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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촌리(마지막회)
게시물ID : panic_276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아이큐0
추천 : 25
조회수 : 342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08/08/25 15:36:21
11. 산 자와 죽은 자(최종회)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해일은 볼을 타고 전해지는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의 냉기를 느낄 수 있었다. 세포 하나까지도 제 것이 아닌 양 그 본래의 응집력을 잃고 저마다 늘어져 있었으며 의식은 깜빡이는 백열등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이곳이 어딘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고 다만 아주 오래전의 일처럼 기억의 조각들이 의식속을 찾아 들었다간 다시 사라지곤 하였다. 눈을 떠 보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시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고 그동안 해일은 많은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속에는 어김없이 악몽같은 목촌리의 밤들이 등장하곤 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몸을 움직여 보려고 조금씩 꿈틀거려 보았다. 뼈마디 하나까지도 삐거덕거리는 뻐근한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어느 순간 강렬한 빛이 한줄기 그의 의식속을 찾아 들었다. 그는 힘겹게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는 이내 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빛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까스로 바닥을 짚으며 몸을 일으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균형 감각을 상실한 사람처럼 다시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둔탁한 통증이 머리에 전해졌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강렬한 통증이 그의 의식을 빠르게 회복하도록 재촉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없이 늘어져 있던 그의 세포 조각들도 순간적인 응집력을 발휘하여 그에게 힘을 북돋아 주었다. 그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앉은 다음 천천히 눈을 떴다. 빛은 머리 한참 높은 곳에 난 창틈으로 비추어 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주위를 둘러 보았다. 낯선 장소. 그는 처음 자신이 있는 곳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금씩 시간이 흐르고 기억이 되살아 나면서 자신이있는 이곳은 바로 어젯밤 짐승들에게 쫓겨 달아났던 나이트 클럽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클럽 안은 텅비어 있었고 을씨년스럽게 아무렇게나 바닥을 나뒹구는 술병 몇개가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는 새삼 자신의 온 몸을 어루만졌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도대체 믿겨지지가 않았다. 그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때 그의 뒤쪽으로 물컹한 감촉의 물체가 손에 잡혔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을때 거기에는 뜻밖에도 박호철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사람이 숨을 쉬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가 이렇게 크다는 것을 그는 새삼 실감하고 있었다. 무표정하게 죽은 박호철을 쳐다보던 그의 눈동자가 빠르고 생기있게 좌우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마른 음성이 튀어 나왔다. 

 

"혜경..... 윤혜경, 윤형사!"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혜경의 이름을 부르며 부지런히 클럽 구석 구석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의 마른 음성은 공허한 반향을 불러 일으키며 클럽안을 한바퀴 돌아 다시 그의 귀로 돌아왔다. 그리곤 다시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지만 해일은 클럽안 어디에도 혜경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슴 한가운데 뻥하고 구멍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는 심한 현기증에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갑자기 감당하기 어려운 피로가 그의 온몸을 엄습해 왔다. 바깥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다. 잠시후 그는 먼 의식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 소음들을 들으며 서서히 정신을 잃어갔다. 

 

* * * 

 

해일이 눈을 떴을때 가장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희미한 어둠이었다. 처음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이제 정신이 들어요?" 

 

그는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낯익은 얼굴 하나가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는 김감독이었다. 

 

"어떻게?" 

 

해일은 몸을 일으키려다 소스라치게 비명을 지르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온몸의 뼈마디 하나까지 전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아픔이 한순간 살아났다 다시 사라졌다. 

 

"아직 움직이지 말아요. 우선은 안정을 하는게 제일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여긴 어딥니까?" 

 

"걱정말아요. 다 끝났어요. 여긴 병원입니다" 

 

"병원?" 

 

그는 새삼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의 머리 맡에는 누가 갖다 두었는지 꽃다발이 여러개 놓여 있었고 그의 옆 침대에 김감독이 걸터 앉아 있었다. 김감독의 팔에선 투명한 관이 빠져 나와 있었는데 해일은 그것이 링겔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병실은 밝기가 낮은 조그만 등 하나로 밝혀져 있었고 기분 나쁠만큼 아늑한 고요가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의사가 눈을 뜰때 빛이 너무 밝으면 눈을 상할 수도 있다고 이렇게 어둡게 해 놓았소. 덕분에 나는 심심해서 죽는줄 알았지. 책도 한 권 제대로 못 읽고 말이야. 정PD는 사흘만에 깨어난 거요" 

 

"사흘만에 깨어났다구요?" 

 

"그래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깨어났는데 정PD만 이제 깨어난거요" 

 

"다른 사람들.... 누구죠? 누가 살았죠?" 

 

"강은영, 배영환..... 그리고 나하고 당신......" 

 

"그게 전분가요? 윤형사는..... 윤혜경 형사는 어떻게 되었죠?" 

 

김감독은 창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문에 촘촘하게 브라인드가 쳐져있었다. 그 사이로 가늘에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으로 봐서 밤은 아닌 모양이었다. 

 

"묘한 일이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시체라도 발견되었는데 윤형사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소. 어디에서도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구만!" 

 

김감독은 허리를 굽혀 양말을 뒤집더니 그곳에서 담배 한개피를 끄집어냈다. 그리곤 입에 물고 역시 양말 속에 숨겨둔 성냥으로 불을 붙인 다음 길게 한모금 토해 내며 말했다. 

 

"산다는게 참 묘한거요. 불과 몇 일전만 해도 등뒤에다 늘상 죽음을 엎고 다녔는데 막상 살고보니 의사들이 건강에 해롭다고 이 조그만 담배 한개피도 제대로 못 피우게 하는게 아니겠소? 모르긴 몰라도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건 그런 차이인 것 같소. 윤형사.... 좋은 아가씨 였는데 참 안되었소. 그저 어딘가에 잘 살고 있겠지 하고 생각하는 수 밖에....." 

 

넋두리 같은 김감독의 말을 귓전으로들으며 해일은 그녀와의 처음 만남을 떠올렸다. 아니 엄격하게 말하면 처음 만남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처음으로 제대로 보고 짜릿한 감정을 느꼈던 바로 그 순간 말이다. 목촌리를 빠져 나가며 렌턴 불빛속에 드러났던 청순하고 아름답던 그녀의 얼굴. 

 

* * * 

 

희생자들의 합동 장례식이 열린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이정란을 비롯하여 오세창, 이정우, 박희철, 박호철등이 그 장례식의 주인공이 되었다. 각각의 희생자들의 유족들 속에 배영환과 강은영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배영환은 아직 상처가 회복되지 않아 휄체어 신세를 지고 있었지만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장례식에 참가한 것이었다. 

 

해일은 행렬에서 다소 떨어진 언덕배기에서 혼자 장례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나머지 사람들은 생존으로 또는 죽음으로 그 악몽의 시간들을 끝을 맺었지만 해일은 그들처럼 분명하고 간결하게 그 일을 잊어버리거나 없었던 일처럼 기억속에 묻을 수가 없었다. 뭔가 아직은 해결이 되어야 할 것만 같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아쉬운 여운이 그의 마음을 잡고 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착찹한 마음의 한가운데는 윤혜경이 자리잡고 있었다. 윤혜경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일단 그녀의 행방은 실종으로 처리 되었고 다시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사망으로 그 꼬리표를 다시 바꿀 것이었다. 그러나 해일은 그녀의 사망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 어딘가에 그녀가 살고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이 내내 그의 가슴 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확신이 그의 공허한 마음까지 채워줄 순 없는 일이었다. 삼일도 채 되지 않는 그녀와의 짧은 만남이 그에게 이토록 긴 마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리라고는 해일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혜경이 그녀 특유의 넉넉함과 씩씩한 미소를 머금고 불쑥 이곳에 나타날 것만 같아 장례식이 끝난 이후에도 쉽게 자리를 뜨질 못했다. 예기치 않게 찾아온 사랑은 미처 사랑임을 느끼기도 전에 또한 예기치 않게 떠나버린 것이다. 그는 마음의 준비조차 하지 못했는데. 이젠 완연한 겨울임을 실감케 하는 매서운 바람이 한웅큼의 낙엽을 실은 채 그의 곁을 스쳐갔다. 해일은 추위로 얼어붙은 육체보다 더 서늘한 가슴을 싸안고 내키지 않는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 * * 

 

"왜 여태 결혼하지 않으셨어요?" 

 

여자가 자못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렇게 물어왔다. 

 

"글세요, 뭐..... 직업적인 이유도 있겠고, 또..... " 

 

해일은 말을 맺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문득 오랜 기억속에서 혜경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혹시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 생각하시는거 아니예요?" 

 

"왜 그런 생각을......" 

 

"그냥 직감이죠, 뭐.... 여자들만의..... PD라는 직업..... 참 재밌는 일일 것같아요. 그쪽 사람들 결혼해도 일에 매달려 얼굴 보기도힘들다던데...." 

 

"분야에 따라서는 재밌는 직업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제 분야는 별로 그렇진 않은 것 같습니다. 특별히 유명한 스타들과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화려한 조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무한한 인내심과 근성이 있으면...." 

 

그녀는 시쿤둥한 해일의 말에 다소 기운이 빠지는지 몸을 의자 뒤쪽으로 기울이며 시선을 주변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는 따분하다는 표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녀는 분명 PD라는 직업에 대한 막연한 흥미만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온게 틀림 없었다. 오늘 그녀와의 자리를 주선한 것은 조연출 하준민이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저녁때까진 시간을 같이 보내도록 노력해 보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해일은 여자와 마주 앉은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와의 약속을 지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해일이 자리에서 먼저 일어서며 말했다. 

 

"그만 나갈까요?" 

 

여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해일을 올려다 보았다. 이어서 그녀의 얼굴엔 약간의 불쾌감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커피숍을 나섰을땐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해일의 기억으로 올해의 첫 눈이었다. 커피숍에 있는 그 짧은 시간에 벌써 수복하게 쌓인걸 보면 상당히 많은 눈이 올 것 같았다. 해일은 묵묵히 걷다가 버스 정류장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 보았다. 그녀의 기분은 그리 유쾌해 보이지 않았다. 

 

"집에 어떻게 가십니까?" 

 

"차 가지고 왔어요. 그리고 다른 약속 있어서 어딜 좀 가야 해요" 

 

"그러시군요. 그럼, 여기서 그만 헤어져야 겠군요" 

 

"그래요, 오늘 즐거웠어요" 

 

그녀는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만 까딱하곤 날쌔게 뒤돌아서서 오던 길을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 가기 시작했다. 뒷모습을 보며 해일은 오늘 그녀를 만난 일에 대해 씁쓸한 후회를 하고 있었다. 그는 몸을 돌려 그녀와 반대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그의 나이도 마흔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많은 상처와 아픔을 남겨준 목촌리의 기억도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속에 조금씩 묻혀지고 있었다. 지난 10년간 그는 사람에게 망각이라는 결함이 때론 훌륭한 위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해일은 늘 감사하고 있었다. 김감독은 그때 이후 방송일을 그만 두고 작은 음식점의 주인이 되었다. 언젠가 한번 가게에 들렸을때 카메라 대신 앞치마를 두른 김감독의 모습이 생각보다 훨씬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 혼자 웃음을 머금었던 기억을 그는 아직 가지고 있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너스레를 떨었다. 

 

"이봐 정PD, 난 처음부터 아주 음식점 주인을 할 껄 그랬어. 손님들이 내 얼굴만 보면 구수한 국밥이 떠오른다지 뭐야.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마누라하고 애들이 여간 좋아하는게 아냐. 그 전에는 내가 1년 365일 어디 집에 붙어 있을 시간이 있었나? 그야말로 장똘백이처럼 밖으로만 싸돌아 다녔지. 이젠 가족들한테 좀 잘 해야겠어" 

 

강은영과 배영환은 10년전 그 일이 있은 바로 이듬해에 행복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에는 해일도 누구보다 반가운 마음으로 참석했었다. 결혼후에도 두사람은 여전히 티격태격 싸우면서 각자의 일들을 하다가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강은영은 일을 그만두고 가정주부로 집에 들어 앉았다는 얘기를 오래전에 들었다. 

 

최근에 아이가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입학한다며 들떠서 전화하던 배영환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선했다. 결국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런 변화도 가지지 못한 사람은 해일 자신뿐이었다. 최근에 오늘처럼 몇 번 선을 보긴 했지만 자리에 나갈때마다 선뜻 내키지 않는 어떤 미련을 그는 쉽게 떨쳐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미련의 뒤편에는 여전히 혜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행방에 대한 의문은 집요하리만치 해일의 삶을 쫓아 다녔다. 해일의 생각과는 달리 어쩌면 그녀는 이미 어딘가에서 나름대로의 새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몰랐다. 단지 그녀가 어떤 이유로 굳이 자신에게 연락을 하지 않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에 대한 해일의 감정같은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해일이 그렇게 과거의 기억속을 더듬으며 눈길을 걷고 있을때 누군가 그의 어깨에 강하게 부딪히는 사람이 있었다. 갑작스런 충격에 해일은 휘청하며 그 자리에 넘어질 뻔 했다. 그가 가까스로 균형을 잡으며 앞을 보았을때 그의 앞에는 한 여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녀가 자신과 방금 부딪힌 여자임을 해일은 금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자신의 주위에 흩어진 선물 꾸러미를 주섬주섬 주워담고 있었다. 눈위에 흩어진 그녀의 짐을 하나 줏어서 건네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 해일의 눈길이 순간 빛났다. 짐을 줏어 챙기다 말고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해일의 눈길을 대하고 여자는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러시죠?" 

 

"저기..... 혹시..... 윤.....혜......경?" 

 

"네?" 

 

"윤혜경씨 아닌가요? 저 기억하지 못 하겠어요? 정해일입니다. 정PD! 옛날에 다큐맨터리 찍으러 갔다가....."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은데요? 죄송하지만 전 윤혜경이란 사람 몰라요" 

 

여자는 전혀 낯선 표정으로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잠깐만요, 예전에 목촌리..... 정말 기억하지 못 하시겠어요?" 

 

"목... 촌....리요? 거기가 어디죠?" 

 

"아.... 제.... 제가 사람을 잘못 봤나 보군요" 

 

"괜찮아요. 세상에 비슷한 사람은 워낙 많으니까요. 그럼....." 

 

그녀는 가볍게 인사하곤 몸을돌려 자신의 갈 길을 걸어갔다. 해일은 그녀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은채 그 자리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쫓았다. 그녀는 저만치 앞 서 가다가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해일을 발견하고 그녀는 얼은 고개를 돌리고 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단순히 닮았다는 표현으론 너무나 부족할만큼 그녀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10년의 세월동안 기억속에서 희미해져 가던 혜경의 모습을 그녀를 대하는 순간 분명하게 기억해 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잠시후 해일은 자신의 상상이 얼마나 엉뚱하고 멍청한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인가를 깨달아야 했다. 해일이 기억하는 혜경의 모습은 분명 10년전의 그녀의 모습이었고 방금 그가 대한 바로 그 여자 또한 10년전 혜경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혹시 그녀에게만..... 시간이 흐르지 않고 정지해 있었다면 몰라도. 해일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고 자신의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 사이에도 어지러운 눈발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그의 머리와 어깨위로 내려 앉았다. 해일이 자신의 아파트 입구에서 택시를 내린 것은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저녁내내 그는 혼자서 술잔을 기울였다. 오늘은 바로 10년전 자신들이 처음 목촌리를 찾은 날이었다. 그 날은 끊임없이 비가 내렸는데 오늘은 이른 첫눈이 쉼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얼큰한 취기에 몸을 기댄채 비틀거리며 눈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가끔씩 악몽을 꾸곤 한다. 그리고 그 악몽속에선 예외없이 혜경을 만나곤 했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그녀의 얼굴은 조금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그녀의 얼굴을 오늘 낮에 우연히 어떤 여자로 인해 기억해 낸 것이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취하지 않고선 차갑게 비어있는 그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몇 번이나 눈길위에 쓰러지며 겨우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그때 뒤쪽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어찌나 무서운 비명이던지 그는 한순간에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돌렸다. 막 가로등 아래로 거의 정신을 잃을 듯한 사내 하나가 나타났다. 그리고 뜻밖에도 그의 팔에서 진홍색 핏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사내는 살려달라는 비명을 지르며 허겁지겁 해일을 향해 달려왔다. 사내의 팔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하얀 눈길위에 수를 놓듯 떨어져 내렸다. 사내가 해일에게 거의 쓰러져 안기듯 무너져 왔다. 해일은 사내를 부축하려다 중심을 잃고 사내와 함께 그 자리에 쓰러졌다. 역시 술을 너무 많이 먹은 탓이었다. 


 

"제발, 선생님 살려 주세요, 제발!" 

 

고개를 든 사내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극도의 공포심이 사내의 모든 육체와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해일은 순간적으로 사내의 공포가 웬지 낯설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다음에 사내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들이 그의 온 몸을 얼어 붙게 만들었다. 사내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자신의 말들을 쏟아 부었다. 

 

"짐승들.... 짐승들이 나를 물어 뜯으려고 해요. 저기..... 푸른 안개가 보이죠? 당신도 보이죠? 안개가 나타나면 놈들이 나타난 증거예요. 저 소리..... 제발 살려 주세요" 

 

순간 해일은 자신의 온 세포가 경악하며 소스라치게 일어서는 소리를 들었다. 해일은 사내가 보고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푸른안개 같은 것도 없었다. 그건 사내에게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사내가 엉금엉금 기듯이 달아나다 비명을 지르며 다시 그 자리에 쓰러졌다. 사내는 공허한 밤하늘에 시선을 주며 발작적으로 외쳤다. 

 

"저.... 저리가! 저리가!....... 뭐, 뭐라구? 해..... 일?" 

 

넋을 잃고 사내를 바라보던 해일의 의식속으로 자신의 두마디 이름이 비수처럼 파고 들었다. 사내가 두려운 눈으로 해일을 돌아보았다. 

 

"다.... 당신 이름이 정해일이란 사람이요? 어서.... 어서 대답해요" 

 

해일은 어떤 예감에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그래요. 내가..... 정해일이요" 

 

사내가 다시 밤하늘을 바라보곤 다시 고개를 돌려 말했다. 마치 그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앗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공포에 젖어 있었다. 

 

"여기.... 여기..... 윤혜경이란 사람이..... 다.... 당신에게 자신이 바로 곁에 있단 말을 전하랍니다" 

 

사내는 말을 마치자 마자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재빠르게 허공에다 말했다. 

 

"그... 그럼 정말 날 살려주는 거죠? 저 짐승들로부터 날 보호해주는거죠? 아.... 알았어요, 알았어! 으악!"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허겁지겁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해일은 감전된 듯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곤 사내가 바라보던 곳을 향해 섰다. 

 

"혜경? 윤혜경, 당신이오?" 

 

그러나 어둠만이 그를 응시할뿐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번엔 해일이 더욱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이오? 지금 날 보고 있는 것이 당신이냐구!" 

 

그의 입에서 파란 입김이 어둠속에 퍼져나갔다. 해일은 한동안 말없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질 않았다. 이윽고 그는 하얀 눈위에 무릅을 꿇으며 작은 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어깨위로 눈발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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