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간다고? 너 제정신이야? 철진이가 죽었어. 철진이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떤 의미를 주는지 모르겠어? 죽었다고! 죽었단 말야!”
“상관없어. 우린 나가야 해. 여기 있으면 모두 죽어. 그 계집에게……모두, 모두.”
“미친 자식.”
인상을 쓴 형진이 내뱉듯 중얼대며 민석을 밀쳐냈다. 그는 민석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친구가 죽었단 사실을 체 받아들이기도 전이었다. 몸 속을 관통하는 전율은 아직도 이어졌고 머리 속은 하얘진 체로 정지해 버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확인할 수 없었지만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웃고있던 녀석이 지금 허리가 잘려진 체 누워있었다.
“가자고? 나가야 한다고? 하……하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저 안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진영의 시체? 다른 사람들?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는 게 중요했다. 형진은 뭔가에 넋이 나간 사람마냥 횡설수설 하는 민석을 내버려 두고 창고 안으로 달려갔다. 심장 뛰는 소리만이 그의 귀를 자극했다.
“아니……!”
예상은 했지만 그곳은 정말 끔찍했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친 것처럼 사방이 난장판이었고 붉은 페인트로 도배를 한 것처럼 바닥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천장과 벽에는 꿈틀대며 썩어가는 살점들이 널려 있었고 커튼 위에는 사람의 내장으로 보이는 기관이 구불거리며 늘어져 있었다. 한마디로 상상도 할 수 없던 지옥이었다.
잔인한 살육의 신이 지나간 자리가 이런 것일까? 그는 끔찍한 정경에 얼굴을 찌푸렸다.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이런 일이 벌어진 데에 대한 원인을 찾고 싶었다. 게다가 철진의 시체를 보고 난 터라 이미 정신은 극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지금의 광경은 오히려 그의 의문에 실질적인 답을 주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는 질퍽한 피와 파괴된 신체들을 지나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발에 뭔가가 닿았고 그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축구공 같이 둥근 머리통이 발치에 닿아 움직이고 있었다. 발을 댄 상태로 돌려보니 머리가 긴 여자의 얼굴이었다.
‘미진?’
죽은지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덕지덕지 붙은 피가 그대로 굳어 흉측하게 말라 있었다. 두개의 눈은 모두 파여져 퀭하게 구멍이 나 있었고, 파이기 전엔 꿰맴을 당했는지 우툴두툴한 실밥이 눈 밑과 꺼풀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그런 구멍위로 어디서 생겨났을지 모를 구더기가 똬리를 틀며 기고 있었다.
“정말 끔찍하군.”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며 욕지기가 났다. 보통 사람이라면 쓰러졌을지도 모르지만 계속되는 살인으로 이제 사람의 내부를 보는 일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는 더러운 것을 떼내듯 미진의 머리를 발로 차 밀어버렸다. 그리고는 구둣발을 타고 오르는 흰색의 벌레를 바닥에 짓이긴 후 서둘러 앞쪽으로 나아갔다.
도대체 이 안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형진은 나름대로 추리를 했다. 희연이 죽고 철진이 죽었다. 경찰이 들어온 걸까? 도착하기 전까진 그럴지도 모른다 생각했었다. 잔인한 스너프 필름을 찍어온 엽기적인 젊은이들. 살인범을 잡기 위해 경찰에선 눈이 뒤집혔을 거고 이곳을 급습해 증거와 범인을 채가려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희연이 죽었다. 철진이야 그렇다 쳐도 희연까지 죽어있다면 앞뒤가 맞지 않았다. 게다가 너저분하게 흩어진 살점들은 모두 희연의 것으로 보였다. 고여있는 핏물 사이로 보이는 신체들은 여자의 기관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상식 이하의 잔인한 살인이란 점에 경찰은 당연히 예시에서 밀려났다.
‘그럼 누구지?’
어쩌면 자신이 가고 난후 민석이나 철진, 혹은 진영이 갑작스러운 살인 욕구에 미진을 죽였을지도 모른다. 이런 일에 깊게 빠지면 한 순간의 충동으로 사람의 몸뚱일 도륙하게 되니까. 그러나 이제는 문 앞에 있는 철진이 걸렸다. 철진은 분명 죽어있다. 그것도 잔인하게 말이다. 저 모습을 보니 근처에 흩어져있는 미진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한시라도 빨리 미쳐버린 살인에 대한 해답을 풀어야 했다. 그는 사라진 진영이 나타나길 바라며 한걸음 한 걸음 앞을 향해 나아갔다.
“이럴 수가!”
그리고 그는 보았다. 온 몸에 피를 묻힌 체 쓰러져 있는 진영을 말이다. 너무도 처참히 변해버려 처음에는 그것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었다. 멀쩡하던 귀는 한쪽이 아예 잘라져 버려 그 사이로 피질이며 고름이 엉켜 있었고 눈은 위를 향해 부릅뜬 체 멈춰있었다. 예리한 날이 박혔던지 눈알이 반으로 갈라져 은밀하게 감춰져 있어야 할 세포가 드러났다. 게다가 몸 전체가 누군가 그의 몸을 상대로 잘 드는 칼을 시험한 것처럼 이곳 저곳에 찍힌 자국 뿐이었다.
“지, 지, 진영아?”
놀란 민석이 자리에 주저앉으며 진영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죽은지 한참이 지났는지 그의 몸은 사후경직으로 인해 차갑고 딱딱하게 변해 있었다. 손가락 몇개가 잘려나간 체로 굳어 정육점에서 보는 고깃덩이처럼 처참하게 놓여 있었다. 그는 경기를 일으키듯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애써 마음을 추스리던 형진이었지만 그 모습을 보니 참기 힘든 기운이 몰아쳤다. 두려움. 슬픔. 분노. 의문. 복합적인 감정이 한데 섞이며 그의 머리속을 어지럽혔다. 끔찍한 살인마가 나타난 게 분명했다. 그 뭔지 모를 존재는 안에 있던 진영을 죽이고 미진을 죽인다. 그리고 도망치려는 철진에게 칼을 휘둘러 죽게 만들고 유유히 사라진다. 민석이 제 정신이 아닌건 그것에 대한 충격 때문이겠지.
“이런, 젠장 맞을!”
출처를 알 수 없는 내부의 힘은 그의 몸을 돌아 뜨겁게 달궈놨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며 이를 갈았다. 그리고는 친구들을 죽인 존재가 어딘가에 있기라도 하듯 두 눈을 번뜩였다. 생각 같아선 당장이라도 찾아내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픈 기분이었다. 그때 묘한 소리가 들려 그는 잽싸게 시선을 돌렸다. 그것은 비디오카메라였다. 그가 떠나기 전 놔두고 간 카메라. 혹시 저거라면……
미쳐버린 살인에 대한 정보가 있을지도 모른단 사실에 그는 황급히 재생버튼을 눌렀다. 상황은 약 2시간 전으로 돌아갔다. 떠나기 전에도 실수로 켜둔 생각이 났는데 누가 새로 녹화를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누구일까? 진영이? 철진이? 아니, 상관은 없었다. 그는 숨을 죽인 체 장면이 주는 정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촉각을 세웠다.
‘이제 어쩌지. 형진이도 죽을 텐데. 모두가…… 모두가 죽을 거야……’
밖에서 서성이던 민석은 안에 들어간 형진을 기다리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걱정은 됐지만 차마 그 끔찍한 창고로 다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는 열려진 틈새를 노려보다 바닥에 있던 철진의 시체에 다리를 부딪히곤 흠칫 놀랐다. 죽은, 이미 죽어서 차갑게 식어버린 몸뚱이. 그것이 한때 자신이 알고 지내던 친구란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죽는다는건…… 결국 이런 걸까.’
묘한 기분이었다. 전에는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던 영역. 이제껏 무수히 많은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사람이 죽는다는 것에 그리 큰 의미를 두어본 적이 없는 민석이었다. 그에게 희생자는 잘라지고 쪼개져 죽는, 엽기적인 비디오를 장식해줄 일회용 도구일 뿐이었다.
그래도 아는 사람은 조금 다르지 않을까 했었다. 하지만 정신적인 슬픔이나 씁쓸함 외에 사체자체에 대한 느낌은 전에 죽인 여자들과 똑같았다. 철진도 처참히 찢겨지고 잘라진 하나의 고깃덩이일 뿐이었다. 반응도 없고 감각도 없는 상태.
‘어차피 인간은 모두 같아. 죽으면 웃지도 않고 떠들지도 못하는 하찮은 존재일 뿐이다. 고상해 보이는 인간들도 속을 파헤치면 내장과 피밖에 나오지 않을 테지. 지금 죽어있는 내 친구 녀석처럼.’
그는 철진의 몸뚱일 눌러보다 반대편으로 재꼈다. 금새라도 떨어질듯한 신체는 그 동작에 의해 반으로 분리되 양쪽으로 잘라져 나갔다. 상체는 문이 있는 곳으로 나왔지만 하체는 아직 문틈에 낀 상태였다. 의식이 흔들리며 내부에서 뭔가가 꿈틀댔다. 그것은 조금씩 손을 뻗치며 그의 정신을 지배하려 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적대감에 그는 철진의 몸을 계속해서 짓이겼다. 이미 빠질 때로 빠진 피라 아까처럼 피가 발을 적시진 못했지만 신체를 이루던 괴상한 기관들이 터지고 으깨져 오물을 튀겼다.
‘없어져. 없어져버렷!’
그는 자신의 행동에 경악하면서도 그것을 멈추지 못했다. 죽어버린 친구의 시체를 파손하는 행위. 잔인했지만 생각일 뿐 발은 여전히 제멋대로 움직이고 꼬여갔다. 공포감. 끝도 없이 밀려오는 공포감이 그를 덮치듯 야수처럼 이빨을 드러냈다. 그는 두려웠다. 너무도 끔찍하고 두려워 친구의 사체를 훼손하는 행위에서 새로운 안도를 얻으려 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묘하게도 공포심은 점점 극복됐다. 예전에 저질렀던 잔인한 살인들이 하나씩 생각나며 진정제 역할을 해주었다. 민석은 살점이 흩어진 바닥에서 예리한 칼 하나를 발견하곤 그것을 주워들었다.
‘살아야 해. 어떻게든. 그리고 다가서는 것들은 모조리…….’
칼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민석은 침을 꿀꺽 삼켰다. 주변은 아직도 어두웠고 바닥은 눅눅하고 습기에 차 금새라도 꺼져버릴 것처럼 위태하게 느껴졌다. 그는 어딘가에 있을 희연을 떠올리며 눈을 부릅떴다. 자신에게 감당치 못할 시련을 준 악독한 계집. 아마 모두를 죽이는 게 그 계집의 뜻이겠지만 절대 그렇게 놔두진 않을 생각이었다. 어떻게든 살아서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이상한 낌새라도 느껴진다면 가차없이 칼을 휘두를 요량으로 그는 정적에 쌓인 주변으로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 이럴 수가.”
카메라를 들고있는 형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화면 안에선 민석이 악귀와 같은 웃음을 흘리며 진영을 무참히 난도질하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진영의 몸이 새우처럼 굽혀졌다. 쪼개진 눈에선 피가 펌프처럼 솟아나왔고 복부가 베어진 듯 그곳을 두 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목구멍으로 흐르는 피 때문인지 진영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컥컥>하는 거친 신음이 간헐적으로 튀어나왔다.
민석은 그런 진영을 가차없이 난자했고 그 기세에 방어차 올리던 손가락이 후드득 잘라져 땅으로 굴렀다. 민석은 푸들거리는 진영의 몸이 완전히 멈추었을 때에야 상체를 일으켰다. 그런 그의 표정엔 짙은 승리감이 베여 있었고 웃고 있는 입 사이로 뾰족하고 드센 이빨들이 보였다.
‘설마…….’ 형진은 저도 모르게 카메라를 툭 떨겼다.
‘그럼 모두 민석이 한 짓이란 말인가? 광기에 미처 친구들을?’
차마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살인에 대해 가장 희열을 느끼고 있던건 민석이었고 또 실제로 그는 살인을 주도하는 배역이니 말이다. 스너프를 찍어도 주연은 늘 그였다. 아무래도 보조만 맞추는 철진이나 간단한 치료(?)를 하는 진영, 그리고 그것을 화면에 담는 자신보다도 돌변할 가능성이 짙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어떻게 이런 짓을.’ 끔찍한 일이었다. 그는 가슴을 움켜쥐곤 가까스로 목구멍에 걸려있던 호흡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죽어있는 진영을 음울한 눈으로 바라봤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분노가 그를 애워쌓다. 그는 민석에게 깊은 증오와 원망을 가지며 몸을 일으켰다. 두려움. 몸을 전율케 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복수심이 앞섰다. 그는 진영의 품에 끼워진, 새빨간 피를 먹어 야릇한 광체를 띄며 빛나고 있는 매스를 주워 들곤 밖으로 걸어갔다.
“이제야 오는 거야?”
자라처럼 목을 숙인 체 눈알을 굴리고 있던 민석이 형진을 보곤 밝은 표정을 지었다. 형진은 근처를 둘러봤다. 세워둔 차를 타고 다른 곳으로 도망치지 않을까 했는데 민석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들고있던 칼을 뒤로 숨긴 체 감정이 거의 실리지 않은 예의 비인간적인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안에 시체가 있던데.”
그가 나오기 만을 기다린 민석은 그 말에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부르르 떨며 어깨를 움츠렸다.
“진영이가 죽어 있었어. 그것도 잔인하게. 미진이란 계집도 아주 걸레가 되 있던데. 혹시 아는 거 없어?”
“나, 난…….” 시선을 피하는 민석의 눈을 노려보며 그는 말을 이었다.
“경찰은 아니야. 그렇지? 왔다면 멀쩡한 인간을 난도질할 필요가 없지. 누군가 진영을 죽였어. 아주 맛이 간 녀석이던데. 벌집을 만들어 놓은 것처럼 몸 전체를 쑤셔 놨더군. 아마 여기 있는 철진도…….” 무심코 아래를 보던 형진은 철진의 시체가 아까완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흉측하게 변해있는 것을 알곤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군. 아주 조각이 되 버렸는데. 내가 들어가기 전까진 그나마 몸이 이어져 있었는데?”
<몸이 이어져 있었는데?> 그 한마디가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뇌수에 박혔다. 민석은 그 말이 주는 의미를 알고 있었다. 잠시 웅크리고 있던 그가 속삭이듯 중얼댔다.
“나는 몰라. 아무것도…… 나는 모른다구.”
“뭐?”
“내가 한 게 아니야. 희연이…… 희연이 그런 거야.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형진은 가슴속의 증오가 칼날이 되어 꿈틀대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금세라도 날아갈 것처럼 위태하게 곡예를 부렸다. “미안하지만 잘 안 들리는데. 무슨 소릴 하는지 좀더 자세히 얘길 해주겠어?”
“희연이 나타났어. 넌 믿지 않겠지. 그러나 사실이야.”
“하. 또 그 귀신 타령이군.”
“사실이란 말야!” 민석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정적에 쌓인 창고를 노려보며 그것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대항하듯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체로 입을 열었다.
“그 년이 나타나서 모두를 죽게 했어. 내 눈에는 환상만 보였고…… 아무리 해도 없어지지 않았어. 난 분명히 희연을 죽인 거야. 그래. 희연을 죽였다구. 그런데 늘 다른 녀석이었어. 진영이가 죽었고…… 으흐흐. 그래. 진영이가, 아니 희연이 내게 달려들었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이었지. 난…… 난 그저 내 목숨을 지키려고 한 것 뿐이야. 그 다음엔 철진이가 죽어 버렸어. 미진은 마디마디가 토막이 되 진열이 됐지. 그래도 난 그들을 죽인게 아니야. 날 믿어줘. 내가, 내가 한게 아니야!”
그의 말은 감정이 격해진 탓인지 두서도 없었고 약간 산만했다. 하지만 표정은 진지했고 뭐라 설명하기 힘든 이질적인 힘이 밑바탕 깊은 곳에 깔려 판단을 자극했다. 형진은 희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그때가 6월이었으니 그리 오래된 시간은 아니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끌다가 죽어간 여자. 그들에게 잔인이란 단어를 가장 완벽하게 끌어내준 여자. 그녀가 자신을 죽인 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타난다? 귀신이 되서? 말도 안 되는 억측이긴 하지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말이다. 아니, 그는 차마 민석이 친구들을 죽게 한 장본인이란 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넌 희연이 애들을 죽였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그래. 믿어야 해. 지금도 그 계집은 근처 어디에서 우리를 노리고 있을 거야. 감시하고 있을 거라구.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해.”
민석은 마치 이곳에 머무르는 행동이 몹시나 거북스러운 것처럼 짜증 섞인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의 안구는 한곳으로 몰려 고정 되 있었고 힘이 드는지 지면에 맞닿은 다리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심하게 겁을 집어먹고 있는 자의 눈. 그리고 공포. 그런 행동을 보니 형진은 또다시 망설여졌다.
‘정말 민석이 죽인게 아니란 말인가? 아니라면 이렇게 떨고 있을 리가 없는데. 무엇보다 저 눈은 살인에 대해 희열을 느끼는 눈이 아니야. 공포…… 그래, 공포 그 자체야.’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순 없었다. 사실이든 아니든 사람이 셋이나 죽어나간 마당에 이곳에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초월적인 두려움과는 다른 현실적인 압박이 그를 자극했다. 그는 차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몸을 틀었다. 순간 민석이 쥐고있는 칼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찌를 듯이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 칼. 그는 흠칫 놀라며 반사적으로 뒷걸음치며 민석을 노려봤다.
“너…… 무슨 생각이야?”
“응, 응?”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민석은 형진의 눈이 그가 가진 칼에 고정되 있다는 것을 알곤 떠듬거렸다. “아, 아무것도 아냐. 단지 나를 지키기 위한 거야. 희연이…… 오고 있으니까.”
“너를 지킨다고? 누구로부터?” 형진의 얼굴은 점점 붉게 타오르고 눈가에 서늘함이 자리 잡혔다. “나로부터?”
“아니야. 그런게…….”
“진영이도 너가 죽인거지? 그렇지? 이젠 나도 죽일 셈인가?”
“형, 형진아…….”
민석은 뭔가 일이 잘못되어감을 느꼈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오해로 마지막 남은 친구와의 사이가 틀어지는걸 원치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형진의 의문을 풀어주려 노력했다.
“아니야. 절대 아니라구. 내가 왜 너를 경계해. 난 희연을 죽이려고 한 거야. 그 계집은 벌써 진영이를 죽였어. 미진이란 계집도 또 철진도 전부, 전부 다 죽였다구. 그리고 조금 지나면 나도 죽일 거야. 지금도 틈새만 노리고 있겠지. 난, 난 그것이 싫어. 난 절대 그것에 휘말리고 싶지가 않아. 너하고 내가 이러면 안되. 서로를 믿지 않으면 안된다구. 다 그 년이 바라는 일이야. 제발 믿어줘. 난 그저 방어하기 위해 칼을 가진 것 뿐이라구.”
그러나 형진은 믿을 수 없었다. 비디오가 남겨놓은 증거와 죽은 철진을 두 번 죽이는 악독한 행위. 그리고 이제는 아무도 없는 공터에서 칼을 움켜쥔 체 자신을 기다리는 모습이라니…… 그래서 일까. 늘상 멋있게만 보이던 민석의 얼굴은 뒤틀리고 일그러진 늑대의 얼굴과 같아 보였다. 살인에 대한 욕구로 털을 곤두세우고 있는 늑대 말이다. 지금 그 늑대는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자신을 덮치기 위해.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뒤에 감추고 있던 칼에 힘을 주었다. 자신까지 죽을 수는 없었다. 어이없는 일로 하루 아침에 모든 친구를 잃긴 했지만 자신까지 희생될 수 없었다. 민석의 광기가 저지르는 죄악. 그는 거기서 벗어나야 했다.
“난 말이지. 형진아…….”
다시 말을 꺼내던 민석은 형진의 한 손이 뒤로 돌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창고에서 나왔을 때부터 그는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지 않고 있었다. 저 손엔 무엇이 있길래 내게 보이지 않는 걸까? 대체 왜? 그는 불현듯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경계했다. 형진은 평소와 똑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민석은 이미 눈앞의 그가 예전에 알고 지내던 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감정은 그렇게 서로의 울타리를 떠나 흩어졌다. 그도 한 마리 짐승일 뿐이었다. 찌르면 피가 나오고 더러운 오물밖에 차있지 않은…… 그리고 그런 형진이 자신에게 뭔가 말을 하려는 것처럼 허리를 숙였다. 민석은 그때까지도 곤두세운 촉각을 놓치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다! 예감은 남아있던 모든 신경을 자극하며 비상태세로 들어갔다. 그는 기다렸다. 형진의 손이 날아오는 순간을. 그리고 형진이 감춰진 손을 앞으로 내밀며 칼날을 들이댈 때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쥐고 있던 칼을 그의 심장에 꽂아버렸다.
“욱…….”
심장 한가운데 칼날이 박힌 형진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붉은 피를 토했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고 파란 실핏줄들이 피부를 뚫고 나올 것처럼 곤두섰다. 길게 뻗은 한 손이 민석의 팔을 잡은 체 잡아당기듯 끌고 있었다. 손에서 빠져나간 매스가 땅에 떨어져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너, 너어…… 나, 나에……게…….”
계속되는 출혈로 형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민석은 그런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덤덤한 표정으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상하게 편안한 기분이 들며 깊은 나락으로 빠져드는 안도감이 들었다. 종착역이 어디인지는 몰랐다. 그저 한없이 평화로운 기분으로 그는 천천히 끝나 가는 형진의 삶을 감상했다. 자신의 옷자락을 쥐고있던 형진의 손에서 점점 힘이 빠져가는게 느껴졌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직 살아있다는 사실만이 그를 전율케 할 뿐이었다.
‘마침내 나는 혼자 살아남은 거야. 혼자…….’
형진의 피가 새로이 발치를 적셨을 때 그는 꿈을 꾸는듯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 앉았다. 긴장이 일시에 풀리고 온 몸이 나른해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너무도 조용해서 들리는 것이라곤 볼을 타고 흐르던 물방울이 손등에 부딪혀 으스러지는 소리 뿐이었다.
“툭. 툭.”
흐려진 시야 사이로 주변이 흔들렸다. 슬픔은 없었다. 그런데도 눈물이 의지완 별개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았다. 너저분하게 흩어진 피와 살들. 한때 자신의 친구였던 존재가 남기고 간 잔해였다.
‘나는 지금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아무도 없는데…… 왜 혼자 남아 있는 거지?’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구태여 해답을 찾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편안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가져보는 만족감이 그의 몸을 감쌌다. 어쨌든 자신은 살았고 앞으로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친구를 죽이고 얻어낸 목숨이라. 후후…….’
그는 허탈한 표정으로 피식 웃다 형진의 몸에 머리를 기댔다. 무거운 쇠사슬이 등에 감긴 것처럼 사지가 늘어지며 힘이 빠져나갔다. 반쯤 열린 눈으로 보니 열리진 문틈으로 누군가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하기에 의식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참을 수 없는 기운이 몰아치며 졸음이 쏟아졌다. 아니, 죽어가는 중인지도 몰랐다. 뭐든 상관은 없었다. 그는 쉬고 싶었다. 그리고 닫혀지는 동공 사이로 앙증맞은 샌들이 비췄다 싶을 즈음 그는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들어갔다.
에필로그
“아주 특이한 환자죠. 과대망상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환각제에 대한 금단 현상도 나타나 무척 애를 먹고 있습니다.”
서울근교의 한 정신병원. 칼라가 빳빳하게 세워진 가운을 걸친 의사가 의료진을 데리고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는 손에든 차트를 이리저리 넘기며 뒤따라 오는 이들에게 설명을 했고 그들은 의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흥미 있는 표정을 지으며 쉴새 없이 받아 적고 시선을 맞추는 행위를 반복했다.
“원래는 교수대로 가야 할 친군데 정신감정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고 이리로 이송됐죠. 아마 다들 아실 겁니다. 마네킹 살인사건의 주인공.”
그 말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의 표정이 스치다 잠잠해졌다. 한때 뉴스시간을 뜨겁게 달궈놓던 <마네킹 살인사건> 그 주범이 지금 이 병동에 수감 되 있는 것이다.
“그는 왜 그런 짓을 저지른 거죠? 경찰 말로는 죽은 동료들의 몸에서도 환각 성분이 발견됐다고 하던데요. 다량의 LSD와 헤로인으로 인한 부작용이라구…….”
30대의, 귀가 뾰족한 곱슬머리 남자가 참지 못하고 끼여들었다. 머리가 벗겨진 의사는 냉철한 얼굴로 코끝에 걸린 안경을 위로 처 올리며 입을 열었다.
“네. 부검결과 그렇게 나왔죠. 죽은 세 명의 몸에서도 똑 같은 양의 환각성분이 발견 됐습니다. 특히나 LSD 수치가 높더군요. 그 정도 복용했다면 인식기능이 완전히 마비되 마네킹을 사람인 것처럼 난자해 죽이는 일도 가능하겠죠. 불행히도 그는 자신의 친구까지 마네킹으로 봤지만 말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더구나 그들은 마네킹을 상대로 살인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온 걸로 아는데, 환각제를 투여했다 해도 굳이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모두 촉망 받는 젊은이였다고 하죠? 의대에 다니는 친구도 한명 끼여 있었구요. 그러니까 제 말은 그런 사람들이 뭐 하러 환각제를 복용하고 타락하지 않으면 안됐냐 하는 겁니다.”
맞은편에 있던 머리가 긴 여자가 얘기의 틈새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그 말에 의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어깨를 들썩이는 제스처를 취했다.
저도 처음에는 이해를 할 수 없었습니다. 소영씨 말대로 20 대 초반의 유능한 젊은이들이 마약에 빠져들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무엇인지 너무도 궁금했죠. 진영이란 친구는 의대를 다녔고 나머지 셋도 내노라 하는 학교의 제법 전망이 좋은 과에 소속이 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인가부터 환각에 빠져 마네킹을 가져다 난도질을 하고 그것을 상대로 성행위를 하는 성도착적인 증세를 보였던 것이죠. 경찰에서 협조를 요청한 것도 있고 정확한 사안을 알고싶어 저희 쪽에서도 실험을 해봤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마약에 빠지게 하고 또 엽기적인 인형놀이에 빠지게 했는지를 알기 위한 것이었죠.”
모두의 눈이 의사를 향했다. 호기심이 잔뜩 섞인 대답을 갈구하는 눈이었다.
“정신과 치료중에 최면요법이란게 있죠. 사람의 의식을 무의식 깊은 곳으로 끌어 숨겨진 정보를 찾아내는 것이죠. 그것을 그 친구에게 시험해 봤습니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사실이 밝혀지더군요.”
의사는 이야기의 진행을 고조시키기 위함인지, 아니면 나름대로 드는 생각이 있던지 1- 2분간 뜸을 들이다 짧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그 친구들. 과거에 어떤 여자를 강간한 모양입니다. 이름은 희연이었죠. 정……희연, 그래요. 정희연이 맞을 겁니다. 여름이었다고 하는데 수원에 놀러 갔다 그 여자를 봤다고 하더군요. 젊은 날의 혈기인지 오기인지 글쎄, 싫다는 여자를 데리고 야산으로 끌고 갔답니다. 그러다 도중에 희연이란 여자가 사내들을 피해 도망친 거죠. 죽기살기로 뛰어간 곳이 하필이면 도로라고 하더군요. 급한 마음에 앞을 보지 않고 달려든 든 그녀는 마주 오는 트럭에 정면으로 부딪혀 두 발목과 머리가 으깨져 즉사했다고 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운전자는 왠 여자가 달려든 것만 알았지 뒤에 그녀를 쫓고 있는 사내들이 있다는 것까진 미처 파악하지 못했죠. 운전자는 그대로 도망가고 사건은 뺑소니로 처리됐습니다. 이들은 이들대로 자리를 피해 은신한 거구요.”
“그거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내면에 쌓인 불안심리가 방향을 바꾼 걸까요? 그렇다면 환각제를 복용한 것은 그 일을 잊기 위해서 인가요? 하지만 어차피 뺑소니로 처리된 사건인데 운전자에게 모든 책임이 쏠리지 않겠어요?”
소영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단 투였다.
“겁이 나서 였겠죠. 난생 처음으로 사람이 눈앞에서 죽고, 그것이 자기 실수라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견뎌내지 못하고 고통에 찬 기억을 잊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기억은 그렇게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것이죠. 도망친 운전자와 혹시라도 그곳에 있던 자신들의 죄가 밝혀지진 않을까 하는 불안. 밑바닥 속에 꿈틀대는 양심. 그런 것들이 한데 섞여 결국 그들이 정상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한 거 같습니다. 실제로 이들이 마약에 빠진 시기는 그 일이 일어났다는 6월 3일로부터 20일 정도가 흘렀을 때부터라고 하니까요."
“지독한 괴로움과 불안이 만들어낸 결과였군요. 현실을 잊기 위해서…… 그들은 감성적이긴 했지만 현명하진 못했던 겁니다.”
귀가 뾰족한 사내는 몇 번이고 입을 달싹거리더니 결국 하고싶은 말을 내뱉었다. 어느새 그들의 걸음은 203 호라는 팻말이 붙은 문 앞에서 멈추어졌다. 작은 체구의 영리해 보이는 간호사가 잽싸게 열쇠를 꺼내 문을 땄다. 안에는 금세라도 쓰러질 것처럼 야위고 왜소해 보이는 20대의 남자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두 팔을 가지런히 몸에 붙이고 고개를 위로 치켜든 체 천장의 한 가운데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귀에는 새로 갈은 붕대와 반창고가 붙어 있었고 의식이 없는지 사람들이 들어서도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흐릿한 동공 앞에서 의사는 남자의 팔을 들어올렸다.
“강민석씨. 오늘은 기분이 좀 나아졌나요?”
민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작게 오므리며 아무것도 없는 천장에서 뭔가를 발견하기라도 하듯 얼굴을 찡그리고 펴는 행동을 반복했다.
“의사는 간호사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리고 환자의 상태를 체크 했다. 그 와중에 근처에 있던 자들은 경계의 눈으로 혹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잔인한 살인마의 얼굴을 좀더 자세히 보기위해 촉각을 세웠다.
“아직도 여자가 민석씨를 노리고 있나요? 친구들을 죽인 여자가? 그녀는 지금 어디까지 와 있습니까?”
의사는 직업적 특성이 가지는 예의 그 날카롭고 건조한 눈으로 민석을 바라보다 구석에 있던 카세트의 재생버튼을 눌렀다. 그 자신의 기사가 녹음된 테이프는 현재의 위치를 가장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광기에 시달려 세 친구를 죽인 현실을 봐야 하는데, 그는 늘 희연이란 귀신이 자신들을 죽였고 또 아직도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를테면 그것은 그의 의식을 돌리기 위한 단순하고도 무식한 처방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젠 일상이 되었기에 의사는 인내심 있는 자세로 민석의 반응을 기다렸다. 검고 작은 카세트 속에선 치직 거리는 소음과 함께 이미 익숙해진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들려왔다.
“경기도 XX시. XX지방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전부 세 명의 친구를 잔인하게 살해한 용의자는 23살의 강군으로 아지트인 자제창고 안에서 헤로인을 투여 하던 중 경찰에 검거됐습니다. 강군은 평소에도 친구들과 불법 환각제인 LSD를 다량으로 복용해 온 것으로 추정되며 이번 사건은 환각 상태에서 저지른 우발적 범행으로 간주됩니다. 근처에서 마네킹 공장을 운영하는 오노씨의 증언에 따르면 강군과 죽은 친구들이 평소에도 자주 찾아와 여자 마네킹을 구입한 적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마네킹을 상대로 갖가지 잔인한 일을 해온 것으로 보이며 창고 안에선 마네킹을 도끼로 토막 내거나 목을 졸라 메다는 엽기적인 비디오가 발견 되 놀라움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역시나 오늘도 반응이 없었다. 의사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한 점은 없군요. 그만 나가도록 하죠.”
문을 나서던 의사가 간호사에게 다시 한번 지시를 내리는게 보였다. 바로 흉기가 될만한 뾰족한 물건을 모두 찾아내 없애라는 것이었다. 며칠 전에도 식사할 때 빼둔 젓가락으로 귀를 찔러 고막이 크게 손상된 일이 있었다. 그는 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그것이 귀에 따라붙어 떠나질 않는다는 것이다.
방안의 사람들이 모두 나갔을 때에도 민석의 시선은 거둬지지 않았다. 그는 천장 어딘가에 그를 두렵게 만드는 존재가 숨어있는 것처럼 경계의 눈초릴 풀지 않았다. 입으로는 끊임없이 중얼대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