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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산 물은 물 의 종착점
게시물ID : phil_598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유전
추천 : 2/7
조회수 : 479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3/06/22 19:17:24
제목: 산은산 물은물 의 종착점
작성자: 유전
 

여러번에 걸쳐 설명한 위 제목에서의 화두는 성철스님 이전에도 사용된 화두였지만, 색즉시공 이라는 공사상을 뗏목으로 전락하게 만드는 자성본불(자등명)의 첫 걸음을 딛게 하는 화두이면서도 성철스님 이전의 화두가 그저 단순히 불교 세계관에서만의 색즉시공(색이 곧 공이요 공이요 곧 색이다)에 대한 답변으로 그치는 것에 비하여 성철스님은 그것을 넘는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에 해당되는 법문이었던 "사탄과 부처는 다르지 않다(성철)"고 역설해 왔던 기존의 세계관에서 "사탄은 사탄, 부처는 부처"라는 서양 기독교의 세계관을 포함한 화두가 되기 때문에 불교와 기독교가 융합된 세계관에서의 화두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불교 세계관의 종착점이 "자비심"이라면, 기독교 예수의 세계관은 "사랑"이다. 아무리 공사상을 증득하여 깨달았다고 하여도 그 공사상에 따라 방대해진 마음 속에 자비심이 겨자씨 만큼이라도 앞서지 않는다면 공든 탑이 한번에 와르르 무너지고 마는 헛된 공부가 되는 것이 불교인 것처럼, 기독교인이 그 마음 속에 예수의 사랑을 따르지 않고, 지금의 이스라엘 유태교와 같이, 예수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고 매순간 따르지 않는다면 구약시대 좁은 세계관에서 나온 족장신인 여호와(옛뱀. 중국창조 신화에서 "복희여와도"에서 여와 참조)의 염세와 증오 악랄함이 앞서게 될 것이고 그러한 마왕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한편으로, "자비"가 공사상의 세계관을 모두 극복하여 이겨낸 이후에 겨자씨만큼이라도 심어졌다고 하는 자비심 부터를 "대자대비심"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어떠한 결정이라도 약간의 자비심이 앞서는 마음 상태라 하겠다. 그런데 이 대자대비심은 예수의 강렬한 "사랑"과 어떻게 다르고, 또 다르지 않다면 어떻게 유사하고 같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보려 한다.

불교는 사랑이라는 마음 상태를 아에 없애야 하는 애욕(愛慾)으로 보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마음 상태를 내는 자체를 계율로써 엄히 금하고 있다. 그런데 법화경 처음 시작 부분을 보면, 미륵보살의 미륵(산스크리트어 마이트레야의 음역)이라는 이름의 뜻이 "사랑"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그 미륵 보살이 미래에는 미륵불이 되어 세상을 계도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즉, 과거불인 석가모니 부처 시대에는 자비만을 인정할 뿐, 강렬한 사랑을 따르게 되면 오히려 계율을 어기게 되어 파계로 까지 이어질 수 있는 것에 비하여 미래불인 미륵은 아에 그 이름 부터 불교와 완전히 선을 긋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사랑이라는 마음 상태를 그 시작점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자비라는 한자에서 자(慈)의 모양 자체가 어린 갓난아기(心 아기가 누워 있는 형상)를 무릎에 올려 놓고 어머니가 젖(玆 젖의 형상)을 물리고 있는 모양이라는 것을 연상할 수 있는데, 이러한 글자 모양은 우습게 넘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석존의 팔만사천 법문 자체가 가여운 중생들에게 일일이 세세하게 매우 자비로운 모습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마치 훈육을 담당함에 있어서 어린 아이의 모든 요구에 대하여 어머니가 대부분의 요구를 수용하거나 요구를 들어주지 않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다른 어떠한 것으로 대체하며 아이를 달래려고 하는 것과 달리, 집안 보다는 외부에 나가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들의 요구에 그 모든 것들에 대하여 어머니와 같이 세세하게 보살피거나 많은 시간을 들여가며 달래려 하기 보다는 짧은 말 한마디로 가(yes), 불가(no)로 단호함을 보이는 것을 볼 때, 기독교의 예수가 자세하게 많은 말을 하기보다 십자가 행이라는 강렬한 희생으로 사랑을 보여준 것이, 인류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행동으로 가르치는 행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일반적인 행태가 모든 세대의 동시대적 모습이라고 하거나, 개별적 편차를 완전히 무시하여 오히려 단호한 어머니, 자상한 아버지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대체적으로 동양이든 서양이든 현재 까지의 인류 역사에서 보편적인 아버지상과 어머니상으로 그려지고 있는 형태를 기준으로 말한 것이다.

또한, 불교 경전에서 설해지고 있는 인간 마음 상태의 여덟가지 행태에 대하여 불교에서는 그 마지막 마음 상태인 8식의 알리야식(藏 감추어진 식, 영혼의 깨달음으로 알게 된 근원의식)과 달리 예수는 불교 경전의 7식인 말라식(분별, 판단, 이분법적 고찰 등)에 의한 "오로지 선한 분"이라는 상대적이고 비교 우위적인 판단을 통한 더 큰 사랑, 더 강한 사랑, 더 많은 사랑을 이야기 하면서도 "심판"을 이야기 하고 있다.

불교의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에서 그치지 않고 "색은 색, 공은 공"이라고 하는 색과 공의 비교와 선택에 따라 "사탄은 사탄이요 부처는 부처다" 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예수의 세계관으로 성철의 "산은 산, 물은 물이다"와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불교에서 전생 죄업을 씻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거지처럼 밥을 빌어 먹더라도 최소한의 업만을 쌓으면서 속세와 상관없이 자신의 업이 다할 때까지 참회를 하여 마음 상태가 공(空)한 경지에 도달하기 까지가 강을 건너기 위한 뗏목으로 사용될 공사상이, 그 공사상을 넘긴 상태에서 자비심을 증득하고 다시 자비심이든 더 큰 사랑이든 행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인데, 강을 건너고 난 이후에도 공사상에만 머물러 뗏목을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오로지 모든 사안과 행동에 공(空)한 마음을 내어, 자비심을 내거나 사랑을 베풀어야 할 때에도 그저 공한 마음으로만 돌부처 처럼 지내는 자를 어떻게 깨달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부처의 자비심을 증득한 "자성본불(자등명)" 상태이거나 예수의 사랑을 증득한 "자기 안의 천국"을 창조한 자라 하여도 현생에 머물고 있는 상태라면 가급적 악업을 짓지 않는다 하여도 또 다른 업들을 쌓아갈 수 밖에 없는데, 악업을 상쇄시킬 수 있는 선업을 쌓아서 그 덕(德)과 복(福)으로 작은 악업들의 지음에서의 과보(果報)들을 막아낼 수 있게 될 것이며, 이러한 경우에 악업은 이미 소멸이 된 상태로 보는 것이 연기법(모든 것이 거의 동시적이고 중중무진으로 일어나는 법칙)에 의하여 타당하다.

자신의 영혼이 끝 없는 영원한 생(生)의 한 형태인 윤회를 통하여 어느 때에 성불(成佛)을 하였다 하여도 부처의 등급에 따른 분별로 볼 때, 열가지 부처의 지위가 모두 다름과 같이 (사전 검색어 "여래십호" 참조) 성불한 자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낮은 지위의 부처에 머물지 않고 더 큰 성취를 얻고자 다시 인간의 몸을 받고 세상에 출현할 수 있는데 ("일대사인연" 검색어 참조) 크게 두가지 형태로 수련을 하게 되며 이러한 수행 공부에는 영생의 어떤 존재라 하여도, 즉 근원적이고 최후에 있는 모든 세계의 창조주라 하여도 공부의 끝이 없다고 하겠다.

일대사인연으로 세상에 출현하는 그 자체를 "하화중생(下化衆生)" 한다고 할 수 있는데, 하화중생한 이후에 또 다시 그 방편으로 두 갈래로 나뉘어져서 "하화중생"과 "상구보리(上求菩提. 보리는 진리로 해석함)"라는 두 종류의 행태를 보인다.

어머니와 같이 중생(자식)과 늘 함께 하면서 세세하고 자비롭게 보살피며 행하는 하화중생과 달리 대부분의 많은 시간을 외부에서 보내는 아버지와 같이 전생 부처로서 화화중생을 하였지만 중생과 많은 시간을 보내기 보다 중생(자식과 가족)들을 위하여 현실에서 실제적인 체험을 하며 더 높은 진리를 얻고자 힘 쓰는 것을 상구보리라 하는데 어머니와 아버지가 행하는 방식이 다르다 하여도 그 마음은 같은 것과 같이 상구보리의 입장이 많은 시간을 중생과 함께 하지 않는다 하여도 중생을 위하는 그 마음이 하화중생의 방편 보다 작은 것은 아니다.

이 상구보리의 입장에서 "산은 산 물은 물"과 같이, 같은 진리라 하여도 더 앞서고 더 높고 더 넓은 세계를 분별할 수 있는데, 그러한 앞서고 높고 넓은 세계관을 선지식(善知識 선종에서 수행자들의 스승을 이르는 말 - 두산백과)이라 한다. 불교의 선종에서는 이러한 선지식을 판별하는 원칙이 있는데, "불립문자" "직지인심"과 더불어 "교외별전"이라 하여 기존 불교의 경전이나 교단에서 이미 설명한 것 이외의 앞선 깨달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선지식을 만나거나 구하게 된다는 것은 이미 수천만 겁 세월의 윤회 영생동안 많은 공덕과 인연을 쌓았어야 하고, 비록 쉽게 만났다 하여도 악연으로 끝나는 일도 있을 수 있으며 (석존의 경우 "제바달다", "춘다 캄마라푸타"는 악연) 선업이라 하여도 상대가 선지식을 얻게 되는 것은 그 많은 선한 인연 중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악연이 아니라 하여도 상대의 근기나 품성으로 보아 비인부전(非人不傳)이어서, 적당한 상대가 아니면 설법 자체도 하지 않을 수 있는데, 석존의 "일불승" 법문은 근기가 낮은 소승이나 대승의 때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게 함께 있는 자리에서 설하였을지라도 일불승의 경전을 설할 때에는 많은 수의 대중들을 물러나게 하면서 까지 석존 자신의 법문을 못듣게 하거나 못보도록 하였는데, 그 이유로는 그들이 자신의 일불승(부처로 이르게 하는 승) 법문을 보거나 듣게 되면 그곳의 세계관에 대하여 너무나 놀라고 두려움이 대단하여 오히려 보거나 듣는자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좋지 못할 것이라는 아상에 사로잡혀서 욕을 하거나 심하게 저항할 것이기 때문이라 설명하고 있다.

쉽게 이야기하여서, 유치원생이나 마약 환자에게 백신 주사나 처방 주사를 맞히고자 하는 부모의 마음으로 행하는 법문이라 하여도 그 아이 스스로는 그러한 일에 대해서 모르거나 자신의 욕망에 맞지 않기 때문에 그 주사 바늘이 자신을 해치는 것으로 오해를 하거나 두렵고 공포에 떨면서 극심하게 저항을 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상대의 근기나 품성이 그로 인해 오히려 다툼이 있거나 누구라 하여도 심하게 해침을 받게 될 가능성이 있다면 이것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것만 못한 것과 같다.

예수가 "오로지 선한 분은 한 분이시다" 라는 하나님(THE ONE)을 말한 것과 같이 끝 없이 추구하는 구도의 길에 가면 오직 하나의 진리만이 남게 될 것인데, 이것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와 같이 수 많은 진리 중에서도 결국 최고의 진리는 최고의 진리이어서 절대적 상대적 두가지 측면을 모두 만족하는 상태의 세계관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세계관이 "최초이냐? 진화된 것이냐?"의 문제는 그다지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어느 영역에서의 절대적 세계관이 그 모든 것을 포괄하여 이끌어 나가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상정할 수 있는 이치이다.
 
그러한 선지식을 만나게 된다면 나 또한 그러한 선지식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선한 인연을 맺기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낮은 마음으로 그 선지식을 스승으로 삼아서라도 따르게 될 것인데 그것은 본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연들(가족 포함, 그외 모든 인연)의 생사(生死)와 행복과 깨달음이 그 절대적 선지식에 의한 인연에 따라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http://cafe.naver.com/lyang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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