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보도국 편집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때 김한수는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편집실 모니터에는 어느 공포영화에서나 나옴직한 음침한 기와집 한채가 을씨년스럽게 버티고 서 있었다. 그가 막 조그셔틀을 만지려는 순간 김한수가 커피 한잔을 들고 들어섰다.
"어? 벌써 왔어? 또 있는대로 밟았구만?"
"야, 잔말말고 그 손에 들린 커피나 빨랑 주라, 오는데 얼어 죽는줄 알았다. 이젠 완전히 겨울이다, 겨울!"
김한수에게서 건네받은 커피를 한모금 입에 넘긴 해일이 그제야 살겠다는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성질 급한건 여전하구만, 그렇게 벌벌 떨지 말고 옷이나 좀 챙겨 입고 나오든지"
"새벽에 황당하게 사람 불러내 놓고 이젠 잔소리까지 늘어 놓을려구? 남 걱정 하지 말고 그렇게 불 나는 일이 뭔지 어서 용건이나 말해. 나 빨리 들어가서 다시 자야 돼! 요즘 귀신들한테 시달려 잠도 제대로 못 잔다구"
농담같은 그의 말 때문이었는지 김한수의 얼굴엔 금새 웃음기가 가셨다. 해일은 그의 진지한 표정이 웬지 마음에 걸렸다.
"그래, 본론부터 말할께! 너 요즘 귀신에 대한 특집 다큐 제작중이랬지?"
"그래서?"
"그럼, 혹시귀신을 찍거나 본 적은 있어?"
"자식! 지금 농담하냐? 뻔히 알면서 왜 그래? 정말 귀신이 있어서 프로그램 만드냐, 요즘 사람들 워낙 그 쪽으로 호기심이 많으니까 부랴부랴 특집 편성한거지. 근데 갑자기 그 얘긴 왜 묻는거야?"
잠시 망설이던 김한수가 이내 모니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오늘 내가 취재 가서 찍은 테잎인데....."
"아까 들어오면서 봤어. 근데, 요즘은 보도국에서도 귀신 찾아 다니냐?"
"그게 아니라.... 저 곳에서 오늘 세명의 등산객이 살해 당했어"
그리곤 책상위에 종이 몇장을 집어 건네며 계속 말했다.
"이따 읽어봐, 이건 그 사건에 대해 내가 작성한 내일 아침 뉴스 기사야!"
"젠장 내일은 시민들이 출근길을 살인사건 뉴스로 시작 하겠구만. 근데 그게 어쨌다는거야?"
"테잎을 잘 보라구"
말을 마친 그가 테잎을 되감아선 풀레이 했다. 카메라는 폐허가 된 기와집의 처마에서 부터 천천히 아래로 앵글을 움직이고 있었다. 부서진 문짝들, 찢겨져 너풀거리는 한지, 검게 그을린듯한 처마 기둥, 그리고 주위론 온통 어둠뿐이었다. 뭘 보라는건지 영문을 알지 못하고 열심히 화면을 보던 해일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잠깐, 거기!"
화면은 그가 소리친 바로 그 곳에서 멈추었다. 멈추어진 화면에는 카메라 가 기와집의 창고 내지는 부엌으로 보이는 왼쪽편의 부서진 문짝을 크로즈업으로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부서진 문짝 틈새 어둠속에서 뭔가..... 뭔가 번쩍이는 것들이 있었다. 푸른 빛을 띠고 있는 그것은 반딧불 같기도 하고, 혹은..... 광채를 내뿜는 짐승의 눈 같기도 했다. 더우기 그것들은 한두개가 아니었다. 하나, 둘, 셋..... 족히 열두세개는 될듯이 보였다. 정민수는 눈을 더욱 찡그리고 화면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도대체 저게 뭐야? 뭘 찍어 온 거야?"
김한수는 대답 대신 다시 화면을 플레이 시켰다. 카메라가 이번에는 기와집 대신 바로 김한수 자신과 낯선 남자 한 사람을 잡고 있었다. 김한수가 빠르게 말했다.
"내 옆에 있는 남자는 현장에 있던 형사야!"
두사람을 크로즈업으로 잡고 있던 카메라가 서서히 줌아웃 되면서 그들의 발 아래 가마니로 덮힌 시신들의 모습이 막 화면 안으로 들어 올 때였다.
"잠깐, 저건 또 뭐지?"
이번에도 화면은 그가 소리친 바로 그곳에서 정확하게 멈추었다. 김한수도 이미 그 곳에서 화면을 정지시키려고 준비한 것 처럼. 해일은 다시 화면 앞으로 얼굴을 바싹 갖다 댔다. 화면은 김한수와 형사라는 사내가 발 아래 가마니로 덮힌 시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들의 바로 뒤 어둠속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었다. 형체는 희미해서 뚜렷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마치 화면을 막 오버랩 시킬때와 같이 보일듯 말듯 희미한 모습으로 버티
고 선 것은 분명한 사람의 형상이었다. 그리고 그 형상은 똑바로 카메라의 렌즈를 응시하고 있었다. 뚫어지게 화면을 바라보던 해일이 김한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도대체 뭘 찍어 놓은거야? 카메라 포커스를 잘못 잡은 것 같지도 않고"
"사실은 그게 뭔지 나도 잘 몰라. 물론 카메라맨도 전혀 모르고.... 분명히 현장에서 촬영할때 화인더에는 아까 보았던 그런 광채나 지금같이 저런 이상한 형상 같은건 전혀 없었다는 거야. 네가 보기엔 어떠냐?"
"어떠냐니?"
김한수의 질문에 반문하며 화면에서 눈을 떼어 그를 돌아보던 해일은 그제서야 그가 이런 새벽에 자신을 급히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럼..... 넌 저게 카메라에 귀신이 찍힌 것이라고 생각한다는거야?"
"카메라에도 이상이 없고 현장에선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면 저 이상한 것들을 뭘로 설명하지?"
김한수의 표정은 그 어느 때 보다 진지해 보였다. 해일은 다시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여전히 그 이상한 형상은 똑바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고 마침내는 해일 바로 자신을 노려보는 듯한 섬뜩함까지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는 몇 번이나 테잎을 돌려가며 두가지 이상한 형상의 수수께끼를 풀어보려고 했지만 무엇으로도 그것들을 설명하긴 어려웠다.
"그리고 이건 현장에 있던 주민한테 얼핏 들은 얘긴데 말야, 그 집엔 귀신이 있다는 거야. 그러면서 취재한답시고 설치다 괜히 무서운 화를 당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라며 은근히 협박까지 하지 않겠어?"
"그래서, 설마 그 주민의 얘기를 믿는단 얘긴 아니겠지? 사실 나두 귀신의 존재를 전혀 부정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이번에 특집 프로 제작하면서 오히려 귀신이란 존재가 사람들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허무맹랑한 허상이란 확신이 들더란 말야! 대부분의 귀신 목격자들을 취재하러 다녀보면 뭔가 앞뒤가 않 맞는 구석이 반드시 한 두개씩은 나오더라구. 자신의 체험을 증명할만한 객관적인 증거나 일관성이 없다는 것도 공통점이구. 귀신이 나온다는 온갖 음침한 곳과 집들을 다 찾아 다니며 카메라로 찍어댔는데 귀신의 모습은 커녕 그 비슷한 것도 한번 찍힌 적이 없어. 그래서 나는 이번 프로그램의 결론을 아예 귀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끌고 가기로 했어. 사실 처음 기획부터가 좀 우스꽝스럽기도 했구"
해일은 상당히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의 의견을 얘기했다. 그러나 김한수는 그의 얘기에 단 한마디 반박도 없이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평소의 그였다면 결코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둘은 만나기만 하면 언제나 열띤 논쟁을 벌이곤했으니까.
"그래, 나 자신도 내가 지금 얼마나 황당한 얘길 하고 있는지 잘 알아. 하지만 사람에겐 이성적인 논리나 합리성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예감이나 본능같은게 있잖아. 처음 현장에서 그 기와집을 보았을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알아? 그야말로 지옥문 앞에라도 와 있는 기분이더란 말야. 난 그기와집을 그 곳에서 처음 본게 아니었거든. 서울서 내려오는 차안에서.... 잠든 동안 내내 나는 꿈속에서 그 기와집을 봤어. 뭔가에 계속해서 쫓겨다녔던 것 같은데 자세히 기억이 나질 않아"
김한수는 지금도 그 당시의 기분이되살아 나는지 양 어깨를 움츠렸다. 몇 시간후에 보아야할 이상한 기와집을 미리 꿈속에서 보았다는 김한수의 말에 해일은 비로소 쉽게 무시하지 못할 무언가가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예감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그때 다시 김한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뿐이 아냐! 화면속에 그 이상한 형상이 도대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는거야. 마치 나를 잡아 먹을듯 노려보는 것 같더라구! 게다가 그 집앞 마당에 있던 참혹하게 살해당한 시신들. 그 시신의 눈. 대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눈동자에는 지금까지 한번도 상상조차 해본적이 없는 무서운 공포가 깃들어 있었어! 자꾸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창피하게..... 하여튼 하고 싶은 말들은 다 했어. 어차피 판단은 네가 해야 하 니까. 아까 건네준 자료에 모든걸 자세히 적어 놨어. 집에 가서 읽어봐!"
김한수는 거기까지 얘기하고 급히 담배를 한대 피워 물었다. 2년전부터 완전히 담배를 끊었던 그 였다. 오랫동안 김한수를 봐 왔지만 오늘같은 그의 모습을 보긴 처음이었다. 얼마 후 해일은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편집실을 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한국대학 손남의박사는 정민수 PD가 가지고 온 VHS 테잎을 십여 차례에 걸쳐 반복해서 보는 동안 연신 몹시 흥미로운 일이라고 감탄하듯 소리쳤다. 그는 민속학, 특히 무속신앙 분야에서는 거의 국내 최고임을 자부하는 사람이었다. 이번 다큐멘터리 제작에 있어서도 그의 해박한 지식과 자문들은 해일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결국 그는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은 놀라운 결론을 내렸다.
"단정하긴 어렵지만 내가 보기엔 귀신(鬼神) 현상이 맞는 것 같군요. 외국 에선 몇 번 이런 테잎을 본 적이 있지만 국내에서 이런 테잎을 보기는 처 음입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딥니까?"
손박사의 놀랍다는 표정과 그의 말에 해일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새삼 화면을 쳐다 보았다. 여전히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는 그 미지의 형상. 저것이 귀신이라니. 손박사의 얘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처음 어둠속에서 푸른 광을 뿜고 있던 것은 금수(禽獸)의 귀(鬼)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금수라면?"
"짐승이죠. 그리고 두번째 형상은 사람의 귀인 것 같습니다. 물론 화면만 보고 확실하게 단정하긴 어렵지만 지금까지 제가 보아온 어떤 증거보다 귀신현상에 가까운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금수나 벌레, 물고기 같은 생물도 귀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경우는 죽으면 그 생명이 혼(魂), 귀(鬼), 백(魄) 세가지로 분열됩니다.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가고, 귀는 공중에 존재하게 됩니다. 즉 사후 인간은 천(天), 지(地), 인(人) 세곳에 걸쳐 존재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들 삼자중 귀와 백이 인간과 계속 접촉을 하게 되는데 보통 백은 묘속에서 3년간의 제사를 받고, 귀는 집안에 존재하면서 자손 4대의 제사를 받으면 만족하여 흩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백과 귀가 정당한 조의를 받지 못하거나 질병, 또는 살해당하거나 모함등으로 사형을 당한 자등의 경우는 그 원한으로 백과 귀의 기가 응결해서 귀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짐승과 벌레등의 생물이 귀신으로 변하는 것은 그 수령이 높은 경우와 사람과 접촉이 많은 것, 혹은 이것에 고통을 준 경우 등으로 그 정기가 응결해서 일종의 '저주'를 미치는 힘이 있는 귀신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귀신에 대한 이론은 주장하는 사람마다 여러가지로 분분하지만 지금 얘기한 부분들은 대체로 일치하는 사항들입니다"
방송국으로 향하는 내내 해일은 차속에서 야릇한 흥분과 설레임으로 들떠있었다. 어쩌면 의식속에서만 존재하던 귀신이라는 존재를 처음으로 온세상 사람들 앞에 드러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때 사람들이 놀라고 경악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엑셀에 올려진 그의 발엔 더욱 힘이 들어갔다. 방송국에 도착해서 그가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이번 다큐의 책임 프로듀서인 양희열 국장이었다.
"프로그램을 다시 제작하고 싶다고? 그건 안돼, 3일후면 방송인데 무슨 소리야. 그리고 그렇게 되면 예산에서부터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생긴다는거 정PD도 잘 알잖아! 만족스럽진 않지만 저번에 시사했을때도 큰 문제는 없었는데 갑자기 왜 그래?"
"부탁입니다, 국장님.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요"
"나참, 그래, 도대체 이유가 뭔가? 완성된 프로그램을 다시 제작하겠다는 이유가. 꼭 그래야만할 이유가 있다면 나도 한번 생각해 보지"
"진짜 귀신의 존재를 화면에 담을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소 들떠 있는듯한 해일의 말을 들은 양국장의 눈이 커졌다.
"귀신을 화면에 담을 수 있다고 했나, 방금?"
"예, 분명히 그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이... 이봐, 정PD! 도대체 뭘 믿고 그런 소릴 하는진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이 찍은 것이긴 하지만 이미 귀신의 모습이 담긴 테잎을 확보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그 곳에 가서 취재를 해 보고 싶습니다"
"이미 테잎이 있다고?"
양국장이 놀라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곤 찬찬히 해일을 바라보았다. 평소 성격이 좀 급하긴 하지만 결코 허튼 소릴 할 사람은 아니었다. 의자를 뒤로 까닥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양국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아, 대신 반드시 귀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야 해.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그야말로 쇼킹한 반응을 일으킬 수 있을거야. 자세한 기획서를 새로 올리라구. 필요한 모든 장비와 인원은 적극 지원해 줄테니까. 하지만 만약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자네나 나나 시말서 쓸 각오는 해야할거야"
* * *
강원도 횡성 경찰서의 윤혜경 형사가 국립 과학수사 연구소로부터 시신의 부검 결과를 통보 받은 것은 오후 3시경이었다. 예상대로 시체 두 구의 사인은 늑대과에 속하는 짐승의 습격에 의한 사망으로 추정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한 구의 시체 검시 보고서를 보면서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고서에는 직접적인 사인으로 작용한 흉기가 죽창과 같은 긴 구멍이 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보고서는 계속해서 시신은 모두 열 세번의 가격을 받았으며 범인은 열 세 번의 가격이 모두 완벽하게 몸을 관통하게 할 만큼 엄청난 힘을 지닌 것으로 추정된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녀는 짧은 숏커트 머리를 크게 한번 흔들었다. 아무리 앞뒤를 맞춰 보려고 해도 미심쩍은 구석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같은 일행 세명이 한 사람은 죽창에 의해, 나머지 두 사람은 짐승의 습격에 의해 거의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사망했다는 것을 어떻게 납득할수 있을 것인가? 그녀는 다시 처음 시신을 발견 했을때 찍어 놓은 사진들을 들여 다 보았다. 짐승의 습격을 받았다는 두 구의 시체는 흉가라고 불리는 기와집의 뒤편 언덕에서 약 20여미터 간격으로 발견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구의 시체는 바로 그 흉가의 앞마당에 마치 처형을 받은 것처럼 사지를 벌린채 놓여 있었다.
"이봐, 윤형사! 내가 지금 자기 생각을 한번 맞춰볼까?"
낯선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역시 구희열 반장이었다. 이제 막 오십대에 접어든 그는 이 곳 H군에서 만 20년 이상 근무한 토박이였다. 하지만 혜경의 판단으로 그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때로는 무능한 부패경찰인 것 같기도 하고 또 때로는 전혀 예기치 못한 예리한 관찰력과 추리력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러나 혜경의 눈에 비친 대부분의 그의 모습은 전자에 가까웠다.
"자기 지금..... 마구 가슴이 뛰고 전에 없던 의욕이 마구 마구 샘솟지? 잔인하고 끔찍한 살인범이 어디선가 당신과의 게임을 기다리며 또 다른 살인을 준비하고 있을 것 같지? 그리고 자기만이 그 살인범을 잡을 수 있는 영화속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이고 말야. 어때 내 말이 틀렸어?"
그는 마치 자신이 이미 그녀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등뒤로 다가왔다. 그리곤 그녀의 어깨위에 한 손을 걸치며 말했다.
"다 이해해! 나도 경찰 초년병 시절엔 말야. 희대의 연쇄 살인범 나타나기만 손 꼽아 기다렸다구. 미궁에 빠진 사건, 영원한 미스테리..... 이 얼마나 멋지고 스릴 넘치는 일이냔 말야. 모든 경찰들이 다 해결하지 못해도.....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고 놓쳐버린 그 조그만 단서. 그걸 바로 나만이 찾아서 그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 어때? 내가 너무 정곡을 찔렀나? 바뜨, 그러나! 그게 바로 모든 경찰 초년병들이 한번씩 걸리는 자아도취 내지는 구제불능이라는 병이라 이거야. 그러니 좋게 말할때 괜히 엉뚱한 데 신경쓰지 말고 자기 본연의 임무나 열심히 하란 말야"
"반장님! 이건 우리 관내에서 발생한 사건이예요"
"알아, 알아! 하지만 어제 서울에서 내놓라 하는 형사분들이 이미 조사해 갔잖아. 그런 골치 아픈 강력 사건은 서울에 잘난 분들한테 맡겨두고 우린 그저 곁에서 협조나 잘 해주면 되는거야, 알겠어? 막말로 우리가 충분한 예산이 있어, 인원이 있어? 그저 대충 수사하는 시늉만 보여주면 그만이라구, 알겠어? 그리고 꿈자리 사납게 그런 사진은 뭐하러 자꾸 들여 다
봐, 젊은 처녀가? 어서 치워!"
"반장님!"
"그래, 알았어. 또 처녀라는 소리 했다고 기분 상한다 이거지? 그래 미안해, 미안! 그리고 나 관내 순시 좀 다녀 올테니까 쓸데없이 싸 돌아 다니지 말고 자리 지켜, 알았지?"
쳐다보지도 않은채 일사천리로 말을 쏟아붓곤 유유히 사라지는 구반장의 뒷모습을 보면서 혜경은 그야말로 가슴에 불이라도 나는 기분이었다. 구반장의 말대로 그녀는 올해 초 경찰 학교를 졸업한 스물 넷의 경찰 초년병이었다. 우수한 졸업 성적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굳이 이 곳 횡성 경찰서를 자원한 이유는 이 곳이 바로 그녀의 고향이기 때문이었다.
"윤형사님, 참으세요. 구반장님 원래 그렇잖아요"
그녀를 위로한 것은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올해 초 고동학교를 졸업한 후 경찰에 입문한 박호철 순경이었다. 집안이 어려워 군을 면제받은 대신 그가 택한 직업이 경찰이었던 것이다. 그는 윤형사를 누나처럼 따르고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도 이번 사건은 뭔가 이상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아무리 서울에서 형사들이 다녀 갔다지만 우리만큼 이 곳 사정에 밝겠어요? 열심히 해보세요,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도울 테니까. 우리 관내에서 생긴 사건을 우리가 모른 척 할 순 없잖아요"
그의 따스한 말을 듣고 나니 꽉 막혔던 가슴이 조금 뚫리는 것 같았다.
"박순경, 고마워. 나도 성질이 워낙 지 랄 같아서 오늘처럼 반장님한테 스팀받으면 정말 참기 어렵더라구. 나 답답해서 좀 나갔다 올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