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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위병 [엔하위키]
게시물ID : sisa_42022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anguine
추천 : 3
조회수 : 325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7/30 13: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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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대륙 최대의 흑역사를 이끈 또라이, 천하의 개쌍놈들.
전세계로 틍틀어도 이만큼 미친짓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한민국의 서북청년회, 나치 독일의 돌격대와 비슷한... 아니 그보다도 못한 집단으로 인식하면 된다. 그렇다. 나치보다도 못한 집단이라 볼수도 있다. 집단광기의 폐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들 중 하나.
1960년대의 일명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일어난 마오쩌둥의 퇴진 이후 마오쩌둥의 불타는 권력욕과 당대의 사회문제에 반발한 젊은이들의 상호작용으로 생겨난 일종의 극단주의 조직이다. 문화대혁명 기간동안 준동했고, 중국 근대화를 최소한 10년어치는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 집단. 이들의 만행으로 중국은 불과 10여년동안 100년이 지나도 메꾸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고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지금도 그 후유증이 상당부분 남아있을 정도.

병(兵)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지만, 중국공산당의 군대인 중국 인민해방군과 직접적인 연결은 없다. 본래는 학생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조직이었으며 준군사조직 같은 성향이 있기는 했으나 본질은 운동조직으로 군 조직과는 거리가 멀었다.

개요를 대략 요약하자면 이렇다.

2 마오쩌둥의 퇴진과 복귀

1960년대에 마오쩌둥은 소련처럼 중공업 생산능력이 강한 중국을 실현한다는 목적으로 최종목표 자체야 그럭저럭 옳았어도 문제는 중국의 당시 특성과 농업 생산력을 전혀 고려치않고 그대로 밀어붙인 '대약진 운동'을 추진했다. 농업은 농업대로 망하고 공업은 공업대로 말아먹은 끝장나는 대실패로 결말나고, 그나마 만들어진 수백만톤의 쇠붙이는 너무 품질이 낮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고철밖에는 되지 못했다. 거기다가 저 새는 해로운 새다 같은 병크까지 터트려서 결과적으로 중국 전역에서 아사자가 수천만명 단위로(!) 발생하자 덩샤오핑(鄧小平)을 위시한 신진세력들이 마오쩌둥의 하야를 요구하고,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한 마오쩌둥도 국가주석을 류사오치에게, 당서기를 덩샤오핑에게 넘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직후로, 권력에서 물러날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었던 마오쩌둥은 자신을 끌어내린 정적들의 정치적 생명력에 피해를 입히고, 잘 되면 다시 한번 권력을 잡으려고 중국 전체에 내분을 일으킬 생각을 하게 된다.

마오쩌둥은 우선 자신이 아직은 상당한 발언력에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부르주아와 자본주의 세력들이 다시 사회로 침투하고 있는데, 이들이 발붙이지 못하게 청소년들이 바로잡아야 한다.라는 어조의 연설을 한다. 그뒤 중국 전토 여기저기서 젊고, 앞뒤 안가리고, 신격화된 마오쩌둥에 대한 충성심으로 불타는 학생들을 주로 모아 '홍위병'이란 집단으로 묶고 지원하게 하는데...

사실, 마오쩌둥이 이 부분에서는 시대의 흐름을 또 한번 잘탔다고 볼 수 있다.역시 시대가 따라줘야... 당시에는 대약진의 실패로 중국공산당의 문제점이 드러나던 시기였고, 마오주의의 문제점도 드러나고 있었지만, 관료주의의 폐해도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관료가 아닌 젊은층에서는 점점 관료주의에 대한 폐해가 지적되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은 관료(일래야 관료)일 수가 없고, 게다가 당시에 마오를 까기에는 아직 사회주의 붕괴 테크트리를 못찍었다고 보면 된다.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하기 위해서 까임을 진행할 때는 순차적으로 관료->당->수뇌부 순이 된다.

홍위병도 원칙적으로는 자발적인 조직이었다. 원래 마오쩌둥이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밀리고나서, 공산당 수뇌부는 마오쩌둥을 뒷방 늙은이로 만들려 했다. 그 뒷방 늙은이 플랜은 다름이 아니라, 아무 실권없는 상징적 존재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중국에서 마오쩌둥 신격화라는 과정이 갑툭튀하기에 이른다.

3 흑역사의 시작

3.1 광기의 극단주의

자, 중국은 이제 대약진의 실패로 공산당의 집행능력 및 경제발전 능력에 심대한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원론적으로 좋은 말만 하는 마오쩌둥의 신격화가 가중되었다. 이렇게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가? 마치 종교와도 같은 원칙에 대한 숭배가 벌어진다. 쉽게 말해 극단주의 플래그가 뜨는 것이다.

마오쩌둥이 원칙적으로 하는 말은 사실 하나도 틀린게 없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라.", "함께 고생하고 함께 이겨내자." 문제는 개념은 개념일 뿐 그것이 실생활의 목적이 될때 과정이 병크를 타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는 것이다. 결국 홍위병이 자발적으로 생성되긴 했지만, 마치 이슬람 근본주의자같은 무시무시한 과격파가 형성되기에 이르른 것이다.

결국 극단주의로 흐른 젊은이들은, 감히 마오쩌둥을 깔 생각은 못하고, 이게 다 관료주의와 우리 사이에 숨어있는 구 문화의 잔재 때문이다라며 관료를 까기 시작한다. 까는 이유는 다양했다. "경직된 관료", "주자파", "숨어있는 우파", "장제스 똘마니" 등등...사실 당시 관료주의가 폐해로 지적된건 맞긴 맞으나 그렇다고 나라를 절단내면 어쩌자는거여...사실 당초 공격 대상은 부패한 관료와 마오쩌둥주의를 안따르는 관료 및 구 문화의 잔재들이었으나, 역시나 통제가 안되는 집단들인지라 얼마 가지않아 사회 각 분야로 번지게 된다.

쉽게 말해 무식하고 행동력만 넘치는 학생들이 중국을 온통 난장판으로 만들고 분열시키면 당연히 지도부 놈들이 짤리겠지. 어디한번 같이 죽어봐라라는 마오쩌둥의 이유와 이러한 목적으로 방관한 결과 탄생하게 되었다.

3.2 그들의 행각

문화 혁명과 홍위병은 한때 중국의 내정을 거의 초토화 레벨로 몰고 갔는데, 청소년들이 대학교수, 예술가, 학자 등등 지식인과 정치인 등을 끌고 나와서 길거리에서 공개처벌을 하는가 하면(심지어 핵미사일을 만드는 로켓 과학자들까지 반동 지식인으로 몰려서 두들겨맞고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내져 버렸다!) 정부기관 등을 무력으로 장악(!)하기도 하고, 음악과 무술, 전통문화 등은 죄다 부르주아지 시대의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며 금지(음악의 경우는 당에서 허가하는 음악만 가능), 마오쩌둥의 전투적인 지시를 받아들여야 한다며 길거리의 모든 거리 이름과 간판 등을 죄다 '화약냄새'나 폭탄, 총, 칼 따위, 그 외 혁명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것으로 바꿔버렸다고 하니 이게 얼마나 미친짓거리였는지 알 수 있다. 한편, 홍위병은 군과 경찰조차도 자신들이 어떻게 하고 싶어했으나 차마 그러진 못했고(…) 한편으론 군대와 경찰에도 홍위병이 시키는건 될 수 있으면 들어주고 간섭하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이들이 벌인 가장 큰 병크는 신호등의 빨간등이 정지신호란 것은 말이 안되며, 혁명을 상징하는 적신호는 전진신호가 되어야 한다고 이를 바꾼 것(…). 이것 말고도 자동차의 우측통행조차 '미 제국주의자들의 유산'이라고 바뀔뻔 했으나, 누군가가 '영 제국주의자들은 좌측통행'이라 지적해서 흐지부지됐다고(…). 잘들 논다

문화혁명 후반부에 들면 홍위병의 분파끼리 권력투쟁이 벌어졌는데, 말이 좋아 투쟁이지 총기까지 동원한 내전에 가깝다고 한다(…). 연길의 경우 홍위병끼리 강을 사이에 두고 영역을 확장한다음 시가전을 벌였다는 증언도 있다(…). 북경에서는 중국 최고 대학들이라는 베이징대칭화대 소속 홍위병 부대들이 충돌, 각 부대에 소속된 공돌이들이 각자 작업장에서 총기와 장갑차까지 만들어 상대방 캠퍼스로 레이드를 가는 사태도 터졌다고. 이거에 비하면 고연전-연고전은 양반이다(…).역시 대륙은 열도보다 스케일이 크다.

참고로 문화혁명 당시의 홍위병은 크게 두파로 나뉜다. 초기의 보수파와 후기의 조반파. 여기서 말하는 보수파는 진짜 보수주의를 뜻하는것이 아니라, 문화혁명에 보수적인 입장과 방법으로 일관한 패거리를 지칭하는 말이다. 초기의 무력투쟁 병크나 사원, 유적에 대한 공격은 대부분 이들이 저질렀다고 한다. 게다가 출신성분이 좋았기 때문에 문화혁명 초기에 잠깐 반짝하다가 사라져도 별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역시 어디든 강남어린이들은 존재

참고로 보수파나 조반파들은 마오동지의 어록이 적힌 마오어록을 끼고 살았으며 자기 교과서 암기도 제대로 하지못한 청소년들이였지만 마오어록은 이미 정복해서 토씨 하나도 안틀리고 외었고 너무 자주읽어서 책겉표지가 새까만적도 많다고. 이야 암기력 쩌는데?

반면 조반파들은 순수하긴 했지만 뭔가 병신같고 멋도 없는 아이들이었고, 후기의 파벌 싸움이나 고문은 대부분 이들이 저질렀다. 다행히도 70년대에 들어서는 이런식의 병크는 잦아들고, 하방활동을 하거나 70년대 중반의 중국 대지진때 다같이 구호활동에 나서는듯 좋아보이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먼저번에 벌여놓은 살육파티는 어쩔건데

홍위병의 준동이 꼭 나쁜것만은 아니었다고 회상하는 이들도 중국에 다수 존재한다. 그 당시에는 모두들 대문조차 닫고 살지 않았고, 배가 고프면 옆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는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며,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비록 마오쩌둥주의에 한정되어있긴 하지만 자유롭게 집회를 열 수 있었고, 젊은이들은 단체를 만들어서 지역 기관에 "사무실 좀 달라"고 신청하면 얼마든지 사무실을 내어주었고, 신문과 잡지를 발행할수 있었다고 하며 당국의 검열이 손에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

...허나 현실은 시궁창. 어째서 모두들 대문조차 닫고 살지 않을수밖에 없었는지, 어째서 배가 고프면 옆집에 가서 반드시 밥을 먹을수가 있었는지는 문화대혁명 항목에서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3.3 후폭풍

결과적으로 덩샤오핑을 비롯한 지도층은 권력에서 물러나고(그냥 물러난 정도가 아니라 국가주석이었던 류사오치는 홍위병에게 잡혀가 처참하게 고문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죽고, 당서기 덩샤오핑도 죽지 않을만큼 쳐맞고 집단농장에서 강제노동을 했을 정도. 그의 아들 덩푸팡은 고층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걸로 자살을 시도했다. 살아남기는 했지만 평생 하반신 불구로 살게 되었고, 이걸 계기로 장애인들의 인권을 위한 운동가로 활약했다. 물론 부정부패 건으로 구설수에 올랐지만), 그 사이에 마오쩌둥이 다시 한번 권력을 잡게 된다.

하지만 마오쩌둥조차도 홍위병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었다. 홍위병 일파들은 파벌분열과 반목을 하여 자기들끼리도 싸움질을 벌이게 되었으며, 심지어 마오쩌둥의 아버지가 부농이라고 공격하는 대자보를 붙이기에 이른다. 결국 마오쩌둥은 1968년 7월 28일 공산당 지도부에서는 홍위병 운동의 지도자들을 불러 운동의 정지를 명했고, 68년에서 69년에 걸쳐서 '상산하향운동'이 진행되었다. 이 운동은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젊은 학생들은 농민에게 배워야 한다'면서 학생들을 농촌으로 추방해버린 것으로, 처음에는 젊은이들도 좋아서 따랐지만 곧 그들은 낙후된 중국 농촌의 현실에 짓눌리고 말았다. 이 조치는 홍위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것있지만, 이 역시 너무 지나치게 한 나머지 젊은 인재들이 모두 도시에서 빠져나가고 '학력붕괴'가 일어나서 무학자 세대가 생겨났다고 할 정도로 중국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아무튼 문화혁명은 1976년에 그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마오쩌둥 사후 당연히 X됐다. 덩샤오핑이 다시 복귀하고 사회가 다시 건전하게 돌아가기 시작하게 되면서, 문화대혁명 자체가 중국에서도 까이는 추세라 당시 홍위병이었던 자들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조차도 시골지역 등에서 은둔해 살면서 자신이 홍위병이었다는 이야기는 입도 뻥긋 못하며 몸사리며 살고 있다고 한다. 더 무서운건 그들중 대부분이 과거를 뉘우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도 많다.

현대 중국의 정치/경제 엘리트 가운데 이공계 출신이 많은 것도 홍위병의 파괴적인 행각과 관련이 있다. 공산주의 국가야 원래 체제 통제 + 계획 경제 때문에 제대로 된 인문사회과학이 성장할 수 없는 환경이지만 개중에서도 중국은 유난히 문과 출신 엘리트가 맥을 못 추는 경향이 있었는데 문과 출신 엘리트들이 다시 나오지 못할 정도로 문화대혁명 때문에 인문사회과 학계가 황폐화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자나 공학자들도 힘들게 살긴 마찬가지였지만 문과 출신 학자나 엘리트들이 겪은 고충에 비하면 양반이라고.

4 평가

한국에서 이 단어가 대중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김대중 정부 초기에 소설가 이문열이 한국의 진보세력을 홍위병으로 지칭하면서 시작되었다. 무조건적인 외세배격, 정치가 개인에 대한 종교적인 지지, 유산계급에 대한 증오, 절차(법)를 무시한 정의실현, 폭력적인 면 등을 홍위병와 한국 진보세력의 유사성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폭력성이나 초법성, 국가공권력의 사실상의 묵인, 비민주적 권력체제의 옹호 등의 요소를 생각해 볼 때 한국의 경우 이러한 비판은 합리성을 결여한 것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

6.25 전쟁 중에 벌어진 좌우익간의 살인-보복극이 멈춘 후, 한국에서도 옛 시대를 잊고 새롭게 미국풍, 서구풍으로 시작하자는 사고방식이 주류였다. 1957년 미국에서 한국 문화재 전시가 열리자 놀랍게도 한국인들이 고리타분한걸 잊어야 하는데 부숴버려야할걸 왜 전시하느냐 시위를 벌인 충격적인 실화가 있다. 뭐 당시에는 "전통 = 유교 = 나라 망친 것"이란 편견이 팽배했던 시절이기도 하지만, 숭례문이 불탈때 비슷한 소리를 하던 이가 재미교포 사이트에서 글을 쓰던 걸 보면 지금도 남아있다.
 
 
출처: 엔하위키 미러 http://mirror.enha.kr/wiki/%ED%99%8D%EC%9C%84%EB%B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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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글을 보면 이문열이 한국의 진보세력을 홍위병으로 지칭했다고 하지만,
 
오히려 저는 그 반대쪽, 비상식으로 점철되는, 이름을 차마 이야기할 수 없는 그들이 떠오릅니다.
 
집단 광기라는건 정말 무섭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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