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뭐가 무슨 커피인지도 모를 메뉴판을 들여다보다가 귀찮아진 나머지 그녀와 같은 커피를 시켰다.
“여전하구나.”
에어콘 바람에 선뜩하게 식어버린 땀을 닦는 나를 보며 그녀가 웃었다. 웃을 때 드러나는 가지런한 치열, 그리 높지는 않지만 날렵하게 뻗은 콧날, 약간 치켜 올라간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변한다. 절세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결코 질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3년 전이랑 똑같아.”
그 말을 듣고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3년 전, 나는 우리의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님과 싸우는 것이 귀찮아져 현재의 아내와 결혼하고 말았다. 하지만 부모님의 선택지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결혼 생활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럴 때 그녀가 먼저 연락해 오다니.
멋쩍어진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침묵에 잠겼다. 도대체 그녀는 왜 나를 불러낸 걸까? 혹시 내게 아직도 미련이 있는 걸까.
잠시 후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목이 말랐던 나는 냉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녀 역시 글라스에 손을 뻗으며 반대편 손으로 긴 생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는 그때 내 눈에 비친 것을 놓치지 않았다.
건드리면 툭 부러질 것만 같은 하얗고 가느다란 손목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흉터. 생긴 지 제법 오래된 듯 희미해져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자살’이라는 단어를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너 그래서 이 더운 날에 긴소매를 입었구나.”
내 말을 들은 그녀는 흠칫 놀라 팔을 내렸다. 팔과 함께 고개도 떨군다.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인 그녀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너 때문에 그런 건 아니야…….”
힘없이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설득력이 없었다. 나는 아직도 그녀가 나를 잊지 못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니? 술 한 잔 할래?”
그녀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밝은 목소리로 물으며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실 저녁에는 친정에 돌아간 아내를 데리러 가야 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내 머릿속에 아내는 없었다.
“옛날 남자친구를 데려오겠다더니 정말 데려왔네.”
기생오라비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하얀 얼굴의 바텐더가 그녀에게 은근한 눈길을 보내며 씩 웃었다. 그녀 역시 미소를 지으며 바텐더에게 말했다.
“전에 둘이서 마시기로 한 거 있지? 그걸로 줘.”
그녀가 이런 식의 치졸한 복수를 할 줄은 몰랐다. 지금 남자친구와의 행복한 모습이라도 보여주고 싶었나? 3년 동안 생각한 게 고작 그거야?
나는 내심 코웃음을 쳤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뭐라도 마셔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칵테일에 대해 잘 모르고, 생각하기도 귀찮아진 나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걸로 주세요.”
다음날, 시체로 발견된 세 사람을 부검한 결과 경찰은 청산가리 중독에 의해 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렸고, 정확한 상황 파악을 위한 조사에 착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