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웃대(하드론)님 -
나는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그들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제촉했다.
양쪽에 검은 산능선을 끼고 억새풀과 잡초로 우거진 평지에서 부대원들이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전진하고 있었다.
누가 누군지 잘 구분되지 않았지만 나는 어둠속에서 그들을 뒤따르며 숨죽인 목소리로 선임하사를 불렀다.
"선임하사님...."
나의 목소리가 작았는지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나는 누구라도 나를 돌아볼 수 있도록 조금 가까이 접근하여 그를 불렀다.
"선임하사님...?"
그러나 이내 그 부름을 멈춰야만 했다.
내 앞에서 산정상을 향해 소리없이 전진하는 그들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소리없이 전진하는 그들.......정말로 억새풀 스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어디서 그렇게 뒹굴다가 왔는지 하나같이 흙투성이가 된 옷을 입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두 다리가 덜덜 떨려왔다.
누군가 뒤돌아 보기를 바라며 선임하사를 불렀지만, 지금은 누군가 뒤돌아 볼까봐 가슴을 졸여야 했다.
"너...이창훈 아냐?"
순간 내 등 뒤에서 나를 알아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선임하사였다.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부릅 뜬 눈으로 선임하사를 쳐다보았다.
"너 이 자식...여기서 뭐하는거야?"
나는 다시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있던 자리에서는 억새풀 사이를 스치는 싸늘한 바람 소리만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등골을 찢는 듯한 공포가 밀려왔다.
나는 힘겹게 마른 침을 한 번 삼켰다.
"야..임마. 여기서 뭐하는거냐니까?"
"다...다들 어디 갔습니까?"
"이 자식이 귓구멍에 전봇대를 박았나...아까 훈련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다 들 어디에 있습니까?"
"매복 중이잖아."
그제서야 나는 선임하사 뒤 풀섶 사이에서 나를 쳐다보는 여러 개의 눈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저 앞에 가던 부대...."
나는 고개를 돌려 그들이 있던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무슨 부대?"
".....전대웅 상병 어딨습니까?"
"전대웅? 전대웅은 왜?"
그 순간 어둠에 묻힌 풀숲 사이에서 누군가 천천히 일어서기 시작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선임하사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무시한 채 풀숲을 헤치고 그를 향해 걸어갔다.
"야! 이창훈!! 저 새끼가 미쳤나?"
선임하사의 욕설과 분노는 이 상황에서 아무런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전상병의 앞에 서자마자 나는 그가 들고 있는 소총의 총부리와 개머리판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전상병은 내게 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나보다 더한 힘을 주어 움겨 쥐었다.
그는 천천히 내게 얼굴을 가까이 하더니 물었다.
"너...뭐하는 새끼야?"
그의 부릅뜬 두 눈과 얼음장같이 차가운 표정은 그가 제정신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나 또한 제정신이 아니다.
"너....너 누구야?"
나의 물음에 그는 살기가 묻어나오는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두려움을 느낄 새도 없이 재빨리 그의 총에서 탄창을 분리하였다.
"퍽"
그와 동시에 그가 휘두른 소총의 개머리판이 내 가슴에 떨어졌다.
나는 수미터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으으..윽...."
탄창을 손에 쥔 채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나에게 선임하사가 달려왔다.
"이 강아지들!! 뭐하는거야!! 또 쌈질이야!!"
선임하사의 호통 소리에 짙은 어둠 속에서 매복해 있던 십수명의 부대원들이 풀숲 사이에서 일어나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창훈..너 이 새끼 훈련장 와서 뭐하는 짓이야?"
가슴을 찢는 듯한 고통이 몰려오고 있었지만, 나는 오른 손에 쥐고 있던 탄창을 확인해야만 했다.
예상대로 빈 탄창이 아닌 실탄이 들어있는 탄창이었다.
"뭐야 이거......"
내 오른손에 쥐어있는 탄창을 본 선임하사는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실탄 분실을 방지하기 위해 실탄을 끼워넣는 자리에 붙여놓은 봉인딱지가 보이지 않았다.
"헉....한 발이 장전되어 있어...."
그 말과 동시에 나는 용수철에서 튕겨 나가 듯 전상병을 향해 몸을 던졌다.
"이~~야아아아아!!"
"탕!!!"
고막이 파열될 듯한 천둥같은 소리가 내 머리를 때렸다.
그리고 주변의 산능선을 타고 총소리의 메아리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희뿌연 영상에서 소란스런 주변의 목소리들이 자그맣게 들려왔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선임하사가 나를 향해 뭐라고 큰소리로 외치는 것 같았지만 그 소리는 고막을 진동시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창훈 일병? 정신이 드나?"
의사 복장을 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힘없는 눈으로 주변을 조심스레 살펴보니 이 곳이 의무대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나를 깨운 사람은 군의관이었다.
"천만 다행이네. 총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어. 1센치만 안으로 들았어도...자넨 죽은 목숨이었을거야."
몸을 일으키자 잠시 오른쪽 이마 부분이 욱신거렸다.
붕대 대신 커다란 반창고가 이마에 붙여져 있었다.
군의관은 병실에 있던 전화기를 이용해 누군가에게 내가 깨어났음을 알렸다.
그리고는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부대로 복귀해도 되네. 그런데 먼저 헌병대를 들렀다 가야겠네."
"헌...헌병대 말입니까? 헌병대를 제가 왜 가야 합니까?"
"총기 사고는 일단 헌병대 조사를 받게 되어 있어. 수사관이 사건 경위에 대한 조서를 꾸밀 수 있도록 진술을 해야 돼."
".........."
군의관은 잠시 내 머리맡에 있는 작은 봉투를 들어 보였다.
"이거 자네건가?"
"뭐..뭡니까?"
"부적 같아 보이던데...자네 옷에서 나왔네."
"네...."
"후후...부모님이 주신 건가 보지?"
"........"
군의관은 봉투를 나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하여튼 다시는 의무대에 올 일이 없길 바라네."
태어나서 처음 대면하는 군수사관이라 논리적인 진술을 하려는 생각보다 두려움이 먼저 밀려왔다.
"음...그러니까 전대웅 상병이 다음 근무자에게 넘겨줘야 할 실탄이 든 탄창을 숨기고 빈 탄창을 넘겨줬다?"
"네. 그렇습니다."
수사관은 연신 손가락 사이로 펜을 돌리며 치켜 든 눈으로 힐끔힐끔 나의 표정을 살폈다.
"아무도 전대웅 상병일거라고 생각을 못했다는데 넌 그 걸 어떻게 알았지?"
"그..그냥 수상했습니다."
"....."
"그냥 낮부터 넋이 나간 사람처럼 이상해 보였습니다."
"....뭐야? 그게 다야?"
나는 모든 걸 부정하고 싶어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냥 직감적으로...."
수사관은 펜을 입에 물고는 나를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전대웅은 군검찰로 이송되서 재판을 받을거야. 혹시 군검찰에서 소환명령이 떨어져서 증언을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돼. 전대웅도 지금 자신이 한 일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더라.
조금이라도 제 3자가 믿을 만한 말을 해야지. 안 그래?"
"......"
"음...좋아. 일단 여기까지 하자."
수사관은 조서 작성을 마쳤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날 따라와. 전대웅이 너하고 면담을 원한다."
"절 말입니까?"
"너 한테 사과를 하고 싶단다."
유치장의 철창살을 가운데 두고 전상병과 나는 마주 앉았다.우리는 한참 동안을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기만 하였다.
"미안하다..."
전상병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까맣게 그을린 두꺼운 살더미 사이에, 있는지 없는지 조차 분간하기 힘든 눈시울에 작은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나 또한 어렵게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까?"
"그 걸 왜 나한테 물어? 다친 건 너잖아..."
나는 이마에 붙여진 커다란 반창고를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레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에 전상병도 눈물어린 표정의 미소로 답하였다.
어젯밤에 보았던 그 살기어린 눈빛은 온데간데 없고 , 지금 내 앞에는 장난끼 가득한 어린 아이가 있었다.
"너...사회에서 만났으면 그냥 좋은 친구였을텐데....어쩌다가 군대에서 고참 쫄따구로 만나서 이 고생이냐.."
"......."
나는 잠시 말없이 머리를 긁적였다.
수미터 떨어져 우리를 지켜보던 수사관이 자신의 시계를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난 밖에 나가서 담배 한대 피고 올테니까, 얘기 잘 마무리 해라."
수사관이 자리를 비운 걸 확인한 전상병은 잠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입가의 미소를 지우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내 얘기 잘 들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