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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베 사학도 글을 보고 정리한 현대사(3)-이승만
게시물ID : humorbest_59106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가람바람
추천 : 47
조회수 : 891회
댓글수 : 4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2/12/20 20:52:27
원본글 작성시간 : 2012/12/20 15:34:35

제주 4.3사건

배경 정부수립 전후로 대규모 유혈사태가 잇달아 발생하였다. 제주 4.3봉기항쟁과 여순사건은 이승만 정권이 처음으로 부딪힌 시련이었고, 군인과 경찰에 의해서 엄청난 인명이 살상되었다. 당시의 제주도 상황은 해방으로 부풀었던 기대감이 점차 무너지고, 미군정의 무능함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일제강점기부터 혁명운동의 전통이 강한 제주도는 건준과 인민위원회가 활발히 활동하였다. 제주도의 인민위원회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미군정과 협조적이었다.

전개 3.1절 기념 시위에 경찰이 발포하여 여섯 명이 사망함으로써 경찰과 대립하게 되었고 미군정과도 사이가 나빠졌다. 항의로 관민총파업을 일으켰는데 이를 미군은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이념과 관계없이 무차별 검거, 부녀자 겁탈, 재물 약탈 횡포가 잇달아 도민들은 경찰, 미군정과 완전히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남로당은 이런 민심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조직적인 반경활동을 전개했다. 310일부터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직장 95%이상이 참여한 민관 총파업이 발생하였다. 이에 미군정은 조사단을 파견하여 총파업이 경찰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 정책을 추진했다. 경찰은 파업 관련자 검거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남로당은 민심을 이용하여 조직의 수호와 방어의 수단 및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구국투쟁으로서 무장투쟁을 결정하였다. 이들이 43일 제주도 내 경찰지서 및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하면서 봉기가 시작되었다. 이에 미군정은 45일에 제주도 비상경비 사령부를 설치하고 대규모의 군대, 경찰, 서북청년단등 증파하였고, 해안을 봉쇄하고 진압하였다.

4289연대 김익렬이 피해를 막고자 남로당무장대 대장과의 회담을 가져 평화적으로 사태 해결에 합의했다. 그러나 우익청년단체 의한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인해 결렬되었다. 510일의 남한 단독선거에서 제주도는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되었고, 다음달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하려는 미군정의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고, 다음달 북한에도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문제를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그해 10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증파하였고, 11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에 앞서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발표하였다. 중산간마을에 대대적 진압작전이 실시되었다. 이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마을 주민 2만 명가량이 산으로 들어가 무장대의 일원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당시 무장세력은 500명 선을 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나 총 사망자는 3만여명이 넘는 비극이었다. 19493월 진압과 함께 귀순하면 용서한다는 사면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6월에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그리고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죽임을 당하였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결과 제주 4.3사건은 19473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4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9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여순사건

배경 국방경비대는 모병제였고, 입대 시 신원조회가 허술했기 때문에 경찰의 탄압을 받았던 좌익계열이 신분상의 보호를 받기 위해 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건군 초기 미군정은 군인이 정치적 견해를 갖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제제를 가하지 않았으며, 완전한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다. 남로당에서 군을 장악하기 위해 일부러 위장입대시킨 요원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군내에서 많은 동조자를 포섭했었다. 여기에다 당시 군과 경찰 사이에는 국가주도권을 놓고 가끔 무장충돌이 벌어질 정도로 매우 관계가 좋지 않았다.

전개 14연대는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 파견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14연대에는 공산당의 지하조직이 침투해 있었는데 이들이 그 준비로 부대가 바쁜 틈을 이용하여 무장폭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22일 여수·순천지구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여수일원은 27일 저녁 무렵에는 완전히 수복되었다. 포위망을 벗어난 약 1,000명의 잔당은 김지회·홍순석 등의 지휘 아래 덕유산 일대로 숨어들어가 저항을 꾀하였다. 그러나 국군은 추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산악험지에 따라 들어가 수색과 토벌을 계속하였다. 이듬해인 19494월에는 주도급 인물은 모두 사살되었다. 19502월에는 그 추종자들의 대부분이 소탕되어 호남지구에 내려졌던 계엄령은 해제되었다.

결과 여수·순천 사건의 결과 군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이 대규모 숙청되는 이른바 숙군작업이 이루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 제정을 서두르게 되었다. 또한 남로당의 지령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난 군인반란사건으로 시작되었으며, 남로당은 이 사건의 발발에 적잖이 당황하였으나 결국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좌익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함께 이승만의 반공체제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국가보안법

내용 여순사건이 진압되자 이승만 정부는 48121일 국가보안법을 제정한다. 이에 소장파 의원은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상기시키는 악법으로 극우적 반공세력을 제외한 다른 정치세력이나 정적을 탄압하는데 이용될 것이라 비판했다.

평가 한 연구자는 국가보안법 제정을 분단의 법제화로 평했다. 국보법은 반공민족만을 민족으로 간주하고 북을 괴뢰집단으로 인식하게 하여 민족과 국가, 민족주의 등에 대해 왜곡된 인식을 갖게 했으며 획일화된 사고를 요구하였을뿐 아니라 미국과 독재정권, 극단적인 반공정책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였으며 창의적 사고를 위축시키며 사회와 문화를 국가에 종속시켰다고 보았으며 후에 국가보안법을 무기로 하여 독재권력을 휘둘렀다고 비판하였다.

여순반란사건 등 건국 초기의 혼란스런 상황 속에서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제정된 국가보안법은 이후 정권안보와 이데올로기 통제의 수단으로 악용된다는 비판을 받으며 끊임없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모호한 법조문과 지나친 법집행으로 사상범을 양산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유엔인권위원회도 인권제약의 소지가 있다며 국가보안법 개정을 요구한 바 있다.

반민특위

배경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인 1947년 친일잔재청산을 위하여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전범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 법안이 미군정의 동맹세력인 친일경찰, 친일관료, 친일정치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준을 거부하였다. 이로써 친일파 청산의 과제는 정부 수립 후로 넘어가게 되었다. 활동 1제헌국회가 맡은 첫 번째 과업은 친일파 처단을 위한 법률제정이었다. 816일 반민족 행위처벌 법안을 국회에 상정하여 91일 통과시켰다. 이승만 정부와 친일파들의 방해와 압박 속에도 1023일 국회의 승인을 받아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할 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

4918일부터 활동을 개시하여 1차로 박흥식 등의 거물친일파를 잡아들였다. 그러던 중 노덕술등의 친일 경찰을 체포하면서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찰을 체포하여 경찰의 동요를 일으킴은 치안의 혼란을 조장하는 것이라며 노골적으로 반민특위를 비난하였고 반민법의 개정을 주장했다. 미군정은 남한에 반공국가를 수립하기 위하여 공산세력에 대항할 세력으로 친일파에 주목하였다. 따라서 친일파의 청산은 미국의 국익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이어 등장한 이승만 정권 역시 미군정의 통치 구조를 그대로 이어받았고, 친일파는 이승만의 정권장악과 유지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이승만은 친일파 처벌에 반대를 하였다.

결과 반민특위는 국회프락치사건과 6 ·6경찰의 특위습격사건을 겪으면서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국회프락치사건이 친일파 척결의 주도세력이었던 소장파의원들을 간첩혐의로 체포함으로써 반민특위를 위축시켰다면, 특위 산하 특경대에 대한 경찰의 습격은 반민특위의 폐기법안을 통과시키게 함으로써 민족반역자에 대한 처벌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그 결과 친일파 청산에 대한 국민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의 활동은 실패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친일세력이 그 후에도 한국사회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는 길을 열어준 것은 물론이고, 한국민족주의의 좌절과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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