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자전거 길' + '시민들의 안전한 산책로 확보' 라는 컨셉으로 무방비하게 버려져있는 하천들을 정비하고 자전거 도로를 만들기 시작할 무렵 이였습니다.
당시 자전거의 매력에 푸욱 빠져있던 저는. 양재천 근처에 살던 친구를 꼬드겨 학교가 끝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고는 했습니다.
코스는 지금은 주말이면 등산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청계산을 경계로 해서 멀게는 옛글까지 가깝게는 근처 중학교 옆에 있는 근린공원 주위를 돌았지만, 항상 차들이 주차되어 있어서 골목은 씽씽 신나게 달리기엔 너무나 좁았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차와 여러 장애물 때문에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해가 저물어 완전히 어두워져서 가로등이 아니면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캄캄해진 시간. 무슨 생각에서 이었는지 오며가며 다리 아래로 내려다보았던 미완성 자전거 도로를 달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로 만드는 길을 맨 처음 정복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고. 그날따라 자전거 도로의 모든 풍경이 서정적이고 낭만적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친구와 저는 자전거를 끌고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시민의 공원 쪽으로 페달을 밟았는데 역시 미완성 길이라 길은 하천에 빠지는 것으로 끝나있었습니다. 가로등 불에 의지해 더욱 앞쪽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하수구와 하수구에서 나온 오물들 뿐 길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구와 저는 자전거를 돌려 지금의 타워펠리스 방향으로 달리기로 했습니다. 하천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 시합을 하듯 달리고 싶었지만 친구가 유독 겁이 많았기 때문에 하천을 왼쪽에 두고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역시나. 만들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산책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있다고 해봤자. 건너편에 드문드문 있을 뿐 친구와 제가 자전거를 타는 쪽은 그렇게 한참을 땀이 날정으로 달렸는데도 전혀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간간히 있던 사람들도 어느 사이 보이지 않고. 자전거 도로 위에는 친구와 저. 단 둘뿐이었습니다.
생각보다 길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서 지치기 시작한데다 시간이 9시 넘어 너무 늦었기 때문에(당시 통금시간이 늦어도 8시 이었습니다.) 슬슬 자전거를 돌려서 갈까? 이대로 자전거를 돌릴까 아니면 건너편으로 건너서 갈까? 하고 친구와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다른 자전거 페달 소리에 앞을 보니 어느 사이 친구와 저 말고 누군가가 자전거를 타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짧은 파마머리를 한 아주머니였는데 다른 것보다는 빨간 등산용 양말을 아저씨들처럼 바지위로 무릎아래까지 올려 신은 것이 웃겨서 친구와 마주보고 킥킥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양말이 너무 눈에 띄어서 다른 옷차림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친구와 저는 그 아주머니만 따라잡아 추월하고 나서 집에 가자. 하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까까지는 무척 지쳐있었는데 새로운 목표가 생겨서 그런지 다시 힘이 생기더군요. 그런데 아무리 페달을 밟아도 도무지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겁니다.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자존심이 상하면 상할수록 더더욱 페달을 밟았지만, 저 앞에 가는 아주머니와의 거리는 더 이상 늘어나지도, 좁혀지지도 않은 채 처음 보았던 그 거리를 유지하고 달리고 있었습니다. 친구와 저는 상체를 앞으로 기우는 자세로 미친 듯이 페달을 밟았습니다만 그 아주머니는 무척 여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마치 상쾌한 밤공기를 마시며 장이라도 보러 가는 것처럼.
체력이 저보다 약했던 친구는 아주 조금씩 저보다 뒤쳐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서서히 지쳐갈 무렵, 아주머니는 커브길 을 돌아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저희도 커브를 돌았는데, 자전거에서 내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커브길 전후로는 늪 같은 진흙 웅덩이가 있었습니다. 미처 완료되지 못한 부분이었을겁니다. 하수구에서 나온 물로 썩어가는 검은 흙과 잡초 악취 나는 더러운 물위를 둥둥 떠다니는 쓰레기들. 만일 커브를 돌고도 눈치 채지 못하고 더 달렸으면 물에 빠졌을 것입니다.
길의 마지막이라 그런지 가로등조차 없어서 건너편 길의 희미한 가로 등불에 의지해 아까 자전거에서 급하게 내리면서 빠져버린 체인을 끼우는데 문득 친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근데 그 아주머니는 어디가신거지?"
살면서 그렇게 생생한 공포를 느꼈던 것은 처음 이었습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자전거길 은 미완성이라 그 웅덩이를 끝으로 길이 더 이상 없었고. 설사 그 웅덩이를 가로질러 갔다고 한들. 진흙위에 자전거 자국이나 발자국이 있었어야 했습니다.
자전거를 끌고 길의 옆으로 올라갔다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억샌 풀과 잡초가 무성히 자라있어서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다면 곧바로 온 저희에게 보였을 겁니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왔던 길을 다시 보았습니다. 진흙에 있는 곳에는 자전거 바퀴자국이 두 개 밖에 없었습니다. 분명 자전거는 저희까지 3대였는데…….
갑자기 무서워져서 서둘러 집에 가는데, 하필 제 자전거는 뒤에 한 사람을 더 태울 공간이 있어서 마치 그 아줌마가 제 뒤에 앉아있는 것만 같고 뒤돌아보면 얼굴이 마주칠까봐.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며 뒤따라오고 있는 친구의 안위를 확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일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기 까지 오래 걸렸습니다. 지금도 양재천으로 자전거를 타지 않습니다. 가끔은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우리가 그 아주머니를 추월해서 아주머니를 직접 봤다면 어떤 존재였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