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히도 더이상 입씨름할 시간이 없을 것 같소. 살고 싶은 사람들은 따라 오시오. 우리 윤형사와 박순경이 앞장을 서고 내가 맨 뒤에 따라 갈 것이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들려 주겠소. 물론 살아남은 사람만 내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오. 윤형사, 박순경! 어차피 다리가 끊어졌으니 내천리로 해서 돌아가는 수 밖에 없으니까 앞장을 서라구!"
"다리가 끊겼다구요?"
해일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물이 너무 불어서 다리가 무너졌소"
그리곤 말을 마친 구반장이 죽은 박희철의 손에 들려 있던 부삽을 빼내어 해일에게 던지며 소리쳤다.
"남자들은 주위에 무기가 될만한 것들을 하나씩 잡으시오.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김감독은 낫을 잡았다. 기가 막힌듯 사람들을 바라보던 오세창이 무슨 짓이냐는 듯 다시 소리를 질렀다.
"다들 정신이 어떻게 된거 아니야? 이 밤중에, 이 빗속에서 산길로 도망을 가잔 말이야? 다들 미 쳤 어, 미 쳤다구! 더구나 다리도 끊겼다잖아! 우리가 살 길은 이 창고밖에 없다구, 다들 내 말 듣는거요?"
그러나 그의 말을 귀 담아 듣는 사람은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김감독이 그의 어깨를 툭치며 낮게 속삭였다.
"방금 저 양반이 여기 잇으면 죽는다 잖소? 살고 싶으면 시키는대로 하시오. 내 경험으로 이럴때 입씨름해서 득 본 경험이 별로 없으니까"
혜경이 맨 앞에서 렌턴 불빛 하나에 의지하여 산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손에는 38구경 권총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어둠속에서 괴물들이 달려들 것 같아 그녀는 계속해서 주위 어둠속으로 불안한 불빛을 쏘아댔다.
그녀의 바로 뒤를 따르던 박호철이 자신의 손에 들린 권총을 흔들어 보이며 애써 웃으며 말했다.
"윤형사님,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진 모르지만 맨날 책상에서 볼펜 굴리는 것보단 훨씬 신나는데요? 무슨 영화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고.... 이럴줄 알았으면 좀 더 든든하게 무장을 해올껄 그랬나봐요"
앳띤 얼굴의 박호철이 그래도 농담을 던지며 보이는 여유가 혜경에겐 그나마 약간의 안정을 가져다 주었다. 모두들 최대한 앞 사람과의 거리를 좁혀서 뒤를 따랐고 구희열 반장만이 다소 떨어져서 뒤따르고 있었다. 불과 4. 5미터만 앞사람과 떨어져도 쉽게 길을 잃을 것처럼 시야는 온통 빗물과 어둠뿐이었다. 그때 뒷쪽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구반장이 쏜 총성이었다.
강은영이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 앉는 것을 배영환이 가까스로 부축했다. 강은영이 울먹였다.
"선배, 도저히 못 가겠어요. 너무 무서워서 발이 안 떨어져요"
"여기서 주저 앉으면 안돼. 우린 무사히 빠져 나갈거야. 총도 있고 경찰도 있잖아. 설마 그 까 짓 짐승들이 뭘 어쩌기야 하겠어?"
배영환이 그녀를 위로하며 일으켰다. 그러나 그 역시 이 끔찍한 밤을 무사히 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선 막막한 마음뿐이었다. 뒤에선 구반장의 좀 더 빨리 전진하라는 다급한 음성이 재촉하고 있었고 총소리도 계속 되었다. 처음 출발과는 달리 사람들 사이의 간격은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진흙탕으로 변한 산길을 걷기란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오랫동안 억수같은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은 탓에 몸은 점점 더 무거워 지기만 했다. 해일이 앞쪽으로 나서서 혜경의 뒤로 바싹 붙었다.
지금은 박호철이 맨 앞에서 일행들을 이끌고 있었다.
"저기, 윤형사님이라고 하셨나요?"
등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혜경이 고개를 돌렸다.
"네, 윤혜경입니다"
얼핏봐선 결코 예쁜 얼굴이 아니었지만 그녀의 눈동자엔 총명함과 날카로움이 배어 있었다. 해일은 그녀에게서 서울의 도심에서나 볼 수 있는 가녀린 여자들과는 분명히 다른 강인함과 고집스러움도 엿볼 수 있었다.
"당신을 본 적이 있어요"
"저를 보셨다구요?"
"그래요, 아까 윤형사님이 나머지 두분과 저희를 구하러 나타났을 때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처음엔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더군요. 그런데 지금 길을 걸으며 곰곰히 생각해보니 제 친구가 이 곳에서 살인사건 취재를 위해 촬영해 온 테잎에서 보았더군요"
그녀는 해일이 자신을 테잎에서 이미 보았다는 말에 쑥스러운지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그랬군요, 그럼, 그때 취재 왔던 기자가 친구분이세요?"
"네, 아주 절친한 친구였죠. 이번에 제가 이 곳에 온건 프로그램 제작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친구의 죽음에서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이상한 점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상한 점이라니요?"
"윤형사님은 아까 반장님이 말한 유령이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글세요, 저는 별로 그런 것들을 믿는 편이 아니라서..... "
"저는 그 유령이라는 얘기를 믿습니다. 제 친구는 죽기 전날 저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아까 우리를 덮쳤던 그 괴물들이 어디를 가든 자신을 따라온다고 했습니다. 그것들 한테서 도망갈 수 없다고....."
혜경이 놀랍다는듯 해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아까 목촌리 주민들이 한 말과 똑 같잖아요. 그리고 반장님도 그런 비슷한 얘길 했고......"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얘깁니다. 어떻게 서울같은 도심에 저런 괴물들이 나타나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을 죽인단 말입니까?"
"그 부분은 저도 진작부터 궁금해 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 괴물들이 어디서 나온지 아십니까? 바로 마을 건너편 흉가의 광속에서 나왔습니다"
"광속에서요?"
"분명합니다.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독히 보았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그 광속에서 촬영을 할때만 해도 광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괴물은 커녕 쥐 새 끼 한마리 없었단 말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군요. 하지만 정말 유령이라면 우리가 쏜 총에 그렇게 피를 흘리며 죽을 수가 있을까요? 그건 분명 우리가 흔히 보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어요. 아참, 그리고 아까 누군가가 짐승들을 조종한다고 하셨죠?"
"네, 놈들이 우리 스텝중 한명을 죽였어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긴 막대기 같은 것으로....."
"막대기라구요?"
"확실히는 보지 못했지만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게 죽창이라면 어떨까요?"
"죽.... 창이요?"
그때 뒷쪽에서 김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PD! 너무 빨라요. 잠깐 멈춰요!"
혜경과 해일이 뒤를 돌아 보았을때 바로 뒤에 따라오고 있어야할 배영환과 강은영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이정우, 오세창, 김감독까지. 혜경이 앞쪽 박호철을 향해 다급하게 소리쳤다.
"박순경, 잠깐 멈춰! 이를 어쩌지? 우리가 너무 빨리 걸은 모양이군요"
혜경은 황급히 뒤쪽 어둠속으로 렌턴의 불빛을 쏘았다. 해일이 힘껏 소리쳤다.
"김감독님, 어디 계세요?"
그러자 뒤쪽 어둠속 약 20-30미터 되는 거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뒷쪽에 있어요. 어디 옆길로 잘못 빠진 것 같아요"
"모두들 거기 있나요?"
"그래요, 하지만 그 반장이라는 양반은 여기 없고 아직 뒷쪽에 있는 것 같아요"
"김감독님, 그럼 저희가 데리러 갈테니까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중간 중간에 소리를 지르세요"
해일과 혜경, 그리고 박호철이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 가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은 거리에 떨어져 있음에도 소리만으로 찾아간다는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김감독님, 저희들 불빛 보이시죠?"
"그래요, 보여요!"
"금방 갈테니까 그 곳에서 꼼짝말고 기다리세요"
세사람이 더듬거리며 산길을 헤쳐갈 때였다. 얼마간 잠잠하던 총성이 뒷쪽에서 다시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김감독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강은영의 비명소리가 어둠을 가르고 들려왔다.
머리털이 쭈삣거리는 긴장감에 세사람의 발길이 더욱 바빠졌다. 어둠속에서 남아있는 사람들의 공포에 질린 비명소리가 상황이 더욱 위급해져 가고 있음을 쉽게 짐작하게 했다.
"저리가 이 자식들아! 저리 가란 말이야!"
"살려줘! 제발! 살고 싶다구!"
"오선생, 이리 돌아와! 어서 돌아오라니깐! 오선생!"
그 이후로는 말 소리조차 제대로 알아 듣기 힘든 참혹한 비명과 외침들이 여기저기서 두서없이 울려 퍼졌다. 괴물들이 일행을 덮친게 틀림없다고 세 사람은 생각했다. 모두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해일이 악을 쓰며 미친듯 앞으로 달려갈때 해일은 다시 어둠속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쉬익! 쉭! 쉭!"
누군가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몰렸다는 절박감이 느껴졌지만 마음만 앞설 뿐이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소리치며 달렸다.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참아요, 조금만!"
바로 앞쪽에 피런 광채들이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해일은 그 중 한마리를 향해 삽을 휘두르며 달려갔고 혜경과 박호철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짐승들의 으르렁거림, 총소리, 악쓰는 소리, 비명소리. 해일은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 꿈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느끼고 있었다. 박호철은 거의 본능적으로 권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그는 조준같은 것을 할 엄두도 내질 못했다. 그는 그저 총을 쏘고 있을 뿐이었다. 반면 윤혜경 형사의 총은 정확하게 짐승들을 쓰러뜨렸다. 그녀는 지금 막 누군가를 덮치는 짐승 한마리를 또다시 쓰러뜨렸다. 그녀가 달려가 보니 김감독이었다. 그는 어둠속에서 아직도 낫을 휘두르며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혜경이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어요?"
"모..... 모르겠소. 젠장, 놈들이 갑자기 나타났어요. 오선생이 먼저 달아나기 시작하자 몇마리는 오선생의 뒤를 쫓고 나머지는 우릴 덮쳐 왔어요"
짐승의 발톱에 긁힌 그의 왼쪽 뺨에서 흐른 피때문에 그의 얼굴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박호철이 그들에게 달려왔다. 그는 아직도 흥분한채 손에 쥔 권총을 부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이..... 일단 놈들이 물러간 것 같아요. 저쪽에 세 사람 찾았어요. 지금 정PD와 함께 있어요.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안 보여요"
구반장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몇 분 후였다. 일행중 김감독과 다리에 상처를 입은 배영환, 그리고 강은영만 찾았고, 이정우와 오세창이 보이질 않았다. 일행들이 사라진 사람들의 이름을 목청껏 부르며 안타까워 하고 있을 때 구반장이 비틀거리며 다가와 일행들의 앞에서 쓰러졌다. 그의 어깨는 검붉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고 그의 동공은 거의 풀려 있었다.
"반장님, 정신 차리세요!"
혜경이 소리치며 그의 얼굴을 끌어 안았지만 그는 이미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말했다.
"오.... 누구라는 사람..... 그 사람은 이미 죽었소. 이젠 이 사람들을 윤형사가 책임져야 해! 당신들은 이제 모두 같은 배를 탄 거요! 무사히 이 밤을 넘긴다고 해도 놈들에게선 벗어날 수 없어요"
해일이 그의 옆에 주저 앉으며 낮게 속삭였다.
"이젠 알려 주세요.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건지...."
그는 대답 대신 혜경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든 게 다 업보야. 그동안 난 너무 힘겨운 싸움을 해왔어. 윤형사, 이 일에 윤형사를 끌어 들이고 싶진 않앗는데 어쩔 수 없이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말았군. 내 책상 서랍에 보면 낡은 노트가 한 권 있을거야. 그걸 보면 그 동안 이 곳 목촌리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을거야"
그는 가뿐 숨때문에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목촌리 사람은 자신이 가야할 운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어차피 난 죽을 몸이야. 조금만 더 버티면 날이 밝을거고 그럼 더이상 놈들은 나타나지 않을거야. 하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모든게 끝나는게 아니란거야. 지금의 이 끔찍한 일들은 길고 지루한 악몽의 시작일뿐이야. 윤형사! 가능하면.... 내 노트는 읽지 말어. 오히려 절망만 더 깊어져서 괴로울테니까. 노트를 보면 결국 우리 모두가 죽게 된다는걸 믿고 말테니까. 그래서 자살한 사람들도 무척 많지. 내가 할 말은 그것뿐이군. 자, 시간없어! 어서들 가라구! 내가 시간을 좀 벌어 볼테니까!"
"반장님, 이제와서 무슨 말씀이세요? 함께 가야죠, 함께!"
혜경이 구반장의 팔을 붙잡고 일으키려 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몸을 일으켜 옆에 나무기둥에 기댔다. 그리곤 그의 M16을 움켜쥐고 어둠을 노려보았다.
"얼마나 버틸진 모르겠지만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인 것 같군. 그리고 한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여기 있는 사람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생각 하지마! 어느 누구도 자네들을 도울 수 없다구!"
"반장님!"
혜경은 그의 옆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다. 구반장은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는 장승처럼 꼼짝않고 어둠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박호철이 혜경을 일으켜 세우며 구반장에게 작별을 고했다. 다시 일행들은 앞으로 나아가지 시작했다. 새벽 5시 40분. 조금 있으면 해가 뜰 것이다. 그들이 구반장과 헤어진 후 채 5분도 되지 않아 뒷쪽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던 총성이 완전히 멎은 것은 약 10여분 뒤였다. 혜경을 비롯한 일행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것인지 다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강은영도 더이상 울지 않았다. 그녀는 밤사이 자신이 많이 변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강은영만이 아니었다. 해가 떠오른 것은 새벽 5시 50분경이었다. 그들은 태어나 그렇게 아름다운 새벽을 본 적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토록 긴 밤을 보낸 기억이 그들에겐 없었다. 그것은 지루하고 끔찍한 악몽과 같았다. 해가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긋지긋 하던 빗방울도 멎기 시작했다. 어스름한 여명이 대지를 밝히기 시작했다. 잔혹한 어둠이 물러가고 숲은 다시 초록빛을 찾으며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일행들이 하나 둘 진흙탕 위에 주저 앉았다. 스텝들 아홉명중 살아남은 사람은 네명에 불과했다. 그들은 두려운 눈으로 뿌연 아침이 밝아오는 목촌리를 돌아보며 제각기 감회에 젖어들고 있었다.
* * *
평화로운 휴일 아침 H군은 발칵 뒤집혔다. H군의 한 산골 마을 목촌리에서 유례없이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마을에는 간밤의 참상을 말해주듯 곳곳에 참혹하게 죽은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집단살육이라도 일어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죽음의 그림자가 온 마을을 휩쓸고 지나간 것이다. 수십명의 경찰과 검은 양복을 입은 몇 명의 사내들이 철저한 보안속에 마을을 조사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이토록 큰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언론에서 나온 취재기자 한 명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을 어귀에서 제일 먼저 만난 시신은 구반장의 시신이었다.
그는 가슴에 M16을 굳게 껴안은채 온몸이 갈기 갈기 찢겨져 있었다. 이 정우의 시신은 숲속 한가운데서 발견되었다. 그는 죽창으로 무수한 가격을 받은 듯 온 몸이 성한 곳이 한군데도 없었다. 오세창의 시체는 개울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죽은 후에도 이리저리 끌려 다닌 흔적이 역력했다. 그외에도 박희철과 김혜진의 시신이 각각 마을과 흉가에서 발견되었고 특히 광속에서 발견된 이정란의 시신이 가장 참혹했다. 뜻밖에도 창고에 숨어 있던 마을 주민 다섯명은 모두 농약을 먹고 자살한 채 발견되었다. 해일은 마을의 한가운데 주저앉아 경찰들이 여기 저기서 한곳으로 모아 오는 시신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전만 해도 그들은 자신과 함께 얘기하고 숨쉬던 사람들이었다. 김감독과 배영환은 부상이 심해 앰블런스편에 급히 서울로 후송되었고 강은영 또한 거의 탈진상태로 서울로 보내졌다. 윤혜진 형사는 구반장의 시신을 대하곤 심하게 오열했으나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서을 시경에서 내려온 형사팀들에게 간밤의 상황들을 설명하느라 기진맥진 하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서 박호철 순경이 그녀의 주장들을 재차 확인시키고 있었지만 형사팀들중 누구 한사람도 그들의 주장을 곧이 곧대로 신뢰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 다음으로 조사를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해일이었다. 하지만 해일은 그들에게 어떻게 간밤의 상황을 설명해야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참혹한 시신들을 제외한다면 마을은 거짓말처럼 멀쩡했다. 분명 마을에는 박희철에게 덤벼들던 짐승들과 마을을 벗어나 탈출하던 과정에서 죽인 짐승들의 시체가 있어야 하는데도 흔적조차 남지 않은 것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마을 어느 한구석에서도 짐승의 발자욱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죽은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누군가가 그들 모두는 기나긴 악몽을 꾼 것이라고 누명을 씌워도 믿을 만큼 마을은 완전하게 깨끗했다. 해일은 이 곳에 분명 엄청난 속임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아무리 흔적을 없애려고 해도 이토록 완벽하게 처리할 순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주저앉아 있는 해일의 어깨를 툭하고 치는 사람이 있었다. 올려다보니 그는 이번 수사팀의 책임자라고 처음에 자신을 소개하던 장형석 과장이었다.
"기분이 좀 나아 졌습니까?"
해일은 그의 말에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아무리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그 짧은 시간에 이토록 큰 충격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인가. 그는 해일의 옆에 비슷한 자세로 주저 앉았다.
"정PD라고 하셨죠? 오랫동안 이 방면의 일을 해오면서 이번처럼 이상한 사건은 처음 대합니다. 죽은 사람들로 보나 살아남은 사람들의 진술로 보나 오늘 새벽 이 마을에선 웬만한 전쟁보다 더한 난리가 벌어진 것 같은데 제 눈에는 마치......"
그는 잠시 거기서 말을 끊곤 해일의 눈치를 살피는 듯 했다.
"마치 어디선가..... 엉뚱한 곳에서 죽은 사람들을 고스란히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해일은 비로소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반 경찰들과는 달리 말쑥한 양복 차림에 1970년대에나 유행했을 짧고 단정한 머리에 기름을 발라 넘긴 그의 모습에서 해일은 한때 이 나라를 온통 두려움에 떨게 했던 모 기관원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얇은 은테 안경 너머로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을 해일에게 던지고 있었다. 그제서야 해일은 그가 자신들의 얘기를 믿기는 커녕 오히려 의심에 가까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우리가 거짓말이라도 한단 말입니까?"
"아... 제 말을 오해 하셨나본데 그런 얘기가 아니라...."
"아니라면.... 제가 장형사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그건, 아니죠. 비록 정PD가 이번 일에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있긴 하지만....."
"피해자라고 주장한다구요?"
"이런, 제 말을 너무 그렇게 예민하게 받아 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는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물증이나 확실한 정황이 밝혀질때까진 선입견을 두지 않으려고 하는 것 뿐이니까요"
"결국은 우리들을 용의자로도 볼수 있다 그 말이군요"
"꼭 그렇게 해석하고 싶으시다면 굳이 부정하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수사 절차상 어느 사건에서나 사건 주변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용의자 선상에 올리는 것이 수사를 하는 기본 방침이니까 이해해 주십시요"
"저쪽에 윤혜경 형사와 박호철 순경은 다름 아닌 경찰입니다"
"그건 별개의 문제지요. 다만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정PD가 이번 사건에 대해 저희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저는"
그의 말은 전과 달리 이번에는 매우 확고하고 단호한 억양이었다. 해일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더이상 무엇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미 자신들이 겪은 모든 일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얘기했는데. 그들은 또 무엇을 더 자신들에게 요구하는 것인가. 그는 뭔가 알 수 없는 깊은 수렁으로 자신이 점점 빠져들고 있다는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문득 그가 고개를 들자 앞쪽에서 윤혜경 형사가 자신과 장과장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 또한 지금 자신의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해일은 그녀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해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혜경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는 지금까지 그가 보아온 여느 여자들과는 확실히 다른 면이 있었다. 해일은 처음 그녀를 대할때부터 그녀에게서 어느 남자 못지 않은 강인함과 고집스러움을 엿볼 수 있었다. 해일은 그것이 단순히 그녀의 직업때문에 드러나는 성격이 아닌 그녀의 천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뭔가 좀 이상해요"
"이상하다니요? 마을이 말입니까?"
"아니요, 경찰들..... 아니 이 사람들.... 일반 경찰들이 아닌 것 같아요"
"뭐라구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확실히는모르겠지만 시경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차림새나 말투, 그리고 시경 어느 부서에서 나왔는지에 대해선 밝히지도 않고..... 신분증도 위조된 것 같아요"
"뭐라구요? 그게 정말 입니까?"
"뭔가 또 다른 무엇이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럼, 따져야죠!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그냥 잠자코 있으세요. 우리가 먼저 속을 드러내서 득이 될게 없는 것 같아요. 일단 속아 주는 척 하면서 저들의 정체와 저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구요"
해일은 새삼스레 주변의 인물들을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무엇이라고 분명히 단정하긴 어렵지만 확실히 그들은 일반 경찰들과는 다른 어떤 낯선 분위기가 있었다.
"어차피 이번 사건은 처음부터 우리가 쉽게 현실에서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마치 현실처럼 벌어지고 있었어요. 분명 어딘가에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단서가 있을 거예요. 그걸 찾는게 급선무예요. 혹시 흉가에서 촬영을 할때 카메라에 뭐 찍힌게 없을까요?"
그녀의 말에 해일의 머리에 번쩍하고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그래요, 촬영 테잎! 만약 김감독이 카메라를 끄지만 않았다면 광에서 이정란씨가 죽어가는 모습과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뭐죠?"
혜경을 바라보는 해일의 얼굴이 흥분으로 상기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짐승들과 살인마들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도 알 수 있을지 몰라요"
"네? 그게 정말이예요?"
해일은 혜경과 흉가 쪽으로 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돌연한 두 사람의 행동에 장과장이 덩달아 급히 그들의 뒤를 쫓았다. 해일이 달리며 흥분하여 소리쳤다.
"그래요, 만약 김감독이 그때 광을 뛰쳐 나오며 카메라를 끄지만 않았다면 카메라는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었을 겁니다. 저는 그 살인마와 짐승들이 광에서 나오는 것을 분명히 제 두 눈으로 보았어요. 그런데 저희가 광에서 나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광에는 저희 말곤 아무것도 없었다구요. 제가 본 것처럼 그들이 정말 광에서 나왔다면 우리가 나온 이후에 그 안에서 벌어진 일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촬영 테잎에 찍혔을거란 말입니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이 모든 수수께끼들을 한꺼번에 풀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 뿐이 아닙니다. 마당에 적외선 카메라를 설치해 두었어요. 그 카메라는 야간에 조명이 없이도 물체들을 분명하게 촬영을 할 수가 있죠. 카메라가 제대로 작동이 되었다면 우리가 광에서 뛰쳐 나오는 과정들과 짐승들과 살인마의 모습, 그리고......"
일요일 오전 같은 시각. 서을 근교 M 정신 요양원에는 3대의 앰블런스와 검은 세단 3대가 급히 요양원 뜰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은 환자 몇 명과 면회 온 보호자들이 따스한 햇살 아래 도시락이라도 나누며 모처럼 한가로운 정을 나누고 있 을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쥐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는 뜰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마저 감돌고 있었다. 세단과 앰블런스가 요양원 현관 앞에 멎자 기다렸다는듯 요양원의 원장을 비롯한 실무자들이 급히 그들을 맞으러 밖으로 나왔다.
첫번째와 두번째 세단에서 내린 사람들은 검은 양복 차림의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기관원의 인상을 풍기는 사내들이었고 세번째 세단에서는 말쑥한 양복 차림의 앞 차에서 내린 사내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 보이는 사내들이 내렸다. 그들은 매서운 눈으로 주위를 경계하며 앰블란스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서 환자 한명이 하얀 시트로 온 몸이 덮힌채 환자용 침대에 실려서 끌어 내려졌다. 사내들은 신속하게 환자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두번째, 세번째 앰블런스에서도 마찬가지로 시트로 온몸을 뒤짚어 씌운 환자가 각각 한명씩 실려 있었고 그들 또한 앞의 환자와 같은 방법으로 안으로 들여 보내졌다. 그들을 태운 환자용 침대는 빠른 속도로 햐얀 벽으로 둘러싸인 정신 요양원의 긴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복도를 질주하는 동안 복도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병원의 가장 안쪽에 있는 은밀한 통로로 들어섰다. 그들이 들어선 통로의 입구에는 '특수병동'이라는 푯말과 함께 '관계자외 절대 출입금지' 라는 선명한 붉은색 글씨가 적혀 있었다. 그들은 다시 두개의 굳게 잠긴 철문을 지나 병원 가장 깊숙한곳에 위치한 세개의 병실 앞에서 각각 멈추었다. 특수하게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두꺼운 병실문이 열리고 각각의 환자들을 실은 침대는 나란히 배정된 병실 안으로 들여보내 졌다. 병실 안은 여느 병실과 달리 각각의 병실 사이의 칸막이가 유리같은 투명한 재질로 제작되어 옆 병실의 환자를 서로 볼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대화까지 나눌 수 있도록 특수 설계되어 있었다.
사내들은 미리 충분한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 처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자신에게 부여된 지침에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행동하고 있었다. 그들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듯한 자가 눈짓을 하자 건장한 사내들은 곧바로 오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 남은 사람은 모두 네 사람이었다. 침대위에 환자가 꿈틀거리는 동작이 하얀 시트위로 불거져 나왔다. 첫번째 병실에 들어간 환자의 시트가 벗겨졌다. 환자는 침대에 단단한 밸트로 손발이 고정되어 있었으며 입에는 테잎이 붙여져 있었다. 자신을 내려다 보는 사내들을 두려운 눈으로 올려다 보는 그는 뜻밖에도 김익재 촬영감독이었다. 이어서 두번째, 세번째 침대의 시트가 벗겨지고 그 안에선 배영환과 강은영이 각각 모습을 드러냈다.
* * *
놀랍게도 흉가 앞마당에 설치되어 있던 60분짜리 적외선 카메라의 테잎도, 광안에 설치되어 있던 ENG 카메라의 테잎도 모두 끝까지 감겨져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해일이 흥분을 억누르며 소리쳤다.
"됐어요, 모든 장면들이 이 안에 촬영되어 있을 겁니다. 오늘 새벽 이 집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이....."
그의 곁에 있던 상기된 표정의 장과장이 말했다.
"지금 여기서 볼 수 있습니까?"
"그럼요, 체크 모니터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카메라에 연결하면 여기서 바로 볼 수 있습니다"
해일이 막 모니터 케이블을 카메라에 연결하려 할 때였다. 장과장이 해일의 손길을 제지하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장 여기선 곤란합니다. 이번 사건은 철저한 보안속에 수사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럼, 어디서 봐야 한단 말씀입니까?"
"테잎을 좀 정밀하게 분석을 해야 하니까 번거롭겠지만 저희하고 같이 동행을 좀 해 주셔야 겠습니다"
뒤에서 두사람을 지켜보던 혜경이 납득이 안간다는 표정으로 끼어 들었다.
"동행이라니요? 어디로요?"
"그건 가 보시면 압니다"
그러자 혜경이 정색을 하며 따지고 들었다. 뭔가 내면에 억눌려 있던 불만을 터뜨리듯 그녀는 매우 공격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예요? 저희들은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함께 동행할 수 없어요. 그리고 설사 어디로 가는지 안다해도 영장없이 한발자욱도 함께 갈 수 없어요. 저희를 마치 이번 사건의 용의자나 되는듯이 취급하는데 저희 는 엄연히 신고자고 피해자란 말입니다. 그리고 이 테잎도 엄연한 정PD님의 소유물이고.... 저희가 이 테잎을 장과장님과 함께 보려는 것도 수사에 협조하는 차원이지 의무는 아니죠. 정PD님, 그 테잎 그냥 이곳에서 확인해봐요"
혜경의 말에 장과장의 안색이 금새 굳어졌고 해일은 잠시 망설이다 케이블을 카메라에 꽂았다. 그리곤 카메라에 붙은 재생 버튼을 막 누르려고 할 때였다. 해일의 얼굴 앞으로 낯선 물체가 들이 밀어졌다. 그것은 뜻밖에도 권총이었다. 해일과 혜경이 동시에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 보았다.
"죄송합니다. 두 분을 이번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정식으로 체포하겠습니다"
장과장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나 엉뚱한 그의 말에 해일과 혜경은 어이가 없다는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이윽고 혜경이 얼굴까지 붉게 상기되면서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바.... 방금 뭐라고 그랬어요? 우리가 이번 사건의 용의자라구요?"
그러자 장과장은 그녀를 보지도 않은 채 아까부터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건장한 사내를 향해 소리쳤다.
"이봐, 박수사관! 이리 좀 와봐!"
사내가 기다렸다는 듯 벌써 주머니에서 권총을 빼들며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그의 말이 단순한 농담이 아니란걸 알아차린 해일이 놀라 소리쳤다.
"저기, 자.... 잠깐만요! 뭔가 오해가....."
그러나 장과장의 눈초리는 이미 조금전과는 판이하게 변해 있었다. 그는 사뭇 위협조로 해일과 혜경에게 번갈아 권총을 겨누며 말했다. 더구나 그의 말투는 어느새 거친 반말로 변해 있었다.
"두 사람, 그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혼날줄 알아!"
갑자기 돌변한 상황에 해일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혜경이 당혹감을 억누르며 그에게 대들며 소리쳤다.
"당신들 도대체 누구죠? 당신들..... 경찰이 아니죠?"
"입다물어, 너희들은 이번 사건의 살인 용의자들이란 말야!"
그 사이 장과장이 부른 박수사관이라는 사내가 와서 혜경의 뒤쪽에서 권총을 들이 밀었다. 장과장이 해일에게 명령하듯 소리쳤다.
"카메라에서 테잎 꺼내!"
해일이 혜경을 바라보며 머뭇거리자 그의 손에 들린 권총이 해일의 바로 코앞까지 들이 밀어졌다.
"테잎 꺼내라는 말 안들려?"
해일은 어쩔 수 없이 두개의 카메라에서 테잎을 꺼내 그에게 넘겨 주었다. 그는 급히 테잎을 자신의 바바리 코트 안으로 집어 넣은 다음 두사람에게 앞장서라는 손짓을 했다.
"허튼 짓 하면 그 자리에서 황천길일줄 알아!"
그들이 흉가를 벗어나 마을을 가로지르는 동안 어느 누구도 그들을 눈여겨 보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들은 옷속에 권총을 숨긴채 다른 사람의 눈에 안 보이도록 최대한 신경을 쓰며 두사람을 마을에서 데리고 나왔다. 마을을 벗어나자 그들은 두사람이 5, 6미터 앞장 서 걷도록 한 다음 뒤에서 따라왔다. 해일은 자꾸만 자신의 등뒤를 겨누고 있을 권총이 신경 쓰여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들은 두사람중 누구도 뒤를 돌아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해일의 마음을 알아 차렸는지 혜경이 속삭였다.
"뒤돌아 보지 말아요. 우릴 해치거나 하진 않을테니....."
"그걸 어떻게 알죠?"
"저들도 테잎을 보면서 우리의 설명이 필요할거니까, 그리고 우릴 죽일 의도였다면 이렇게 번거롭게 할 필요도 없고....."
"대체 저들이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걸까요?"
"저도 아직 잘 모르겠어요. 아마 정부 어느 특수기관에 소속된 사람들인 것 같은데 이번 사건에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처음 이번 사건을 조사할때도 모정보기관에서 제 뒷조사를 했다고 하더라구요. 모르긴 몰라도 저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훨씬 이전부터 이번 사건에 관여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는 사이 그들은 이미 마을 입구에 있는 비포장 도로까지 도착해 버렸다. 거기에는 여러대의 경찰차와 승용차들이 세워져 있었고 그들은 그 중 한대의 승용차 문을 열고 권총을 든 손으로 두사람에게 타라는 손짓을 했다. 해일과 혜경이 망설이다 차에 오르려는 순간 네사람의 뒷쪽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혜경의 귀에는 몹시 익숙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사실 저도 처음부터 이 사람들이 좀 이상하더라구요. 이 두사람 말고 또 한사람 있었잖아요. 감색 양복 입은 사람.... 그 사람이 줄곧 저를 감시하질 않겠어요? 그래서 잔뜩 몸을 사리고 있는데 윤형사님과 정PD님이 이 두사람과 마을을 벗어나는걸 봤는데 뭔가 낌새가 수상쩍어서 유심히 보니까 이 두사람한테 잡혀 가는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저를 감시하던 사내한테 소변 좀 보고 온다고 하곤 줄행랑을 쳐서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죠"
혜경이 놀랍다는듯 박호철의 어깨를 툭툭 쳤다.
"박순경, 항상 어린애 같기만 하더니 지금 보니까 그게 아닌데?"
말을 마친 혜경이 허탈하게 주저앉은 두 사람을 향해 돌아섰다.
"자, 장과장님, 이제 당신들이 누군지 한번 말을 해 보실까요? 그리고 우리를 어디로, 왜 데려갈 셈이었죠?"
장수사관이 조금도 굽히는 기색없이 대답했다.
"우린 당신들을 보호하려는 것 뿐이었소. 다소 절차상에 무리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런 소리 말아요, 우리도 자신의 몸 하나 지킬 정도의 여력은 있으니까 어설프게 우릴 보호하느니 어쩌니 하는 소리는 집어 치워요. 엉뚱한 소리 말고 내 질문에나 대답해요"
"그럴 필요 없어요. 그들은 K기관 정보원들이예요"
박호철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신분증 두개를 꺼내들곤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제가 미리 와서 그들의 차를 조사해 봤거든요"
해일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K기관 정보원이 왜 우릴?"
혜경이 장과장의 안주머니에서 촬영테잎을 꺼내들고 윽박질렀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예요, 그렇죠? 당신들은 처음부터 이번 사건에 대해 뭔가 알고 있었던 거죠, 안그래요?"
"우리도 아직 분명하게 아는건 아무것도 없소. 단지 이번 사건이 우리의 능력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초자연적인 어떤 현상과 관련이 되어 있다는 것 밖엔....."
"물론 그건 아니오. 하지만 당신들이 당한 일이 현실에선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며 지극히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이오. 우리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당신들은 앞으로 단 몇 일도 버티기 힘들 것이오. 그곳을 다녀온 모든 사람들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당신들도 잘 알텐데?"
그의 말에 세사람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해일이 침울하게 물었다.
"그럼, 당신들이 뭘 할 수 있다는거죠?"
"우선은 그 초자연적인 현상이 어떤 것인지 좀 더 명확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앞으로 당신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우리는 면밀하게 관찰해야만 합니다"
그러자 혜경이 냉소적으로 쏘아붙였다.
"결국 우릴 실험대상으로 쓰겠단 얘기군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변명하지 말아요. 그렇다고 당신들이 현재 우릴 구할 방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현재로선 그렇지만....."
"그렇다면 혹시.... 병원으로 간 김익재 감독이나 배영환, 강은영씨도?"
그는 잠시 생각하는듯 하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렇소. 그 분들은 이미 우리의 보호하에 안전하게 있소"
해일과 혜경의 이에서 동시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박호철이 끼어들었다.
"이제부터 우린 어쩌죠? 저들의 말을 믿어야 할까요?"
다시 장수사관의 얘기가 이어졌다.
"현재 우리 기관에선 이번 사건을 위해 저명한 물리학 박사를 비롯, 많은 전문가들로 구성된 특별한 기구를 만들었소. 그들이 당신들을 위험에서 구할 수 있을거요. 만약 지금 당신들의 잘못된 생각으로 이 자리를 이탈한다면 상황은 더욱 어려워 질 것이오"
혜경이 결심이 선 듯 두사람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우린 당신네들의 보호같은 건 필요없어요. 그리고 당신들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접근하는 방법부터가 틀렸어요.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당신들을 신뢰할 수가 없고..... 그리고 지금 당신들이 데리고 있는 사람들 당장 풀어주는게 좋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우린 이 사실을 온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릴 테니까. 그렇게 되면 당신들도 여간 곤란한게 아닐껄?"
"멍청한 짓 말아요. 그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오. 당신들은 이번 사건의 핵심을 아직 파악조차 못하고 있소"
그러자 혜경이 승용차에 올라타며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건 우리 관심사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끔찍한 악몽에서 어떻게 깨어 나느냐 하는 것이니까"
* * *
통제실에는 병실 마다 은밀하게 설치된 두개의 카메라를 통해 병실 내부의 모든 상황을 여섯개의 모니터가 낱낱이 보여주고 있었다. 배영환이 벌서 5분이 넘게 병실의 방문을 두들겨대며 소릴 지르고 있었다.
"이 자식들아, 우릴 내보내 줘! 우리가 뭘 잘못 했다고 이렇게 가둬 놓은 거야! 당장 우릴 내보내 달란 말이야!"
그러나 번번히 되돌아 오는 것은 공허한 그의 메아리뿐이었다. 참다못한 김감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 둬! 그래봐야 소용없어!"
"그럼, 이대로 주저앉아 있잔 말씀이세요?"
김익재 촬영감독이 유리벽 하나를 사이에 둔 배영환에게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아무래도 놈들이 우릴 관찰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뭐라구요?"
배영환이 방안을 한바퀴 둘러 보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카메라 같은건 보이지 않잖아요?"
"카메라쯤 숨기는건 일도 아니야. 중요한건 그게 아니고 대체 저들이 누구이며 우리를 왜 이리 데리고 왔는가 하는거야"
"아무래도 간밤에 저희가 당한 일과 관련이 있겠죠. 전 불안해서 아주 죽을 지경이예요. 산넘어 산이라더니.."
"은영씨는 어때? 아까부터 구석에 주저앉아 아무말도 없잖아. 한번 가봐"
"여러모로 충격이 컸던 것 같아요. 개자식들 어떤 자식들이 사람을 이렇게 함부로 감금을 하는지.... 만약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이것들을 그냥...."
"쓸데없는 소리말고 은영씨한테나 가봐. 과연 무사히 이곳을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내 예감에 여긴 보통 곳이 아냐"
배영환이 자신의 우측에 있는 강은영의 방을 향해 다가갔다. 그들의 사이에도 투명한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녀는 무릅 사이에 고개를 묻은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선 더이상 예전의 밝고 활기에 넘치던 모습을 찾아볼 순 없었다. 그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곤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강은영? 괜찮아?"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무릅 사이에 묻은채 아무 말이 없었다.
"강은영, 이런 때일수록 기운을 내야지! 은영씨, 내 말 듣는거야?"
그제서야 그녀가 고개를 들고 배영환을 돌아 보았다. 파리한 그녀의 얼굴이 그의 마음을 뭉클하고 저리게 만들었다.
"선배, 우리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거죠? 이게 뭐예요? 마치 무슨 동물 실험실에 갇힌 것 처럼..... 우린 결국 모두 죽을 거예요. 마을 주민들도 그랬고, 구반장님도 그랬잖아요"
"바보같이 우리가 죽긴 왜 죽어? 아직 시집, 장가도 못 갔는데...."
"이 판국에 지금 그런게 다 무슨 소용이예요? 그렇게 장가가고 싶은 사람이 뭐 하느라 아직 노총각이예요?"
"장가는 뭐 아무나 가나? 나같이 고리타분하고 구시대 사람을 누구 좋다고 하겠어? 내가 생각해도 한심한데....."
"선배가 뭐가..... 어떻다고 그래요? 그만하면.... 인정 많고, 사람 착하고..... 뭐 결혼이 별건가요? 서로 마음 맞으면 대충 살면 되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럼 은영씨는 왜 아직 결혼 않했어? 이제 결혼할 나이 됐잖아! 주위에 남자도 많던데....."
"저요? 후후.... 남자가 많으면 뭐해요? 다들 친구고 동료고 그런 사람들이지 정작 애인은 없어요. 오히려 저 같이 겉보기에 번지르한 애들이 사실은 실속이 없다구요"
강은영은 짐짓 풀이 죽은 목소리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그러한 모습은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도도해 보이던 평소 그녀에게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또한 그는 예전에 그녀에게서 전혀 느끼지 못했던 쓸쓸함이나 외로움 같은 자신에게나 어울릴 것 같은 그런 감정들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그녀의 모습은 뜻밖에 그에게 상당한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그는 이번이 아니면 앞으로 영원히 자신의 본래 마음을 그녀에게 털어 놓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으..... 은영씨, 있잖아.... 나 어때?"
배영환의 더듬거리는 말투에 강은영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 보았다.
"뭐.... 가요?"
"나.... 어떠냐구? 그러니깐..... 은영씨가 보기에 내가 어떠냐구. 객관적으로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구 바로 강은영씨가 보기에 나라는 남자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거야"
강은영은 갑작스런 배영환의 얘기에 그 의미를 알아내느라 애쓰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가 그의 말의 진정한 의미를 눈치채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얼굴에 나타난 그녀의 당혹스런 표정만으로도 그는 그것을 충분히 예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녀답지 않게 몹시 덤벙대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이 배영환에겐 십년도 더 되는듯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글세.....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알기론 선배는 날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렇지 않아, 나도 처음엔 그게 미움인줄 알았어. 근데.... 그게 아니었어. 나도 내 자신의 이런 감정을 알고 스스로에게 몹시 놀랐어. 은영씬 나같은 사람이 넘보기엔.... 뭐랄까..... 훨씬 잘 나가는 여자잖아. 그리고 은영씨에게 난 너무 어울리지도 않고....."
강은영의 얼굴에 멎적은 미소가 번졌다.
"정말 선배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선배같은 사람이 나한테 그런 감정을 가졌단 말예요?"
강은영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그를 빤히 쳐다볼때 배영환은 역시 그녀는 자신의 여자가 되기에는 너무 높은 곳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자신에게도 말로만 듣던 사랑의 아픔이라는 낯선 상처가 찾아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다음 얘기는 전혀 그의 예상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선배는 정말 바보예요. 좋으면 좋다고 말을 하지 왜 구박을 해요? 좋다고 말하면 제가 딱지라도 놓을 줄 알았어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숙였던 배영환이 다시 번쩍 고개를 들었다.
"사실은 저도 선배한테 뭐랄까....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맨날 구박만 하니까 선배는 저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는줄 알았죠"
"저.... 정말이야? 지금 한 얘기가 정말이냐고?"
배영환이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강은영이 기겁을 하면서 입에 손가락을 갖다대곤 속삭였다.
"제발, 조용히 좀 해요. 우린 지금 갖혀 있다구요. 그리고 바로 옆방에 김 감독님도 있는데 동네방네 소문낼 일 있어요?"
"아무려면 어때, 차라리 이렇게 갖히게 된게 난 오히려 잘된 일 같아. 안 그랬으면 아마 난 영원히 내 마음을 고백하지 못 했을거야. 고마워, 은영씨. 고마워!"
배영환은 자신과 강은영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유리벽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그것만 아니었더라면 그는 필경 강은영을 있는 힘껏 껴안고 말았을 것이다.
* * *
모니터를 지켜보던 우일만 박사가 장수사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물리학 분야의 저명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테잎도 가져 오지 못했단 말이요?"
"죄송합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안에 그들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낭패군, 테잎이 있어야 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좀 더 정확한 분석을 할 수 있을텐데.... 손박사 생각은 어떻소? 아직도 목촌리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무속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우박사가 질문을 던진 사람은 뜻밖에도 처음 해일이 테잎을 들고 찾아갔던 손남의 박사였다.
"아닙니다. 저 역시 지금은 우박사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밤 그들이 저 사람들을 찾아오겠군요?"
"아마 내 추측이 맞다면....."
"그래도 너무 잔인한 방법이 아닐까요, 이런 식으론?"
"어차피 죽을 사람들이오. 이미 달아난 세사람도 마찬가지고. 몇 일 더 버틸 수 있을진 몰라도결국에는....."
* * *
경찰서엔 마침 그녀가 잘 알고 있는 의경 두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급한 서류를 찾으러 왔다고 둘러대곤 구반장의 서랍을 뒤쳤다. 구반장의 말대로 그의 서랍속에서는 과연 보통 노트 두께의 서너배는 됨직한 두껍고 낡은 노트가 나왔다. 혜경이 그것을 가슴에 소중히 숨기고 막 사무실을 나오려고 할 때였다. 둘중 고참되는 김한민 수경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윤형사님, 죄송합니다. 지금은 여길 나가실 수 없습니다"
"김수경! 지금 무슨 소리 하는거야? 나갈 수 없다니?"
"상부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만약 윤형사님이나 박순경님이 돌아오면 잡아두라는....."
"아니, 왜 나를 잡아 두라는거지?"
그러자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어렵게 말했다.
"그게....저..... 현재 윤형사님은 살인용의자로 수배중입니다"
"뭐... 뭐라구? 살인 용의자?"
"그렇습니다"
이번엔 뒤에 서 있던 이영운까지 가세하며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손엔 벌써 은빛 수갑이 들려 있었다.
"너.... 너네들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올꺼야?"
"죄송합니다.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김한민이 이영운을 돌아보며 말했다.
"수갑 채워!"
이영운이 쭈삣거리며 막 혜경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려 할 때 혜경의 팔꿈치가 그의 턱을 올려쳤다. 이영운이 '욱'하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턱을 감싸쥐며 뒤로 물러섰다. 놀란 김한민이 '어....어?'하는 사이 이미 혜경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어떤 자식들인지, 까불지들 말라 그래! 이 윤혜경이를 그렇게 호락 호락하게 봤다간 큰 코 다칠 줄 알라는 말도 꼭 전하라구, 알았어?"
그녀는 하얗게 질린 김한민을 남겨둔 체 날쌔게 경찰서를 빠져 나왔다. 경찰서 밖 차안에는 해일과 박호철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급한 숨을 몰아쉬며 차안으로 뛰어든 혜경이 소리쳤다.
"어서 출발해요!"
그녀의 소리에 맞춰 해일이 엑셀에 힘을 주자 차는 급한 가속음을 뒤로 하고 쏜살같이 달아났다.
"찾았어요?"
해일이 뒤로 돌아보며 물었다.
"네! 근데 아무래도 이곳에 머무는 건 위험한 것 같아요. 이미 우리 세사람에 대해 전국에 수배령이 내린 모양이예요"
박호철이 말도 안된다는듯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우리가 무슨...."
"지금 그런거 따질 때가 아냐. 서울로 가는게 낫겠어요. 이곳은 바닥이 워낙 좁아서 마땅히 숨을 곳도 없다구요"
해일이 대답했다.
"그럽시다. 테잎도 보고 하려면 나도 이곳보단 서울이 편하니깐....."
그들이 서울에 닿은 것은 밤 9시가 넘어서 였다. 아무래도 집이나 방송국 쪽에는 이미 기관원들이 깔려 있을 것 같아 강남에서 프러덕션을 하는 후배를 찾아갔다. 밤 늦은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해일의 후배 이근택은 느닷없이 들이닥친 해일 일행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해일형, 이 밤중에 무슨 바람이야? 바쁜 사람이 날 다 찾아 오고?"
"여기 혹시 나 찾아온 사람 없었냐?"
"에이... 참 형두..... 여기 형 찾아 올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래?"
"근택아, 부탁 하나만 하자. 오늘 나 너네 편집실 좀 쓰면 안되겠냐?"
"방송국 편집실은 어쩌구?"
"사정이 좀 있어서 그래. 한번만 좀 봐주라!"
"글쎄..... 좋아, 그럼. 대신 다음에 술 한잔 사야 돼! 나갈때 알지? 그냥 문 닫고 나가면 자동으로 문 잠기니까"
세사람만 편집실에 남자 해일은 서둘러 테잎을 꽂았다. 먼저 볼 테잎은 광속에서 찍은 테잎이었다. 이정란이 굿을 하는 모습이 제일 처음이었다. 그리고 얼마후 그녀가 귀신을 부르겠다며 눈을 감았다. 이윽고 그녀의 이마에 번지르하게 땀이 번질 무렵 그녀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고 신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사람은 잔뜩 긴장한채 화면을 주시했다. 막 이정란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자 혜경이 신음처럼 내뱉었다.
"세상에! 어떻게 저런 일이....."
해일이 소리쳤다.
"이 다음 부분을 잘 봐요"
해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광의 안쪽 벽면에서부터 푸른기가 도는 연기 같은 것이 이정란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정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하고 오세창의 뭔가 잘못됐다는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박호철이 흥분하여 말했다.
"저게 뭐죠?"
광안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고 오세창이 어서 끌어 내리라며 소리를 지르자 스텝들이 이정란에게 달려 들어 그녀를 끌어 내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나왔다. 해일이 설명을 덧붙였다.
"저땐 정말 장정 네사람이 달겨 들었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더라구요"
이정란의 고통스런 비명소리가 점점 더 커져 가고 스텝들의 우왕좌왕하는 소리도 더욱 커졌다. 그러다 이정란을 붙들고 있던 스텝들이 한거번에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고 찢어지는 이정란의 비명쇠와 함께 그녀의 몸이 무엇인가에 물어 뜯기듯 옷 밖으로 붉은 피가 흥건하게 새어나왔다. 박호철은 테잎을 보면서 연신 몸을 떨었다.
"어떻게 저럴수가....."
김혜진의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스텝들이 광에서 뛰쳐 나가는 모습이 부분적으로 카메라에 잡혔고 누군가 뛰쳐 나가며 카메라를 건드렸는지 카메라의 앵글이 살짝 돌아가서 이정란의 모습은 카메라에서 사라졌다. 대신 카메라는 광의 안쪽 벽과 함께 이정란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는 해일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해일은 아직도 당시의 섬뜩함이 되살아 나는지 목을 움츠렸다. 마침내 해일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쫓기듯 광에서 빠져 나오자 벽을 비추는 광안에는 이정란의 헐떡이는 고통스런 신음소리만이 간간히 들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짐승의 으르렁거림 같은 것이 들려오고 있었다. 해일이 긴장하여 소리쳤다.
"바로 이겁니다!"
세사람은 뚫어지게 화면을 쳐다 보았다. 붉은 톤이 도는 광 안쪽 벽에서부터 희미한 안개가 몰려 나오기 시작했다. 혜경이 소리쳤다.
"그 날밤에도 저런 안개가 있었어요, 그렇죠?"
해일이 대답했다.
"제 친구가 죽기 직전에 제게 전활해서 그랬어요. 안개가 보이면 놈들이 나타난 증거라고....."
안개의 농도는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고 뭔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선명하진 않앗지만 세사람은 모두 그것들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었다. 푸른 광채가 도는 눈들..... 그들은 그 끔찍한 짐승의 눈들이었다. 박호철이 두려운 목소리로 말했다.
"놈들이예요. 저것들이 어떻게 나타난거죠? 어디서 나타난거죠?"
해일이 그 부분의 테잎을 다시 되감아서 재생시켜 보았지만 놈들은 푸른 빛 도는 안개속에서 서서히 그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고 마치 광 안쪽 어딘가에 숨어있는 다른 세계에서 바깥 세상으로 달려 나오듯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쪽에선 해일의 눈을 번쩍이게 하는 바로 그 살인마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놈의 손에는 예의 기다란 막대기가 들려있었다. 윤곽 정도만 어렴풋이 드러나 있었지만 해일은 그가 바로 그날밤의 살인마라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테잎은 거기서 끝이 났다. 세사람 모두 충격에 휩싸여 말이 없었다. 한참만에 혜경이 입을 열었다.
"아까 낮에 장수사관이 한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군요. 이번 사건이 어떤 초자연적인 현상과 연결되어 있다던 말 말이예요"
해일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가요.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벽속에서 저런 것들이 튀어 나올 수 있는지.... 유령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일단 두번째 테잎도 보자구요"
두번째 테잎이 틀어졌다. 해일로선 가능하면 보고 싶지 않은 테잎이었다. 테잎의 시작은 억수처럼 내리는 폭우속에 유령처럼 버티고 선 흉가의 전경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쏟아붓듯 내리는 폭우를 보자 세사람은 금방 간밤의 그 지루하고 끔찍했던 기억을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해일이 빨리감기로 테잎을 뒤로 돌리자 테잎에는 정신없이 광에서 뛰쳐 나오는 스텝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해일은 거기서 다시 테잎을 재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