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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두 번 본 리뷰 (스포 및 긴글 주의)
게시물ID : movie_583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섬진강윤슬
추천 : 26
조회수 : 7087회
댓글수 : 33개
등록시간 : 2016/06/05 02: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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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봤을 때는 내용을 따라가기 급급했는데, 두 번째 보니 박찬욱 감독의 의도들이 보이네요. 가히 놀라운 작품입니다.


두 번 보고 

이 영화의 주제를 정리해 보자면, 한마디로 '트라우마에서 치유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그리고 버려짐에서 수용으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 히데코(김민희)의 트라우마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상징물은 구슬입니다.

히데코가 어린 시절 여느 꼬마 아이처럼 울고 떼쓸 때, 이모부는 히데코의 입을 벌리게 하고 구슬 하나를 넣어 입을 막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상징인데 그 이후 아이는 울음을 토하지 못하고, , 감정을 분출하지 않고 무의식 속에 억누르는 차가운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그리고 이모부는 두 구슬이 달린 줄로 히데코의 손등에 피가 날 정도로 매섭게 매질합니다.

그리고 그 구슬을 히데코는 허리춤에 달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 구슬은 히데코에게 아픔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성인이 되면서 히데코는 그것을 쉬이 보이지 않는 곳에 처박아 둡니다. 숙희가 처음 이 집에 와서 방안을 구석구석 뒤졌을 때 박스 안에 숨겨진 그 구슬줄이 드러나죠. 물론 숙희는 그 구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만요.

 

흥미로운 것은 사람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시작하면, 트라우마의 상징물을 비로소 트라우마와 분리하여 바라볼 수 있게 되는데, 그 치유들이 히데코의 삶에서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그 회복의 씬은 바로 낭독회 씬입니다.

 

낭독회가 열리기 전, 산에서 히데코는 숙희와 대화합니다.

여기서 자신의 출생으로 어머니가 죽었다라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히데코는

역시 어린 시절 엄마를 잃어 비슷한 삶을 살은(이모와 함께 살았다는 점도 유사함),

그래서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숙희에게,

엄마가 히데코를 낳고 기뻐했을 거라는 말을 듣습니다.

같은 고통을 느꼈기에 그 고통의 깊이를 알던 사람이 들려주는 공감과 위로와 지지의 말. 그 말이 히데코를 치유하는 시작점이 됩니다. 그리고 히데코는 동무'라는 것이 이런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숙희에 대한 어떤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낀 후,

히데코는 낭독회에서 구슬 이야기를 읽습니다.

그녀가 숙희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녀에게서 공감과 위로와 지지를 받지 못했더라면,

그녀는 구슬을 입에 넣고 성기에 넣는 그 이야기를 접하면서 자신의 어릴 적 학대를 떠올리며 두려움에 치를 떨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제 히데코에게 구슬은 전혀 트라우마로 읽히지 않습니다.

그녀는 구슬에서 어린 시절 학대를 연상하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숙희와 성애를 즐기는 장면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전의 낭독회에서 글을 다 읽은 후에도 차갑던 그녀가,

붉게 상기된 얼굴과 함께, 땀을 닦아냅니다.

하정우의 말처럼 이모부의 지나친 훈육으로 '시체'처럼 차가워진 그녀에게서

따뜻한 온기의 피가 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 생명이 부활하기 시작한 것이죠.

육은 살아있지만 영은 죽어 있었던 아이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부활의 모티브는 영화 뒤에서도 새로운 신분으로 시작하는 등의 모습으로 계속 변주됩니다.)

 

흥미롭게도, 이 순간 백작(하정우)도 히데코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백작이 이모부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마지막 순간에 깊은 숨을 반복해서 들이쉬면서 떠올렸던 마지막 장면은,

낭독회 밤 히데코가 창백한 시체를 벗어나, 얼굴에 붉은 빛을 띠며 뜨거운 땀을 닦는 모습을 보였던 순간이었습니다.

그 때 하정우의 표정도 여느 때와 다르게 굉장히 상기되죠.

하정우의 사랑은 진심이었습니다. 숙희를 정신병원에 넣은 후, 그는 히데코에게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정식으로 결혼해서 살자고 하죠.

그 만큼 온기를 되찾은 히데코는 수줍은 봄처녀 마냥 아름다웠습니다.

 

히데코는 그날 밤 다시 사람으로의 따뜻함을 회복하게 되고,

그 이야기를 실제 자신의 삶에서 재현하기 위해, 숙희를 침실로 유인합니다.

그리고 백작과의 결혼 후 밤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핑계를 대며 숙희를 유혹합니다.

그리고 둘의 육체의 만남은 구슬 이야기처럼 입술에서 시작해서 성기에서 마무리됩니다.

 

그 섹스 장면에서 굉장히 중요한 대사는 이것입니다.

"내가 젖이 나와 아가씨에게 먹여줄 수만 있다면..."

이것은 영화의 핵심적인 문장 중 하나로, 영화 초반에도 나오는 대사입니다.

버려진 아이들을 살려서 일본에 입양 보내는 것을 통해 아이들을 구원하던 일을 하던 숙희는,

히데코에 집에 와서 역시 엄마 잃은 히데코를 살려 일본으로 구원합니다.

하지만 과거와 다르게 이제는 자신이 그 구원에 함께 동참합니다.

(사실 그녀도 히데코를 구원하고 있지만, 히데코도 그녀를 구원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애초에 히데코에 집에 들어간 것은 배를 타고 이 나라를 뜨기 위해서였죠. 이것을 가능하게 해준 것은 히데코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박찬욱 감독이 이 사랑을 단순히 두 여인의 사랑으로 보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그 사랑은 히데코의 말을 빌리자면 동무의 사랑을 뛰어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엄마를 잃은 히데코에게 다시 엄마가 생긴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히데코는 섹스 중에 묻죠.

"나를 버리지 않을 거지?"

엄마에게 버림받았다고 무의식에 생각했던 그녀는 간절한 눈빛으로 묻습니다.

숙희는 대답하죠. "나는 절대로 아가씨를 버리지 않을 거에요."

그리고 신음소리는 절정에 달하죠. 그때의 오르가즘은 단지 쾌락을 넘어, 상처 입은 존재의 회복과 버려진 영혼의 수용에서 나오는 극치감입니다.

(여기서, 상징적으로 박찬욱이 좋아하는 근친상간적 모티브가 젖과 자궁으로의 회귀의 주제를 가지고 등장합니다. 섹스 중에 젖을 먹이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또한 숙희가 히데코의 성기를 바라보고 탐닉하는 장면의 카메라 각도는 마치 산파가 아이를 받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처음 봤을 때는 그렇게 야하게 보였던 장면이 두 번째 봤을 때는 너무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나더라구요. 특히 숙희의 나는 절대로 아가씨를 버리지 않을 거에요'에서칵 했습니다 )

 

그런데, 이 강렬한 사랑을, 숙희가 배신합니다.

하정우가 말하죠. 숙희가 너에게 잘해주는 것은 천지간에 혼자인 너가 불쌍해서 이렇게 해주는 것이라고... 그렇게 숙희가 말했다고. 숙희는 너를 이용하고 있다고.

 

그래서 히데코는 숙희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숙희에게, 백작이랑 결혼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같다는 식으로 말하죠. 하지만 숙희는 백작을 사랑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앞으로 사랑하게 되실 거라고 말하며 자신의 내밀한 감정을 숨깁니다. 그러자 히데코는 숙희의 뺨을 강하게 두 번 내리치죠. 마치 사랑에 배신당한 사람처럼. 그리고 숙희를 매섭게 몰아 그녀의 침대로 쫓아냅니다. 이렇게 강렬한 감정의 표출은 어린 시절 구슬로 입을 막히고, 이모부에 의해 지하실에 끌려가 사람의 장기로 의심되는 표본들(아마도 자살한 이모의 장기도 섞여 있을지 모르는)을 보고 난 후 완전히 공포심에 사로 잡혀, 감정을 억압당한 그리고 감정을 잃어간 히데코와 너무나 다른 모습입니다. 사랑에 사로잡힐 때 나오는 아주 원초적인 감정의 분출인 것이죠.

 

그리고 자살을 하러 갑니다. 엄마에게 버림받은 인생. 그리고 새로운 나를 탄생시킨 상징적 엄마(숙희)에게 또 다시 버림받은 인생. 그녀는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어진거죠그녀는 생명의 온기를 찾았지만 다시 차가운 시체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런데 이 때 숙희가 극적으로 그녀를 살려내죠.

숙희가 히데코의 고통으로 얼룩진 삶을 파괴하고, 구원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둘은 서로를 향한 진실한 사랑의 마음을 확인합니다.

이로써 이모의 자살을 모방하는 대물림의 저주는 끊기게 됩니다. 창조적 파괴가 된 것이죠.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 혹자들은 불필요한 장면으로 이야기하는 섹스신을 넣습니다.

하지만 이 장면은 중요한 장면이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드디어 구슬이 등장합니다.

놀랍죠. 그 두려움과 상처로 처박아 두었던 구슬을, 히데코는 다시 꺼내서, 다시 몸에 지녀서, 일본, 그리고 상해까지 가져갑니다.

둘은 과거 낭독이야기에 묘사되었던 것처럼 구슬을 입에 넣고 또 서로의 성기에 삽입합니다.

이제 과거 고통과 학대의 트라우마는 전혀 연상되지 않습니다.

그 트라우마는 숙희가 서재의 모든 서적과 그림을 파괴하는 장면에서 완전히 불태워졌죠.

그 서적을 파괴하는 모습을 보고 처음에 수동적으로 지켜보던 히데코는

나중에 함께 그 서적을 물에 넣고 함께 수장시키는 적극적 의례에 동참합니다.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진 것이죠.

 

이러한 사랑의 이야기는, 공감 능력을 잃어 상대를 학대하는 것의 문제를 느끼지도 못하고, 심지어 살해도 서슴지 않는, 이모부로 대표되는 지하()의 어둠과 파괴의 세력들과 대비됩니다.

 

이 영화는 사실 동성애라는 말 하나로 담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남성에 의해 학대받고 남성을 혐오할 수 밖에 없게 자란 히데코에게 여성만이 유일한 사랑의 대상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사랑은 낭만적 사랑을 넘어서는, 고통 받은 사람들의 연대로서의 동지애, 동무애이며, 가슴으로 생명을 낳는 모성애입니다.

 

저는 이러한 죽음에서 따스한 사랑과 생명으로의 이야기가 한 번의 관람으로 전달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보면 내용을 따라가기 바쁘죠. 아마 칸의 심사위원들도 그랬을 것 같습니다. 저는 심사위원들이 이 영화를 두 번 보았다면 분명 주요 상 중 하나를 주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밖에도, 사실 재밌는 장면들이 참 많았습니다.

반복되는 거울을 사용해 얼굴을 비춰주는 것(거울은 옛부터 '진실'을 드러내는 장치로 신화, 민담에서 많이 등장하죠.),

나무덤불에 둘러쌓인 히데코의 얼굴을 통해 구속의 삶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

집 경계선의 낮은 하지만 그녀에 삶에서 높게 느껴졌던 돌담을 숙희의 도움으로 넘어서는 것,

그리고 도망칠 때 대지의 확 트임 등 시각적 상징들도 참 좋았습니다.

6~7연음은 되는 듯 아르페지오로 빠르게 물결치는 음악도 영화적 효과를 극대화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너무 재밌고(두 번째 보니 왜이리 웃긴 장면이 많은 건지요) 감동적인 영화였습니다.

 

박찬욱 감독님 사랑합니다앞으로도 변태 소리 듣고 욕 먹으셔도 이런 영화 꼭 찍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한 번 보신 분들 한 번도 보시기를 강추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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