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그녀는 검은 물살 속으로 휩쓸렸다. 눈앞에 구반장과 박호철이 놀라는 모습이 보였지만 손을 뻗치기엔 먼 거리였다.
"윤형사!"
구반장이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지만 빗소리와 그녀를 덮치는 검은 물살 때문에 그녀는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빠른 속도로 아래로 떠내려 간다는 생각과 끊임없이 입안으로 몰려드는 검은 물이 그녀의 의식을 둔화시키고 있었다. 헤엄을 쳐보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강한 물살은 몸의 균형을 잡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차츰 몸에 힘이 빠져나가고 의식이 흐려지면서 그녀는 죽음이란 단어를 자연스레 떠올렸다. 그때 그녀는 누군가 자신의 몸을 붙잡는 손길을 느꼈다. 그녀는 그것이 현실의 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더 이상 아래로 떠내려가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끌어올려, 어서!"
구반장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최대한 의식을 가다듬어 고개를 돌렸다. 한 손으론 나뭇가지를 붙잡고 한손으로 자신을 붙잡은채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구반장의 힘겨운 얼굴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물 밖에선 박호철이 몸이 반쯤 물에 잠긴채 그녀를 끌어 올리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얼마간의 사력을 다한 사투끝에 혜경이 가까스로 끌어올려지고 구반장이 비틀거리며 물에서 기어 나왔다. 구반장은 나오자마자 혜경의 옆에 나란히 쓰러지듯 드러누워 가뿐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혜경은 기침을 심하게 했다. 계속해서 구역질이 나와서 그녀는 속이 몹시 쓰라렸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박호철의 걱정스런 얼굴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옆을 돌아 보았다. 그녀보다 더 지친 모습의 구반장이 꼼짝도 하지 않고 곁에 누워 있었다. 그는 혜경이 정신을 차린 한참 후에도 그대로 그렇게 누워 있었다.
* * *
해일이 쓰러질듯 고개를 넘었을때 그 아래에는 나머지 스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고개를 넘어선 후에야 해일과 혜진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오던 길을 되돌아 갈 사람은 없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해일은 무너지듯 쓰러졌다. 해일을 부축한 사람은 이정우였다. 그는 두려운 눈길로 물었다.
"혜.....진이는요?"
해일이 고개를 떨구었다. 이정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
"설마?"
해일이 곤혹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김혜진은 이정우와 가장 가까웠다. 이정우는 마치 김혜진을 돌보지 못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는 듯 괴로워했다. 김감독이 끼어 들었다. 그는 비교적 안정되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그것들이 다 무엇 이었습니까?"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것들은..... 광에서 나왔어요"
"광에서요?"
"그들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광에서 퍼런 광채를 번득이며 기어 나오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요, 처음 보는 짐승들이었어요. 늑대 같기도 하고..... 그리고 그들 속에 누군가가 있었어요"
"누.... 누군가라니?"
"틀림없이 사람이었어요. 놈들은 긴 막대기 같은 것을 들고 있었는데 그 놈들이..... 그것으로..... 혜진이를 향해 내리 쳤어요. 몇번 더.... 참혹하게 내리치곤..... 짐승들이......"
어느 누구도 더이상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그들의 얼굴엔 더욱 분명한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들의 모습에서 해일은 이번 일이 바로 자신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생각때문에 견딜 수 없이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한편으론 남아있는 사람들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절박한 사명감이 그를 압박해 들어왔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끔찍한 짐승들과 낯 모르는 살인마가 잠시후면 자신이 넘어온 바로 그 고개에 얼굴을 내밀 것이다.
"다들 마음을 단단히 먹읍시다. 이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무엇인진 아직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어서 이 곳을 벗어나야 해요, 마을로 가서 도움을 청합시다. 그 사람들은 뭔가 알고 있을 겁니다. 어서 서둘러요!"
스텝들은 다시 앞쪽에 보이는 불빛을 향해 허우적거리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해일은 맨 뒤에 쳐져 계속 뒤를 돌아보며 걸었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그 끔찍한 짐승들의 날카로운 이빨이 등줄기를 꿰뚫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렌턴 하나도 들고 나온 사람이 없어 앞장 서 걷는 김감독은 계속해서 바닥을 나 뒹굴렀다. 마을까지만 가면 무슨 수가 생길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그들에게 힘을 불어 넣었다. 마침내 마을로 들어서자 첫번째 집의 마당으로 김감독과 배영환이 뛰어 들어가 마구 소리를 질렀다. 그 집엔 다행히 불이 밝혀져 있었다. 스텝들의 얼굴에 다소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아무도 안 계세요, 좀 도와 주세요! 아무도 안 계세요?"
그러나 안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강은영이 소리쳤다.
"방문을 열어봐요, 불은 켜져 있잖아요!"
김감독이 방으로 다가가 방문을 왈칵 잡아 제꼈다. 그러나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없어, 아무도 없어!"
"그.... 그럼, 어서 다음 집으로 가봐요, 어서!"
"다들 나누어서 사람들을 찾아 봅시다. 저기도 불켜진 집이 한 집 있잖아요"
우왕 좌왕하며 스텝들이 삼삼오오 흩어져 소리를 질러대며 사람들을 찾았지만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한 사람도 보이질 않고 집들은 하나같이 텅비어 있었다. 스텝들의 얼굴에 다시 초조함과 불안함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불행히도 그들의 등뒤 어둠속에서 다시 짐승들의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놈들이 왔어!"
누군가가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거기도 아무도 없어? 이게 어떻게 된거야!"
두서없는 외침들이 어둠속에서 터져 나왔고 짐승들의 소리는 더욱 가까워 졌다.
"잠깐, 이리들 와봐요, 어서!"
겁에 질려 소리친 사람은 오세창이었다. 스텝들이 정신없이 그 곳으로 몰려 들었다. 그가 가리킨 곳은 어느 집의 커다란 창고였다. 나무 문짝이 든든하게 잠겨있는 그 창고를 문틈으로 들여다 보던 김감독이 '헉'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물러섰다. 해일이 앞으로 나서 안을 들여다 보았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어둠속에 웅크린 마을 주민들의 겁에 질린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아까 그들을 찾아와 호통을 치던 노인들 세사람도 함께 있었다. 해일이 문짝을 힘껏 걷어차며 소리쳤다.
"이봐요, 문 좀 열어주세요, 좀 도와 주세요!"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번엔 김감독이 더욱 세게 문짝을 걷어차며 소리를 질렀다.
"제발, 문 좀 열어 주시오, 짐승들이.... 짐승들이 온다구!"
그때 등뒤에서 스텝들이 비명을 지르며 악을 썼다.
"악!"
"와....왔어, 놈들이 왔다구!"
"으으...... 저것들이 다 뭐야?"
강은영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러댔고 촬영보 박희철도 사시나무 떨듯 부들 부들 떨었다. 과연 마당 바로 앞에는 흠뻑 비에 젖은 검은털에 눈에선 시퍼런 광채를 내뿜는 짐승들 수 십마리가 탐욕스런 이빨을 드러낸 채 금방이라도 스텝들을 향해 으르렁대며 다가오고 있었다.
"도.... 도대체 저것들이 어디서 나타난거야!"
"설마, 우리가 꿈을 꾸는건 아니겠지?"
참다 못한 박희철이 창고문을 정신없이 두드리며 악을 써댔다.
"문 열어, 이 새 끼 들아! 문 열란 말이야!"
이번엔 스텝들이 모두 달겨들어 문에 몸을 부딪히며 절박하게 소리를 질러댔다. 마치 그곳이 생사의 경계선이나 되는 것처럼.
배영환이 울음을 터뜨리며 울부짖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박희철이 앞으로 두어걸음 나서며 옆에 있던 삽을 집어들곤 휘두르며 악을 썼다.
"덤벼, 이 새 끼 들아! 덤벼!"
나머지 스텝들도 짐승들을 향해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극도의 공포와 긴장감에서 터져 나오는 절박한 외침이었다. 그때 어둠속 어디선가 해일이 불과 몇 분전 들었던 그 섬뜩한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다시 들려왔다. 해일은 그 소리가 누구의 소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재빠르게 나타났다간 다시 숨어버리곤 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는 어김없이 나무 막대가 들려 있었다.
"쉬익, 쉭! 쉭!"
약속이나 한 듯 어둠속에서 들려오는 그 소름끼치는 쇳소리에 맞추어 놈들 중 한마리가 기다렸다는 듯 박희철의 손을 향해 달겨들었다. 놀란 박희철이 삽으로 내려치는 찰나 그보다 앞서 짐승의 허연 이빨이 박희철의 손목을 낚아챘고 참혹한 비명소리와 함께 박희철의 손에서 삽이 떨어졌다. 박희철과 짐승이 한덩어리로 바닥을 나뒹굴렀다. 이번엔 주위를 맴돌던 또 한마리가 그에게 달겨들었다. 놈은 곧바로 박희철의 다리를 공격했다.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그의 온 몸이 피로 물들었다.
이어서 또 한마리, 또 한마리...... 놈들은 스텝들의 동정을 살피며 침착하게 한마리씩 가세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대여섯 마리가 동시에 고통스럽게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박희철에게 달겨들었다. 서너 마리가 동시에 그에게 달겨 들었다. 끔찍한 광경 앞에 모두들 미친 듯 악을 썼다. 극도의 공포가 그들의 온 몸을 휘감아 왔다. 그러나 짐승들은 서로 박희철을 물어 뜯으려고 자기들끼리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나머지들은 스텝들을 향해 더욱 다가섰다. 오세창이 울먹이며 소리쳤다.
"저것들은 귀신도 유령도 아닙니다. 끔찍한 괴물들이라구요! 이제 우린 다 죽은 목숨이예요. 다 죽었다구요!"
그의 말대로 해일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김한수의 공포와 두려움이 고스란히 그의 가슴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때 엄청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두번, 세번..... 그러나 그건 천둥소리가 아니었다. 총소리, 총소리였다. 짐승들 서너 마리가 순식간에 쓰러져 갔다. 그리고 나머지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총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스텝들은 모두가 넋이 나간 얼굴로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세사람의 그림자가 곧장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구반장 일행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맞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짐승들을 쫓으며 마당으로 들어서던 혜경은 마당에 있는 박희철의 시체를 보고 고개를 돌렸다. 구반장이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요?"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아직도 그들은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해일이 아직도 굳어진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네, 저.... 전부입니다"
"마을 사람들..... 주민들은 어디 있소?"
"저기 창고속에....."
구반장이 스텝들을 헤치고 창고 앞으로 다가가 소리쳤다.
"나, 구희열입니다. 문 열어요. 이젠 우리도 대항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 없어요!"
그러나 여전히 창고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번엔 저들이 모두 죽일거요. 더이상 우릴 살려두지 않을거라구!"
구반장이 금방이라도 문을 부술듯 소리치자 비로소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일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자신들을 찾아왔던 노인중 하나라는 것을 알았다.
"그냥 다른 사람들이나 데리고 가시오. 우리가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소? 그리고 유령들을 상대로 우리가 무슨 수로 싸운단 말이요? 우린 이 곳을 떠나지 않겠소"
"망할..."
구반장이 창고의 문을 주먹으로 후려치곤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혜경은 아직도 가슴이 심하게 떨렸다. 무기가 필요하다는 구반장의 말은 현실로 나타났다. 갑자기 어디서 저렇게 많은 이상한 짐승들이 나타났는지 그녀로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구반장과 마을 주민들이었다. 그들은 최소한 지금의 괴이한 상황들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확신이 그녀의 의식을 강하게 사로잡고 있었다. 그때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이 있었다. 검은 캡모자를 눌러 쓴 창백한 표정의 해일이었다. "하두 정신이 없어 미처 감사하단 말도 제대로 못 했습니다. 댁들이 아니었으면 정말 끔찍한 일을 당할뻔 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윤혜경입니다. 이 곳 H군 경찰서에 있습니다. 다들 무사한가요?"
"보시다시피 별로 좋은 상태가 아닙니다. 여기 이 사람 말고도 이미 두명이나 죽었습니다"
"두명이 더 죽었다구요?"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짐승들을 조종하고 있습니다. 전 그 끔직한 살인마를 봤습니다"
"살인마라구요?"
혜경이 눈을 크게 뜨고 소리치자 구희열 반장이 그들의 대화를 끊으며 거칠게 소리쳤다.
"아직 끝난게 아니요!"
그 소리에 잠시 정신을 차렸던 스텝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들은 모두 공포와 추위에 떨고 있었다. 김감독은 죽은 박희철의 시신 옆에 앉아 말이 없었고 이정우는 계속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불안해했다. 그의 손엔 굵직한 몽둥이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배영환과 강은영은 서로를 굳게 껴안고 있었다. 강은영은 남은 스텝중 가장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배영환은 그녀를 위해 자신의 잠퍼를 벗어서 걸쳐 주었지만 어차피 비에 흠뻑 젖어버려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다. 구반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섰다. 그는 흉가쪽 고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놈들은 다시 몰려 올 겁니다"
"그럼, 어서 저 창고 안으로 우리도 피신을 해야죠. 문도 튼튼해 보이고.... 어차피 짐승들입니다. 저 안까지 들어오진 못 할겁니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그때 이곳을 빠져나가면 되잖아요. 어서 저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을 열라고 하세요, 아니면 강제로라도....."
이정우였다. 그는 금방이라도 몽둥이로 창고문을 두들길 것 처럼 창고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구반장이 다시 소리쳤다.
"그만 둬요. 다 소용없어요. 그 안에 숨는다고 안전할 순 없어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구반장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오늘밤 안으로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합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살 길입니다. 어차피 완전한 살 길은 아니지만....."
구반장은 계속 수수께끼 같은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참다못한 해일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구반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구반장이 이 이상하고 괴이한 일들에 대해 뭔가 알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대책을 강구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게 있습니다. 경찰들이라고 하셨죠? 그럼, 우선 현재의 상황에 대해 저희한테 설명부터 해주십시요. 당신은 분명 알고 있을 겁니다. 그 짐승들이 어디서 왔으며 아까 주민들에게 한 이상한 얘기들, 그리고 그 짐승들을 데리고 다니는 그 살인마는 누구인지....."
해일을 마주보는 구반장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긴장되어 있었고 주저하고 있었다. 혜경 또한 터질듯한 궁금증으로 그런 구반장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설픈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구반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얘기였다.
"그것들은 모두 유령들입니다. 살아있는 유령들....."
모두들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때 뒷쪽에서 몸을 잔뜩 웅크린채 떨고있던 오세창이 몹시 흥분하여 구반장의 앞을 가로막듯 나왔다.
"말도 안돼요! 지금 우릴 모두 놀리는 겁니까? 유령이라니요? 나는 이 분야의 전문갑니다. 저건 귀신이 아니라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는 끔찍한 괴물들이라구요! 괴물! 귀신이 사람을 저렇게 물어 뜯어 죽인다는 얘길 들어봤습니까? 귀신이 총에 맞았다고 죽었다는 얘길 들어 봤습니까? 나는 귀신을 찾으러 온 사람이지 저런 괴물을 만나러 온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는 지금껏 자신의 내면에 억제되어 있던 공포심을 모두 발산하기라도 하려는 듯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는 구반장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향해 불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직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몹시 겁이 많은 사람 같았다.
"경찰이면 어서 우릴 구해줄 생각을 해야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릴 지껄이는 겁니까? 아까 조연출의 말대로 모두들 저 창고안에 숨으면 그만입니다. 뭐하러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합니까? 다들 정신들 차려요, 정신!"
해일이 오세창을 잡아 끌며 그를 진정시키려 햇다.
"우선 저 분의 얘길 들어봅시다. 어쨌건 우릴 구했잖아요"
그러나 그는 해일의 손을 뿌리치곤 이번엔 오히려 해일에게 화를 냈다.
"정PD 당신도 할 말 없어, 이 모든 책임은 당신이 져야 한다구! 처음부터 이곳에서 살인이 있었다는 얘길 왜 안 했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바로 그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난 곳이 이곳이었다고 왜 얘길 않했냔 말야. 그랬으면 난 이곳에 따라오지도 않았을거야. 그때 죽은 사람들 모두가 바로 방금 죽은 박희철과 같이 물어 뜯겨 죽었잖소? 그런데 무슨 귀신을 찾으러 오냔 말야!"
그러나 그의 불만은 더이상 계속될 수 없었다. 혜경이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놈들이 다시 왔어요"
과연 그녀의 말대로 어둠속엔 아까보다 더욱 많은 푸른 광채들이 이쪽을 노려보며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