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글 보러가기
가상현실 기술은 생각보다 빠르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2013년 가상현실게임의 등장 가능성으로 화제를 모았던 오큘러스 리프트는 2014년 말 상용화 되었다.
이후 가상현실 기술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게임들이 나왔으며 2017년 무렵에는 가상현실게임이 주류 게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2020년 그만그만한 게임들이 소비자를 사로잡기 위해 다투고 있을 때, 엄청난 스케일의 대작 게임을 모 회사가 준비 중에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2021년, World of Virtuality, W.O.V.가 발표되었다.
원래 소문이란 것은 소문 속의 실체가 작으면 작을수록 더 크게 퍼지는 법이라, 막상 껍데기를 벗겨보면 별 것 아닌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번 것은 달랐다.
발표가 되자마자 순식간에 상품은 품절되었고, 사용자들 사이에선 그야말로 신세계라는 평이 내려졌다.
W.O.V.는 기본적으로 MMORPG로 가상의 현실세계에서 아바타를 키우는 전형적인 게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W.O.V.에 열광한 것은 현실과 거의 구분이 안갈정도로 정교한 그래픽,
'제한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컨텐츠, 고통을 제외한 모든 감각을 90%이상 재현해 내는 기술력 때문이었다.
사실 W.O.V.는 게임을 즐길만한 어떤 방향성을 전혀 제시해주지 않았다.
컨텐츠에 제한이 없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게임을 즐기는 특정한 방법이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W.O.V.가 제공한 것은 현실과 아주 유사한 상황과 게임을 같이 즐길 수 있는 다른 게이머들 뿐이었다.
처음엔 쾌락을 추구한 행위나, PK, 친목이 플레이의 주를 이뤘다.
친목은 곧 게임 내 길드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길드원이 PK를 당하면 길드 전체로부터 보복성 PK가 들어왔기 때문에 길드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은
좋은 길드에 가입하는 것이, 길드원은 자신의 길드의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 플레이어들의 주된 목적이 되었다.
전쟁과 경쟁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머릿수와 기술력이었기 때문에 내부로는 독자적인 기술개발을 하는 동시에
외부로는 무소속 플레이어를 끌어들이기위한 다양한 전략이 사용되었다.
그중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은 자신의 길드원이 아니면 무조건 죽이고보는 전략이었다.
길드에 가입하지 않은 자는 게임플레이가 불가능 할 정도로 PK를 당했고,
그렇다고 길드에 가입한다고 완전한 안전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즐거워야할 게임이 끝없는 경쟁이 되어버리자, 회의감을 느낀 유저들로부터 평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길드 지도자들은 이들의 요구에 따라 앞으로는 과도한 경쟁과 PK를 자제하자는 협약을 맺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현실의 시간으로 약 1년 3개월이었다.
W.O.V.가 발표되고 1년 3개월이 지나고, W.O.V. 이용자가 20억명을 돌파할때까지 현실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소멸이었다.
이전까지 MMORPG에서 유저가 느끼는 아바타와의 동질감과
W.O.V.에서 느끼는 동질감은 차원이 달랐다.
W.O.V.의 아바타는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가 움직이는 것이었으며,
아바타가 느끼는 감각과 쾌락이 곧 나의 감각과 쾌락이었다.
게임 속의 아바타를 자신으로 여기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본질이 더 중요해지는 세상이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의 본질이 곧 나의 존재가 되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라 '나 자신 어떻게 되고 싶냐'였다.
커스터마이징을 통해서 유저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이 될 수 있었다.
남성과 여성, 장애인과 비장애인, 흑인과 백인과 황인, 어린이와 노인 간의 경계가 허물어져갔다.
사랑도 이전까지와는 조금 다른 형태를 띠었다.
이전까지는 남성과 여성의 사랑이 보편적인 사랑으로 인정되었다면,
물질의 차원을 뛰어넘는 플라토닉 러브가 더 중요시되었다.
동성 간의 사랑은 물론, 여성화된 남성과 남성화된 여성 사이의 사랑도 나타났다.
W.O.V. 속 세상이 활기를 띨수록 현실은 더 비참해졌다.
노동의 생산성 자체도 떨어졌으며, 경제는 대공황이후로 최악의 불황을 맞았다.
인류의 1/4이 가상세계에 빠져 게임을 즐기고 있는만큼 중요한 것은 W.O.V.와 결합이 가능한 상품인가 아닌가였다.
대부분의 쾌락은 게임속에서 더 쉽고 강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쾌락을 제공하고 돈을 받는 산업은 대부분 죽었다.
또한 많은 인구가 집밖에 나가지 않게 되면서 의류, 자동차 산업을 비롯해 각종 시장과 마켓도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호황을 누린 것은 W.O.V.와 직접적인 결합이 가능했던 전자책, 음악, 영화와 같은 미디어산업 뿐이었다.
평화 협정이 맺어진 후 전쟁은 사라졌지만 경쟁은 계속되었다.
길드마다 각기 다른 이념을 내걸고 자신의 길드로 플레이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고대그리스의 플라톤 주의에서부터 공산주의, 자유민주주의,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제도와 이들 모두를 부정하는 아나키스트들까지.
W.O.V.는 사상과 철학의 실험대가 되었다.
현대과학의 산물이자 종합체였던 W.O.V.는 현실 속 과학의 시대에 종말을 고하고,
사이버세계속 철학의 시대를 열었다.
어떤 제도가 가장 합리적인가에 대한 토론이 게임 곳곳에서 일어났으며,
그에 대한 검증과 실험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W.O.V.가 발표되고 4년. 완전한 제도가 만들어졌다.
부작용도 단점도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합의했으며,
모든 사람이 행복했다.
W.O.V.는 클리어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W.O.V.에 재미를 느끼지 않았다.
40억명을 넘어섰던 게임인구가 하나둘씩 로그아웃해서 들어오지 않았다.
접속시간에 따라 유저들로부터 돈을 받던 W.O.V.는 미국 GDP와 맞먹는 서버 운영비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고,
회사는 얼마 못가 파산했다.
W.O.V.의 서버는 공지하나 없이 다운되었지만 이제 그 게임을 즐기는 이는 없었기에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W.O.V.에서 현실로 돌아온 40억명의 사람들은 현실의 제도를 하나 둘씩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게임 속에서 도움이 되고 유용했던 제도와 철학을 현실의 상황에 맞춰 조금씩 적용했다.
그리고 몇년 후 현실에 맞춘 완전한 제도 또한 등장했다.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던 이데아가 실체를 들어냈다.
부작용도 단점도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합의했으며,
모든 사람이 행복했다.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