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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보도의 신호등은 계속 녹색불에 멈춰있었다
게시물ID : sisa_58803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풍월을읊는개
추천 : 3
조회수 : 56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04/20 14:22:13
1주기 때 추모제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수만의 시민들은 손에 국화 한 송이를 들고 서울광장으로 모였다. 추모제가 끝나고 단체 분향을 하기 위해서 추모행렬은 광화문역 세월호 광장에 위치한 분향소로 향했으나, 유가족과 시민들은 조문조차 할 수 없었다. 경찰이 광화문 사거리에 대규모 경찰 인력과 차벽 그리고 차단벽을 설치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추모와 분향의 행위보다 질서가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경찰학연구에 실려있는 논문들에 의하면, 공공의 질서란 ‘그때 그때의 지배적인 (헌법상의 가치척도에 따른) 윤리관•가치관에 따를 때 그를 준수하는 것이 인간의 원만한 공동생활을 위한 불가결의 전제조건이라고 간주되는, 공중 속에서 인간의 행위에 대한 불문규율[로서의 사회규범의 총체]’를 말한다. 뿐만 아니라 공공의 질서에 위반함을 이유로 경찰권을 발동하기 위해서는 실정법 이외에, 인간의 원만한 공동생활을 위해 불가결한 사회규범이 구체적 행위에 의하여 위반되어야 한다고 주장된다. 그렇다면, 누가 공공의 질서와 관련된 사회규범을 위반하고 있는 것인가. 국민의 안전이 아닌 이윤의 안전을 목표로 한 정책기조로 인해 희생된, 304명의 사람들을 그 1주기에 평화롭게 추모하는 행위가 인간의 원만한 <공동>생활을 위한 불가결한 사회규범을 위반한 것인가? 아니면, ‘인간사회의 원만한 공동생활을 위해 세월호광장의 분향소를 향하는 시민들의 인간적인 추모행렬’을 미신고 불법집회라는 미명하에 가로막고, “청계천을 따라 청계2가 장통교 부근까지 100여대의 버스와 트럭으로 거대한 '산성'을 구축[하고,] 버스 사이의 작은 틈새 또한 경찰 130개 중대, 1만 여명의 '인벽'으로” 사전에 차단하여 심각한 교통체증과 시민들의 불편을 야기한 경찰 측이 공공의 질서와 관련된 사회규범을 위반한 것인가? 

뿐만 아니라 사안의 내용에 따라 세부적인 차이가 있지만 대법원의 여러 판결에 의하면, “집회의 금지와 해산은 원칙적으로 공공의 안녕과 질서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명백하게 존재하는 경우에 한하여” 그것도 그러한 위험을 최소화시키려는 노력 이후에나 허용될 수 있고, “평화롭게 개최되거나 집회 규모를 축소하여 이루어지는 등 직접적이고 명백한 위험을 초래하지 않은 경우에는 이에 대하여 사전 금지 또는 제한을 위반하여 집회를 한 점을 들어 처벌하는 것 이외에 더 나아가 이에 대한 해산을 명하고 이에 불응하였다 하여 처벌할 수는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시청광장에서부터 세월호 광장에 설치된 분향소에 이르는 유가족과 시민들의 추모행렬이 공공의 안녕과 질서에 그토록 명백하고 직접적인 위험을 초래하는 경우인가? 그렇지 않다고 판단될 수 있기에, (현실화되지 않았지만) "광화문 세종대왕상 주변으로 가상의 선을 정해 폴리스라인을 칠 것"이라는 강신명 경찰청장의 13일 기자간담회와 같은 입장도 가능했던 것 아닌가? 유가족들과 시민들의 추모행렬이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위반한 것이 아니라면, 경찰은 누구를 위한 그리고 무엇을 위한 질서를 지키고자 했던 것인가. 그 폭력적인 과잉진압으로. 

16일 오후, 청와대에 대통령이라고 가정되는 박근혜라는 인물은 없었다. 그는 국빈 초대도 아닌 콜롬비아의 경우를 포함하여 남미 세일즈 순방을 나섰고, 첫 일정으로 콜롬비아에서 양국 경제인들이 주최하는 비즈니스 포럼에 참석했다. 전날 오후 유가족과 시민들이 준비한 안산분향소에 참석하는 것 대신에… 세월호 참사는 구조적으로, 사람보다 이윤을 우선시하며 국민의 안전보다 자본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기조 때문에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라고 가정되는 박근혜라는 인물을 위시한 현 정권은 세월호 참사의 1주기에 다시금 사람보다 그리고 국민보다 이윤을 선택했다. 세월호를 침몰시킨 바로 그 원칙을.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선체를 떠났다. 사람 위에 돈을 놓는 질서를 위해. 국민의 대표기관이라 가정되는 국회의 협의를 통해 제정되었던, 그리고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안전사회 건설을 위해 만들어진 세월호 특별법을 정부시행령안(대통령령)으로 무력화시키려 하면서 말이다. 때문에, 4월 16일, 시민들은 서울광장에서 추모행렬이 막히자 종로거리에서 인사동거리에서 광화문에서 “시행령을 폐기하라” “세월호를/진실을 인양하라” “박근혜는 오지마라” “퇴진하라”고 외쳤다. 국민의 안전을 지켜야 하는 책임을 가진다는 대통령. 그렇다면,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공화국에 대통령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대통령이 국가를 대표한다면,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공화국이 이곳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현재 누구의 그리고 무엇의 안전을 우선하는 국가가 있는 것인가. 

지난해 5월에도,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시위하러 온 게 아니고 대통령을 뵈러 왔어요.” 뿐만 아니라 줄곧 철저한 진상규명을 통해 이와 같은 비극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사회 자체를 다시 만들 필요성을 이야기해왔다.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생존권에 대한 실질적 보장이 이루어지는 안전사회 건설. 그렇기에 세월호특별법의 이름 또한 <416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었으며, 특조위가 제안한 시행령안에 안전사회국의 설치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1년간 정부와 여당의 합작품이자 방해공작의 행정적 결과물인 정부시행령안(대통령령)은 진상규명 또한 정부조사자료의 복기에 한정하고 안전사회국을 과로 축소하는 동시에 그 업무를 해양선박사고에 한정시키며, 독립성이 요구되는 특조위를 공무원이 다수를 차지하게 구성하도록 만들었으며, 정부가 파견한 공무원들이 전체 특조위 활동의 실질적인 업무를 기획 통제하는 기획조정실을 설치하는 등의 방법으로 특별법 자체를 무력화시키려 하고 있다. 그리고 오히려 국민의 안전을 기업의 돈벌이로 위탁하는 정책기조를 강화하고 있다. 누가 더 통속적인 의미(특정 진영들의 이해관계에 활용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인가? 철저한 진상규명을 실시하고 이와 같은 비극의 재발방지를 위해 이윤이 아닌 사람이 우선시되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자는 희생자 가족들의 간절한 요청인가? 아니면, 희생자 가족들을 종북, 빨갱이, 진영논리, 배보상 등의 프레임으로 매도하고 세월호 참사를 발생시킨 자신들의 정치적 책임과 부담을 최대한 축소하려는 정부 및 보수양당인가? 

올해 4월 초, 세월호 광장에서 열린 촛불문화제에서 희생자 가족들이 정부시행령안의 폐기를 간절히 요구하는 발언에서도 위와 같은 요청은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이 나라에서 이 사회에서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고. 특조위 활동에 의해 철저한 진상규명과 (그를 위한 과정인 온전한 인양), 이윤이 아닌 사람이 우선시되는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에 삶의 마지막 이유를 걸고 있다는 내용이 발언 전체를 관통하고 있었다. 하나뿐이었던 자식을 잃은, 영석 학생의 아버지는 1년 전 박근혜 정부와 정치권을 (적어도) 믿었다고 소회한다. 그렇기에 신자유주의 반대나 박근혜 정부 퇴진을 이야기하는 여러 사회운동단체의 적극적인 참가와 지원을 반려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난 1년 간 이 정부의 실체를 똑똑히 보았으며 자신들과 같은 서민이 아닌 가진 자들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가진 자의 정부라고 그는 비판하면서, 특별법 제정 및 특조위 설치 과정에서 계속되어온 방해공작으로 볼 때 그와 같은 정책기조를 가진 정권에서는 진상규명과 안전사회건설을 위한 노력이 실질적으로 현실화되기 힘들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5년이라도 10년이라도, 어떻게든 다시는 이와 같은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서민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앞서 싸워나가겠으니, 국민 여러분들께서도 이윤이 아닌 사람이 우선시되는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장기전에 함께 해주기를 요청했다. 1주기에 가져갔던 국화는 형태가 좋지 못하게 되어서, 대신 분향소에서 마련해 준 한 송이를 건네었었다. 품에 넣어서 가져온 국화는 304명이 건넨 손내밈이었을까. 

이것은 장기전이다. 지난 2008년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십만이 광장에 모여도 선거 이후에 민중의 정당한 목소리를 국가에 실질적으로 강제할 장치가 없고 가진 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거대 보수언론이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는 이상, 광장은 누구나의 광장이 아닌 누군가들의 광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마치 집회가 끝나고 이동하는 택시에서 느껴진다는 온도차처럼. 일상은 거리의 정치를 구속할 수 있다. 거리의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담론 투쟁이 일상에서 무너지면 광장도 거리도 무너질 수 있다. 또한 우리들의 일상을 바꾸기 위해 광장으로 거리로 나서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들의 일상이 바뀌지 않으면 광장의 일상만이 바뀔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러나 가만히 일상으로 돌아가 있을 수도 없다. 때문에 일상에서 광장으로 그리고 다시 일상이라는 광장에서 사회적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전략과 방법들에 대한 구상들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이어지는 일정에서 어떻게 국면이 고양될지, 그러한 과정이 사회에 어떠한 효과를 미칠 수 있을지 모른다. 7년 전보다 사회적 상황이 좋은지도 모르겠고. 그러나, 이 정권은 아직 사회적으로 선고를 받지 못했을 뿐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파산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제 서울광장에서 집회가 시작될 때, 경찰은 차벽을 광화문 앞에서부터 세월호광장을 둘러싸는 방식으로 설치하기 시작했다. 경찰 차벽이 광장 옆 도로를 막기 시작하자, 유가족분들과 사람들이 광화문 건너편 횡단보도에 앉았다. 경찰이 미신고 불법집회로 시민들의 불편을 초래한다고 주장했지만, 도로를 막은 것은 경찰 차벽이 먼저였고, 유가족들과 시민들이 앉은 횡단보도의 신호등은 계속 녹색불에 멈춰있었다. 몇 시간 후에 한동안 빨간색으로 바뀌었다가 아무런 불로 들어오지 않았고 저지선을 뚫고 온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나의 사회의 좌표를 돌리는 싸움을 하는 방법, 그리고 이윤보다 사람이 우선이 되는, 희생자 및 피해자 가족들이 원하는 사회를 만드는 방법은 아직 모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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