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타커뮤니티에서 올렸던 글을 오랜만에 수정 좀 해서 올려봅니다.
최근에 이런저런 짤막한 글로 용돈벌이를 하다보니, 다시 자꾸만 단편소설로 손이 가네요.
그러나 손만 갈 뿐, 여전히 제 문체에 제가 답답하기만 합니다.
구성상 총 세파트로 나뉘어진 단편으로, 분량은 대략 네편정도(마지막 파트가 두편분량)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분명 어딘가 이런 고민과 괴로움을 겪었을 분들이 계셔서 공감해주시길 빌며 글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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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야 잠드는 남자>
어느새 방안을 채우는 햇빛을 보면서, 그는 또 자괴감에 빠진다. 또 아침이야, 라면서. 하지만 이미 해는 떠오고, 슬슬 그는 잠들 시간이다. 그의 생활패턴은 그의 자괴감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고 그의 삐뚤어진 욕망과 몸의 피로가 결정하는 법이다. 그렇기에 새벽이 지나고 해가 떠오는 지금, 지금이 그의 수면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잡다해지는 생각에, 그는 일단 컴퓨터를 껐다. 아직 하고 있던 것이 남았으나, 사실 그 것은 일종의 미련이 무한정하게 만들어내는 핑계 같은 것. 아마도 화면이 켜져 있는 이상에야 그에게 해야 할 만 한 것은 분명 끝나지 않고 이어지리라. 게임이든, 인터넷 뉴스든, 만화든 어쨌든 무엇이던 간에 말이다. 그것을 알기에 그는 억지로 억지로 컴퓨터를 끌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누우려다, 잠시 화장실이 가고 싶어져 거실로 나왔다. 나서기 무섭게 거실에 계시던 아버지의 눈빛이 신문 너머에서도 그를 매섭게 찌른다. 안다, 알고 있다. 매번 그를 향하는 가족들의 불편한 심기들 - 한심함, 체념, 분노, 미련, 동정 따위들이 담겨있는 그 눈빛들, 이런 감정들이 언제나 가족들로부터 그에게 쏟아지고 있음을 말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들로 그의 폐부를 쥐어짜면 쥐어짤수록 부담으로 그를 내리찍을 뿐인 것을, 그들은 모르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부담이 다시 그들이 싫어할 법한 그의 행동으로 돌아옴을 역시나 모르는 듯하다. 하기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할리는 없겠지만.
아무도 모르게, 아침 준비로 바쁜 다른 가족들에게 더 이상 들키지 않도록 몰래 화장실과 부엌에서 볼일을 해결한 후, 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소리도 내지 않으려 주의에 주의를 더했다. 사붓거리는 발걸음 소리도, 스르륵 문 여닫는 소리마저 신경 썼다. 그러면서 내 집에서 내가 이래야 하는 한 점의 회의가 마음속에 조금 일었지만, 방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움 속에서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소란스러운 아침, 그의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대다수가 깨어나기 시작하는 이 아침. 그런 이들과는 반대로 부근 어딘가의 누군가들과 지구 반대편의 대다수는 그와 함께 잠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위로가 되지 않는 위로로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맴도는 생각과 문 바깥의 분주함은 그가 쉽사리 잠들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 모두가 맴맴 머릴 휘젓고 나면, 두통과도 같은 아찔함과도 같은 어떤 감정이 그를 온통 뒤집어놓고는 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아침잠을 자는 것도 아닌 그가, 그렇다고 잠 못 들리는 없다. 일단 눕고 눈 감으면, 모두가 어느덧 익숙해지고 잠은 조용히 찾아드는 법이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온 잠을 내쫓을 거리만 없다면 그는 조용히 잠들어 해질 무렵에 일어날 터였다. 하지만 금세 잠 들 수 있을 줄 알았던 아침은, 어느 순간 슬몃 열리는 방문과 함께 깨어졌다.
"아들, 자니?"
빼꼼히 열린 문틈 사이로, 그가 아직 잠들지 못했음을 뻔히 알면서도 묻는 이는 역시나 그의 어머니였다. 그는 자는 척을 할까 순간 고민했으나, 채 고민이 끝나기도 전 입이 먼저 대답해버렸다. 아차, 싶은 감정도 때 늦게 돌아왔다.
"아뇨. 왜요?"
"안 자면 집에서 할 것도 없을 텐데 설거지랑 청소 좀 해 놓고... 너 어디 갈 데 없니? 저녁엔 친구라도 좀 만나러 나가고 그래."
돈은 식탁위에 두고 간다는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이어졌지만, 그는 굳이 대답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의 어머니도 굳이 대답은 듣지 않았다. 방문은 열릴 때와 같이 살짝 닫히고, 이내 현관문 여닫는 소리가 났다. 여동생과 부모님이 집을 나서는 바로 그 소리와 함께 집의 소란스러움은 잦아들었다. 동시에, 그의 마음도 스리슬쩍 잦아들었다.
평소와 마찬가지인 평화다. 그의 어머니가 제일 늦게 나가시는 편이기에, 그를 한심하게 생각하는 아버지도, 그를 부끄러워하는 여동생도, 그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어머니도, 이제 집안에는 그 중 아무도 없다. 그 혼자뿐이다. 조용해진 집안에는, 그렇게 그 혼자뿐. 이제 그의 잠을 방해할 사람은 더 이상, 없다. 그러나 그 사실이 위안이 된다거나, 그의 아침잠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문득, 왜인지 그답지 않게 허기가 지는 것 같고, 아닌가, 속이 아픈 것 같기도 하고 그랬다. 그 때문인지 잠자리가 왠지 불편했다. 속이, 허전, 한 듯싶었다. 뭐라도 먹고 잘까, 괜찮겠지, 그런 정도의 고민이 잠시 생겨났다. 그리고 금세 그는 몸을 일으켰다. 고민할 필요도 그다지 없었다. 배가 고픈 거라면 일어나 먹고 자면 되고, 배가 아픈 거라면 약을 먹든 화장실이라도 가면 될 일이었다. 어차피 아무도 없는 집안, 이제 그가 신경 쓸 것은 없었다.
조금 전 나올 때와는 달리 좀 더 대범하게, 이를테면 문소리도 신경 쓰지 않고 발걸음도 좀 더 쾌활하게, 방을 나서 주방으로 직행했다. 터벅터벅 턱턱, 그의 걸음은 말 그대로 대범해졌다. 크고 넓은 발걸음으로 도착한 주방에서 무얼 먹을까 생각하며 그 곳을 둘러보는데, 식탁위에 무언가 메모가 있었다. 이상하다, 분명 돈을 놓고 가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건 뭐람, 떠오르는 의문을 뒤로 하며 그는 메모를 집어 들었다.
'오빠, 어차피 나갈 일도 없을 텐데 내가 돈 좀 빌릴게.'
그는 입가에 쓴웃음이 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반박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기도 했고, 그렇다 하더라도 어머니가 남겨놓고 가신 돈을 그새를 못 참고 가져간 여동생이 얄밉기도 해서였다. 언제쯤에나 이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 월급을 받아 여동생 지갑에 돈이 좀 넉넉한 다음 달에나 돌려받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가끔씩 그의 지갑을 그도 모르게 살피곤 하시는 어머니가 이 사실을 눈치 채고 금세 돌려받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어차피 한동안 나갈 일도 없는 그였다. 어찌되었든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시켜먹을 수 없으니 그가 뭔가 요릴 준비해야 배를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뿐이었다.
그는 잠시 두리번거리다 말고 냉장고를 열었다. 열린 냉장고 안에는, 그다지 별 다른 음식은 없다. 특별한 것이라고 해봤자 어제 먹은 장조림이랑 외가에서 보내줬다는 파래무침정도 될까. 그다지 끌리는 것들은 아닌데다, 모두 밥반찬이다. 따뜻한 밥에 얹어 먹으면 딱 맞을, 그런 반찬들. 그런 것들을 밥 빼놓고 먹긴 그렇고, 역시 밥이랑 먹어야 제 맛이니 밥을 해야할 텐데 그 밥하는 과정도 귀찮은 일이고, 거기에다 아무래도 밥을 먹고 그 든든하고 부른 속으로 잠자리에 들기엔 좀 그렇고 그런 종류의 - 미묘하디 미묘한 마지노선이 뱃속에 분명히 있었다. 그런고로, 그는 두 반찬을 뒤로 밀어냈다. 이어 더 안쪽을 뒤적거리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그런 미묘한 마지노선에 알맞을 것을 하나 찾아냈다. 언제인가 먹고 남겨놓은 듯한 햄 반 조각이 든 알루미늄 캔이었다. 뚜껑을 열고 안을 살피니, 캔 안의 햄은 살짝 굳어있는 것이 아마도 일주일은 더 지나간 모양이었다. 다행히 굳어있는 것 외에는 모양도 냄새도 큰 문제는 없어보였다. 한통을 다 먹기에는 부담스럽지만, 그리고 사실 밥반찬으로 더욱 어울릴 그런 햄이었으나, 다른 것 없이 햄 반통만 먹는다면 상관없을, 많지도 적지도 않은 양이리라. 그는 그 사실에 만족하며 냉장고 문을 닫았다.
꺼낸 햄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버튼을 몇 번 눌렀다. 그의 눈에 몇 개의 숫자가 움직인다. 이정도면 되었겠지, 그는 잠시간 서서 기다렸다. 그러나 사실, 기다림의 시간이라는 것은 무엇을 기다리든 매우 지루하고 꽤나 귀찮은 법이다. 특히 사소한 것일수록 의외로 그것은 더하다. 그러니까, 핸드폰을 껐다가 켜지기를 기다릴 때와 같은, 아니면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다되기를 기다리는 시간과 같은 일이라고 해야겠지. 그러한 지루한 시간을, 그는 꽤나 견디지 못했다. 어차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시간이지만, 그는 대부분의 기다림이 이상할 정도로 초조하다. 그래서 결국 언제나 그렇듯, 그는 서두르고 말았다. 컵라면의 면이 다 익기도 전에 먹어치우듯, 그는 전자레인지를 열고 안의 햄을 꺼냈다. 그리고는, 채 따뜻해지지도 않은 햄을 급하게 먹어치웠다. 쩝쩝, 꿀꺽, 몇 번의 소리가 조용한 주방을 채우기 무섭게 사라졌다. 햄도 짧은 소리와 함께 훅 사라졌다.
그는 먹고 남은 접시를 대충 설거지통에 던지듯 넣고 돌아서다가, 아차, 방금 전 깜빡 닫지 않은 전자레인지의 문을 돌아서 닫았다. 닫자마자 아직 작동시간이 남았던 전자레인지가 징, 하는 소리를 냈다. 아무 것도 안에 없음에도, 텅 빈 그대로 전자레인지는 돌아갔다. 잠시 돌아가는 전자레인지를 내려다보았다. 어쩌지, 꺼버릴까, 고민이 들었다. 그러다가 왠지, 귀찮아졌다. 어차피 꺼지겠지, 그러지 않을까, 어차피 시간도 곧 끝나니까, 그러겠지, 그는 방을 향해 돌아섰다. 그렇게 무심히 문턱을 넘어서는 그의 뒤로 재차 징, 소리를 내며 전자레인지가 이윽고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작동이 끝났다며 비비빅, 비빅 따위의 경고음을 울려댔지만 그는 한 톨의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차피 더 이상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 볼일도 없었다. 그저 그는, 이제 그만 잠들어야만 했다. 잠이, 들어야만 했다. 비비빅, 마치 그를 붙잡으려는 듯 또 한 번 울리는 전자레인지의 애처로운 소음들을 모두 무시해버린 채, 그는 방문을 굳게, 굳게 닫았다.
그럼 이제 배도 찼겠다, 그만 잠들어보려 막 침대에 눕는데, 왠지 오늘 아침은 평소와는 다르게 그에게 있어 번거로운 아침인 모양이다. 시계나 게임기 정도로나 쓰이던 그의 핸드폰이, 평소와는 다르게 전화벨소리를 내는 것이 그랬다. 그는 익숙하지 않은 그 소리에 깜짝, 놀랬다가 다급히 전화기를 들어올렸다. 액정에는 한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친구의 이름이 떠올라있었다. 그는 기름기 번들거리는 손으로 액정을 눌렀다가, 아차, 기름기에 미끄러져 엉뚱한 버튼을 눌러 전화가 꺼졌다. 당황하며 허둥지둥, 그는 다시 통화버튼을 찾았다. 꾹, 뚜르륵, 고민될 만큼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상대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익숙하지 않은 전화벨 소리만큼이나 익숙하지 않은 것 같은 친구의 목소리.
"어어, 어어어, 나야 나."
"알고 있다. 왜 전화는 끊고 그러노?"
"실수야 실수. 그런데 무슨 일?"
"아니 뭐, 연말도 되고 했는데 잘 지내나 해서 한번 전화 해봤다. 잘 지내나?"
"나야 뭐 언제나 똑같지. 넌 잘 지내냐?"
"내사 뭐 별일 있었겠나?"
별일 없던 일상만큼이나 별일 없는 대화가 잠시 이어졌다. 그렇게 몇 마디가 오가고, 서로 더 물어볼 것도 없을 즈음, 친구는 '그럼 다음에 만나 술이나 한잔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그는 '응, 그럼 다음에.'라고 대꾸를 했다. 하긴 했으나, 그 다음이 대체 언제가 될지는 그 자신도 몰랐다. 어쩌면 그 다음이 1년 뒤라던가, 아님 아예 안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은 들었다. 시간을 굳이 정하지 않고 다음에, 같은 경우로 정하는 약속은 그에게는 언제나 그렇게 되어버린다. 그것을 알지만, 그는 굳이 시간을 정하진 않는다. 정한다 해도 못 만나는 사람이 생기기 때문이고, 그 때문에 몇 번이나 눈물도 흘려 보았기 때문이지만, 지금은 그것을 굳이 떠올리려 하지 않는다. 재빨리 떠오른 생각들을 지운다. 지금 이 순간에는 상관없는 일이 아니던가? 속이 쓰릴 뿐인 생각들, 떠올려봤자 뭐하겠는가. 어차피 그는 잠이 들 시간이었다.
그만, 자야지, 눈을 감고, 그는 조금씩 빠져든다. 잠이, 든다. 그의 아침은 다시 그렇게 잠으로 끝나갔다. 그는 그렇게 아침에야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