 태준이 코를 쥐었다. 내가 맡기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는데. 사내놈이 기거하는 방 특유의 쿰쿰한 냄새 때문에 코를 쥐었는지, 고장난 냉동실 속의 그것 때문에 코를 쥐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나는 태준을 냉장고로 안내했다.
 
“물이라도 줄까? 미지근한 물 뿐이지만.”
“얼음 이리줘봐.”
 
 나는 봉지째로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나 분하게도, 팔이 처진다든지 하는 반응은 없었다. 보기보다 힘이 센건가 싶기도 했지만 바짝 긴장된 팔의 근육이 보였다. 봉지를 쥔 손등의 핏줄은 파랗게 도드라져 있었다. 나는 새삼 태준의 정신력에 감탄했다. 무거울텐데도 팔은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다.
 
“방향제 있어?”
 
 그가 물었다. 나는 봉지를 턱으로 가리켰다. 태준이 알아서 그 속에서 방향제를 찾아 꺼냈다. 천원 이천원 하는 싸구려 방향제는 공기 중에 떠다니는 악취를 상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만든 제품일테지만, 몸통에 인쇄된 은은향 따위는 풍기지 않았다. 악취를 포용하기 보다는 더 강한 향으로 덮어버리려는 의지가 강했다. 태준이 분사버튼을 연달아 여러차례 누르자마자 눈이 시큼했고 코가 쓰라렸다. 좁은 자취방 한가득 정체모를 향기가 한가득 떠돌아다녔다.
 
“들고 있어.”
 
나는 잠자코 방향제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태준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태준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코와 입을 가리고 얼음이 들어있는 봉지들을 꺼내어 냉동실에 쑤셔박았다. 냉동실 문은 최소한만 열어놓은 채였다. 이윽고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태준이 나를 보고 섰다.
 
“이거, 새 걸로 교체해야겠는데.”
“냉장고 살 돈 없어.”
“내가 내.”
“돈은 둘째치고, 배송기사가 뭐라고 하겠어. 쓰시던 냉장고 치워드릴까요? 이러겠지.”
 
그가 동요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일단 들어내자.”
“들어내면?”
“자리에서 들어내고 네 말대로 새걸 주문하든지 하자고. 일단 새 냉장고 들여놓을 자리는 있어야 되니까.”
 
독거남의 자취방 특성상 두 대의 냉장고를 들여놓는 건 불가능했다.
우리는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냉장고를 자리에서 빼내는데 성공했다. 묵직한 무게에 허리가 저절로 휘었다. 방바닥에 드러누운 우리는 가만히 서로의 숨소리를 들었다. 손에 느껴졌던 무게보다도 마음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무게 때문에 녹초가 돼버린 탓이다.
태준이 문득 물었다.
 
“그리움이냐?”
“뭐?”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면,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거냐?”
“……넌?”
“모르겠어. 벌써 3년이나 지났는데……아직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는 건 왠지 로맨티스트를 흉내낸 가식인 것 같고. 때때로 마음을 종잡을 수 없는 걸 보면 사랑인 것도 같고.”
“연주는 잘 지내고 있을 거야. 천국에 있을지도.”
“천국을 믿냐?”
“연주는 교회에 다녔으니까. 믿어줘야지. 평온하고 평화로운 세계가 있다는 걸. 그래야 위안이 되지 않겠어?”
 
문득 2년 전의 그날이 떠오른다.
 
최민섭은 시뻘건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그는 우리를 한낱 애송이로 취급하고 있던 게 분명했다. 2대 1, 머릿수도 우리쪽이 유리했는데, 놈은 방심하다 못해 오만한 관용을 부리고 있었다. 태준과 나는 오랜 추격 끝에 연주를 해친 범인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1년동안 머릿속에 그렸던 그림과 현실은 딴판이었다. 최민섭이 성인 여자 한명쯤 거뜬하게 들어올리고 휘두를 수 있는 괴력의 소유자라는 걸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생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만 하던 태준과, 어려서부터 비실비실했던 나는 난생 처음 겪어보는 폭력앞에서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 우리는 절망적인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때 놈이 히죽대며 말했다.
 
‘그년 살결이 얼마나 보들보들하던지, 만지는 것만으론 성이 안찼어. 흐흐흐. 입에서 사르르 녹는 게 아주 일품이더군.’
 
놈은 그런 말을 해선 안됐다. 입을 놀리는 대신에 차라리 우리를 죽이는 게 나았다.
 
‘킬킬킬킬. 뭐야 니들. 설마, 한번도 못 따먹은 건 아니겠지? 사내새끼 둘이서 한 년 가지고.’
‘으아아아아!!!’
 
 태준의 입에서 괴성이 터져나왔다. 흡사 짐승의 울부짖음 같았다.
나는 멍하니, 태준이 최민섭의 목을 물어뜯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곧 최민섭의 몸이 거목이 쓰러지듯 쿵! 바닥을 울리며 넘어갔다. 태준은 미친놈처럼 놈의 머리를 깨부쉈다. 그가 팔을 들어 올릴 때마다 최민섭의 사지가 감전된 듯이 경련했다.
 
태준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발작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최민섭은 어떠한 충격에도 미동하지 않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그가 죽었다는 걸 알았다. 태준은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 최민섭의 꼴을 보면 피를 뒤집어 쓰는 것도 당연했다. 태준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기괴하게 빛나는 두 눈은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네가 용기가 없어서 하지 못했던 응징을 내가 대신 했노라고 말하는 듯했다. 연주를 사랑한 것은 우리 둘 다였지만, 그녀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걸 내던 진 것은 태준 한사람뿐이었다.
 
“괜찮을까?”
“잠깐인데 괜찮겠지. 새 냉장고가 배달되면 바로 넣으면 돼.”
 
그렇게 말하면서도 태준의 눈빛은 불안했다. 당연했다. 비록 끔찍한 짓을 저지르긴 했어도, 우리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최민섭처럼 살인을 하고도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부류가 아니었다. 비록 최민섭이 죽어 마땅한 악인이었을지라도 말이다.
 
나는 태준이 사온 아이스박스를 꽉 끌어안고 집안을 서성였다. 그러다가 화들짝 놀라 창문을 쳐다봤다. 아이스박스 위로 아침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볕이 들지 않는 자리로 달려갔다.
 
지난밤, 이웃들이 깊은 잠에 빠지길 기다린 우리는 냉장고를 들쳐 업고 계단을 내려갔다. 한 두 번 정도 벽에 부딪치긴 했지만 처음치고는 퍽 안정적적이었다. 태준은 창가에 서서 길에 내버려진 냉장고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살인의 흔적이 남아있는지를 보고 있는 거였다. 몇시간 동안 청소한 덕분에 냉장고엔 최민섭의 어떠한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주말에 찾아오는 교회 사람들 말고 내 집에 찾아올 이는 아무도 없었다. 태준이 나를 돌아보았다. 누구냐는 의미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얼음처럼 얼어붙어서 현관 밖에 서있을 사람을 상상했다. 누굴까.
 
똑똑. 똑똑. 똑똑.
예의바른 노크 소리는 이내 굉음으로 바뀌었다.
 
쾅쾅!
 
“총각! 안에 있는 거 다 알아요. 문 열어봐요.”
 
옆집 아주머니 목소리였다.
 
쾅쾅쾅!
 
태준이 눈짓했다. 나가보라고. 나는 아이스박스를 내려놓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세요?”
 
아주머니는 성화를 부렸던 것치곤 평화로운 표정이었다.
 
“밖에 내놓은 냉장고 말이야. 총각네 물건이죠?”
“아닌데요?”
“내가 들었는데? 저기 저 친구랑 새벽에 몰래 내놓았잖아.”
“.......그렇다면요?”
“스티커를 붙여야지.”
“……….”
“왜 그렇게 쳐다봐요? 내가 틀린 말했나. 바로 총각처럼 규칙을 지키는데 무심한 이웃들 때문에 동네가 지저분해지는 거야.”
“알았어요. 붙이면 되잖아요. 어디에 파는데요?”
 
나는 지갑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기 직전 태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혈색하나 없이 창백했다. 10분 걸리는 마트에 가서 스티커를 사오고 보니 순식간에 30분이 지났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 누군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버린 거 아니야? 젊은 사람이 왜 이래, 꽉 막혀선. 어차피 버린 물건 좀 가져다가 쓰겠다는데.”
“고장난 거라니까요.”
“고치면 되지.”
 
근처에 사는 재활용품점 아저씨였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얼했다.
얼마나 급하게 나왔는지, 태준은 내 운동화를 구겨 신고 있었다. 그는 아저씨를 달래듯이 조근조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아저씨에게 그 방법이 통할 리 없었다.
 
“무슨 일이에요?”
 
지나가던 사람이 호기심을 보였다. 아저씨는 태준을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세우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별 이상한 고집을 다 부리네.”
“아저씨가 가져갈 권리가 없다니까……!”
 
나는 황급히 태준의 팔을 붙잡았다. 사람들이 보고 있었다. 이미 이 황당한 실랑이는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저장됐을 터였다. 태준이 이를 깨달았는지 말꼬리를 내렸다. 재활용품점 아저씨는 의기양양하게 것 보라며 직원의 도움을 받아서 냉장고를 트럭에 실었다. 우리는 미묘한 얼굴로 떠나가는 트럭을 보고 서있었다.
나는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시체를 2년동안이나 품고 있었던 냉장고를 살 사람이 불쌍하긴 했지만 수명이 다한데다 오래된 중고품을 누가 살까 싶었던 것이다. 아저씨야 욕심 때문에 가져갔겠지만 결국 팔리지 않아서 매장에서 자리를 차지하거나 분해되거나 할 테지.
태준이 사준 신형 냉장고가 우리 집으로 배송됐다. 굳이 최민섭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우리는 아이스박스채로 냉동실에 집어넣었다. 그 큰 게 들어가고도 공간이 널널했다. 이렇게 좋은 걸 사주다니 태준에게 고마울 지경이었다.
 
일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했다.
 
[우리집으로 좀 와]
 
태준한테서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나는 주소를 더듬더듬 떠올리며 그의 집으로 향했다. 최신식 오피스텔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눈에 띄었다. 누렇게 변색된 몸체가 “오랜만이야”하고 인사를 보내는 듯했다. 나는 냉장고에서 눈을 떼고 태준을 쳐다봤다.
 
 
 "저게 왜 여기 와있냐. 발이라도 달려서 널 쫓아다니든?"
 
 태준이 웃었다. 참으로 그답지 않은 웃음이었다.
 그는 아직 현관에 서있는 나를 발견하곤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들어가기 싫었다. 저 냉장고가 있는 곳엔. 금은보화로 가득찬 방이라고 해도.
 그러나 결국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제 와서 모른 척 할수도, 발뺌할 수도 없으니까.
 냉장고는 태준과 나를 이어주는 통로이자, 가장 지워버리고 싶은 비밀이었다. 저게 존재하는 한 우리는 자석에 끌려다니듯이 서로에게서 완전히 떨어질 수 없었다. 언젠가는 다시 얽히고, 만나게 돼있었다.
 
 "아무래도 신경 쓰여서 사왔어."
 
 순간 재활용품점 아저씨와 고물 냉장고를 사이에 두고 씨름을 하고 있을 그를 떠올렸다.
 아주 좋은 구경거리였을 테지.
 
 파십시오. 싫은데? 파십시오. 싫다니까?! 파십시오. 싫다고, 이 새끼야! 당장 안 꺼져?!!! ....얼마면 됩니까?
 
 이런 식이었을 테지. 자기 행동이 얼마나 이상한지도 인식하지 못하고 마이페이스로 몰아붙였을 태준이었다.
 나는 픽 웃으면서 건들거리며 물었다.
 
 "얼마에?"
 "15만원."
 "야. 내가 중고로 샀을 때도 그보다 싸게 주고 샀다. 완전 바가지네, 그 아저씨."
 
 그만큼 태준이 절박해보였단 거겠지.
 
 "놈은?" 하고 태준이 질문했다.
 
 "내 집에 있지. 네가 사준 냉장고 속에."
 
 그러나 여전히 누렇게 변색된 저 고물 냉장고의 냉동실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열어서 확인하고 싶었다. 분명히 내 집에서 얌전히 냉기에 휩싸여있을 놈의 머리통이, 태준의 집에 와있는 듯했다.
 놈의 머리가 세포분열하듯이 수를 점점 늘려서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는 거다.
 집집마다 머리 하나쯤은 있잖아요? 하는 황당한 광고문구가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놈은 매트릭스의 스미스도 아니고, 가상 공간에 살고 있지도 않았다. 
 놈의 머리가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넷으로 증식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저 망할놈이 냉장고를 열어서 확인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오랜 습관 때문인지도 몰랐고, 더위를 먹어서 그런건지도 몰랐다.
 
 태준은, 냉장고하고 눈싸움을 벌이고있는 나를 보고 있었다.
 그가 불쑥 말했다.
 
 "버리러가자. 완전히 유기하러 가는 거야."
 
 그가 차키를 흔들었다. 주어가 생략된 말이었지만, 나는 "그래"하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콰직!
 
 기계에 의해 중형 쏘나타가 납작하게 짓눌렸다. 큰 몸집을 가진 동물이 무언가를 으스러뜨리는 소리와 비슷했다. 
 고철과 기계밖에 없는 살풍경한 공간이었음에도 마치 공룡의 시대에 와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계가 웅웅 대자, 공룡이 나에게로 바짝 다가온 듯해 소름이 돋았다. 우리는 폐차장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준이 갑자기 차에서 내렸다. 그는 담배를 피운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나가선 한참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선잠에 빠져 있었다. 이미 해는 저물고 있었고, 하늘은 보라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편의점 봉지를 달랑달랑 들고 온 것으로 보아, 일대를 돌아다닌 모양이었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태준은 픽 웃으며 소세지와 샌드위치를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는 내가 그것들을 다 먹어치울때까지 옆에서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그거, 녹았을까?"
 
 태준이 렌트해온 트럭의 뒤에 실려 있는 냉장고가 신경쓰였다. 아니, 그 속에 있을 놈의 머리가 신경쓰였다는 쪽이 옳을 것이다.
 벌써 몇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스박스 한가득 드라이아이스로 채워놓았다고 해도, 한여름 날씨에 녹지 않았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태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상관이야."
 "그렇긴 하지만..."
 "나가자. 퇴근하는 거 확인하고 오는 길이야."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놈의 시체를 토막내어 전국 각지에 버리러 가는 그 여행을 다시 반복하고 있는 듯했다.
 덜컹덜컹, 기차가 흔들리는 대로 흔들렸던 몸의 느낌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말 한마디 없이 건조한 눈으로 창밖을 응시하던 태준의 눈빛도, 바로 어제 일처럼 또렷했다.
 
 기기긱...
 냉장고의 몸체가 땅에 끌리며 기괴한 소음을 만들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주위를 살폈다. 발길이 끊긴 도로 저편으로 빨간 헤드라이트 불빛이 빠르게 스쳐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 외엔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폐차장에서 흘러나오는 소음에 익숙한 주민들은 고작 이 정도 소리엔 신경쓰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도 몸이 움츠러들었다. 두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앞장 서서 걷고 있는 태준은, 힘줄이 튀어나오도록 힘을 쓰고 있지만 흔들리지 않는 저 팔처럼 마음도 굳건했다. 나는 태준의 그러한 점을 늘 부러워했다.
 
 한 여자를 사랑하는 두 남자. 둘 중에 하나는 못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못난 쪽은 나였다.
 태준은, 그저 사랑했을 뿐이다. 연주를 바라는 것 하나 없이 자기 심장을 꺼내 바칠 정도로 좋아했다.
 그것은 그 혼자만의 일방적인 사랑이었지만, 연주의 애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내 감정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뜨거운 것이기도 했다.
 나와 태준은 똑같이 연주를 마음에 품었지만 그녀는 점차 태준 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내가 별볼일 없는 애인이라서 그랬을수도 있고, 나와는 별개로 태준의 절실함에 본능적인 끌림을 느꼈을 수도 있다.  
 
 연주가 허망하게 떠나지 않았더라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낡은 차체가 올라가야 할 곳에 나의 고물 냉장고를 올려놓았다.
 나는 태준이 기계를 동작시키는 것을 보면서 그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찌그러지고 바스라져서 이대로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흔적이 남으면 어쩌지?"
 "무슨 상관이야." 그가 또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놈의 머리가 녹든 말든 상관없다고 말할 때처럼.
 
 "흔적이 남아서 붙잡히면....그래. 여기까지였구나, 생각하고 말래. 좀 쉬자, 우리도."
 "진작 이렇게 없애버려야 했는지도 몰라. 우리도 놈과 똑같은 살인자였는지도 몰라. 놈이 그랬던 것처럼 범행을 감추고, 증거를 감추려고 토막 내어 전국에 유기하고 냉장고에 넣어뒀을 정도니까...태준아."
 "왜."
 "연주는 우리를 비겁하다 생각할까?"
 
 부숴져가는 냉장고를 보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평소처럼 별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 고요한 눈빛은 어떤 순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2년전, 놈을 죽였을 때였다.
 
 우리는 지친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버렸다. 기절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새벽이었을 거다. 밤처럼 어둡지도, 낮처럼 밝지도 않았으니.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태준이 간헐적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무언가 찌걱, 찌걱...이상한 소리도 들리고 있었다. 등을 돌리고 앉아있었기 때문에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이질 않았다. 뭘 하는 거야?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태준이 앉아 있는 자리엔 최민섭의 몸뚱아리가 있을 터였다. 우리가, 아니 태준이 물어뜯어 죽인 살인자의 몸뚱아리가.
 
 태준은 최민섭의 배를 가르고 그 속의 장기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바짝 날이 선 과도가 떨어져 있었다. 과도의 칼날은 진득한 피로 물들어 있었다. 아무리 예리하다고 해도 저건 과도였다. 과일 깎는 용도로 만들어진 저것으로 사람의 배를 가르고 갈비뼈를 해체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태준아. 뭐하는 거야, 이게? 응? 왜 그래??!'
 
 나는 그가 정말 미쳐버렸는 줄 알았다. 정신을 놓아버렸다고 생각했다.   
 
 '연주가...연주가 이 안에 있어...'
 
 그가 독기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소름이 삐쭉 돋았다.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최민섭의 말이 귓전에 메아리쳤다.
 
 ‘그년 살결이 얼마나 보들보들하던지, 만지는 것만으론 성이 안찼어. 흐흐흐. 입에서 사르르 녹는 게 아주 일품이더군.’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처녀성에 관한 얘기가 아니었다. 그는 미친놈이었다. 최민섭을 정상적인 사고로 이해해서는 안됐다.
 놈은, 연주를 먹었다. 연주의 살을 발라 먹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살아있는 내내 살점을 도려내며 히죽거렸는지도 모른다.
 태준은 갑자기 깨달은 거다. 최민섭이 했던 말의 진짜 의미를. 놈이 연주를 먹어치웠다는 것을 깨닫고, 깨어나 저런 짓을 하고 있었던 거다. 
 
 격렬한 감정이 치솟자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삽시간에 차오른 눈물은 분명 분노 때문일 테지.
 
 '어디있는지 모르겠어. 아무리 헤집어봐도, 어디가 소화기관인지 모르겠어. 어디쯤에 연주가 있는지....아무래도 모르겠어. 나 좀 도와줄래? 응?'
 '태준아. 연주는 거기에 없어.'
 
 나는 태준의 등을 끌어 안았다. 그가 안쓰럽고 가여워서 어쩔줄 몰랐다.
 그를 안고 있었으나, 동시에 나 자신을 안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에겐 안아줄, 보듬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태준은 나에게 안긴 채로 최민섭의 배를 헤집은 피묻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의 소리는 흡사 짐승의 울음처럼 그 일대에 울려퍼졌다. 쉽게 잦아들지 않는 슬픔이었다.
 오후 무렵 우리는 그 곳을 벗어났다. 한 손에 짐가방을 든 채로. 그때 이미 태준의 눈은 버석버석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갈라져서 피가 비치는 입술이 아니었더라면, 필시 그가 지난 새벽 나에게 안겨서 엉엉 울었던 일이 꿈이라 착각했을 터였다.
 
 태준은 그때와 똑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난 우리가 비겁하다 생각하지 않아."
 ".....연주는 분명히....."
 "해야 될 일을 했을 뿐이야. 누군가는 해야 될 일을."
 
 콰지지직...!
 
 냉장고가 마지막 단말마를 내질렀다.
 고요한 어둠이 도톰한 담요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별 하나 뜨지 않은 밤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지금 유기하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닐까.
 연주와의 기억. 우리가 저지른 끔찍한 일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영혼마저 저 냉장고 안에 담아 폐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태준의 등을 바라보며, 최민섭의 배를 헤집고 있던 그를 안아줬던 순간을 떠올렸다.
 두 팔을 벌려 한아름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사실, 이 순간 누군가가 나를 안고 위로해주기를 바랐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온기를 구걸하지도, 내밀지도 않았다. 단지 꼼짝도 않고 서서 냉장고가 철뭉치로 변하는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태준도 마찬기지였다. 우리는 손전등 불빛이 사라져 온전한 어둠 속에 갇힐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다.
 
 태준이 등을 돌리며 먼저 움직였다.
 
 "가자."
 
 나는 그의 차에 잠자코 따라 올라 탔다. 조수석에 앉자마자 그가 차를 출발시켰다.
 고물 트럭이 덜컹댈 때마다 몸이 가볍게 들썩거렸다. 이 느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창 밖으로 펼쳐지는 밤하늘의 풍경. 말 한마디 없이 조용한 동행인. 여전히 기차에 타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집 근처에 다다르자, 태준이 길옆에 차를 대었다. 나는 차에서 훌쩍 뛰어 내렸다. 칠이 벗겨진 흰색 트럭에 앉아있는 태준이 보였다.
 태준 역시 나를 보고 있었으므로 눈이 마주쳤지만, 우리는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곧 그가 탄 트럭이 저편으로 사라졌다.
 작별인사조차 나누지 않은데에 아쉬움은 들지 않았다. 우리의 기묘한 인연 역시 이것으로 끝이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젠 여행을 끝내고 역에서 내릴 시간이었다.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