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혁명과 홍위병은 한때 중국의 내정을 거의 초토화 레벨로 몰고 갔는데, 청소년들이 대학교수, 예술가, 학자 등등 지식인과 정치인 등을 끌고 나와서 길거리에서 공개처벌을 하는가 하면(심지어 핵미사일을 만드는 로켓 과학자들까지 반동 지식인으로 몰려서 두들겨맞고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내져 버렸다!) 정부기관 등을 무력으로 장악(!)하기도 하고, 음악과 무술, 전통문화 등은 죄다 부르주아지 시대의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며 금지(음악의 경우는 당에서 허가하는 음악만 가능), 마오쩌둥의 전투적인 지시를 받아들여야 한다며 길거리의 모든 거리 이름과 간판 등을 죄다 '화약냄새'나 폭탄, 총, 칼 따위, 그 외 혁명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것으로 바꿔버렸다고 하니 이게 얼마나 미친짓거리였는지 알 수 있다. 한편, 홍위병은 군과 경찰조차도 자신들이 어떻게 하고 싶어했으나 차마 그러진 못했고(…) 한편으론 군대와 경찰에도 홍위병이 시키는건 될 수 있으면 들어주고 간섭하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이들이 벌인 가장 큰 병크는 신호등의 빨간등이 정지신호란 것은 말이 안되며, 혁명을 상징하는 적신호는 전진신호가 되어야 한다고 이를 바꾼 것(…). 이것 말고도 자동차의 우측통행조차 '미 제국주의자들의 유산'이라고 바뀔뻔 했으나, 누군가가 '영 제국주의자들은 좌측통행'이라 지적해서 흐지부지됐다고(…). 잘들 논다
문화혁명 후반부에 들면 홍위병의 분파끼리 권력투쟁이 벌어졌는데, 말이 좋아 투쟁이지 총기까지 동원한 내전에 가깝다고 한다(…). 연길의 경우 홍위병끼리 강을 사이에 두고 영역을 확장한다음 시가전을 벌였다는 증언도 있다(…). 북경에서는 중국 최고 대학들이라는 베이징대와 칭화대 소속 홍위병 부대들이 충돌, 각 부대에 소속된 공돌이들이 각자 작업장에서 총기와 장갑차까지 만들어 상대방 캠퍼스로 레이드를 가는 사태도 터졌다고. 이거에 비하면 고연전-연고전은 양반이다(…).역시 대륙은 열도보다 스케일이 크다.
참고로 문화혁명 당시의 홍위병은 크게 두파로 나뉜다. 초기의 보수파와 후기의 조반파. 여기서 말하는 보수파는 진짜 보수주의를 뜻하는것이 아니라, 문화혁명에 보수적인 입장과 방법으로 일관한 패거리를 지칭하는 말이다. 초기의 무력투쟁 병크나 사원, 유적에 대한 공격은 대부분 이들이 저질렀다고 한다. 게다가 출신성분이 좋았기 때문에 문화혁명 초기에 잠깐 반짝하다가 사라져도 별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역시 어디든 강남어린이들은 존재
참고로 보수파나 조반파들은 마오동지의 어록이 적힌 마오어록을 끼고 살았으며 자기 교과서 암기도 제대로 하지못한 청소년들이였지만 마오어록은 이미 정복해서 토씨 하나도 안틀리고 외었고 너무 자주읽어서 책겉표지가 새까만적도 많다고. 이야 암기력 쩌는데?
반면 조반파들은 순수하긴 했지만 뭔가 병신같고 멋도 없는 아이들이었고, 후기의 파벌 싸움이나 고문은 대부분 이들이 저질렀다. 다행히도 70년대에 들어서는 이런식의 병크는 잦아들고, 하방활동을 하거나 70년대 중반의 중국 대지진때 다같이 구호활동에 나서는듯 좋아보이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먼저번에 벌여놓은 살육파티는 어쩔건데
홍위병의 준동이 꼭 나쁜것만은 아니었다고 회상하는 이들도 중국에 다수 존재한다. 그 당시에는 모두들 대문조차 닫고 살지 않았고, 배가 고프면 옆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는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며,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비록 마오쩌둥주의에 한정되어있긴 하지만 자유롭게 집회를 열 수 있었고, 젊은이들은 단체를 만들어서 지역 기관에 "사무실 좀 달라"고 신청하면 얼마든지 사무실을 내어주었고, 신문과 잡지를 발행할수 있었다고 하며 당국의 검열이 손에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
...허나 현실은 시궁창. 어째서 모두들 대문조차 닫고 살지 않을수밖에 없었는지, 어째서 배가 고프면 옆집에 가서 반드시 밥을 먹을수가 있었는지는 문화대혁명 항목에서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