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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는 외세 끌어들인 장본인 - 윤덕한
게시물ID : humordata_59971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써니빠
추천 : 4
조회수 : 2245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0/05/10 20:39:10
조선을 넘보던 열강을 요리한 여걸, 일제의 침략 야욕에 항거하다 잔인무도한
일본 낭인의 칼에 처참하게 시해당한 비운의 국모. 우리 역사가 그려놓고 있는 '명성황후' 상이다. 

그녀의 참혹한 최후는 열강의 침략 앞에서 기울어가는 조선왕국의 비운을 상징하는 비극처럼
인식돼 왔다. 최근에는 그녀를 내세운 뮤지컬이 제작돼 해외공연까지 이뤄졌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애틋한 추모의 감정을 품게 된다. 

그러나 이런 왕비 민씨의 모습은 과연 이성적인 것이며 역사적 진실에 부합하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열강을 요리한 여걸'이라느니 '항일 애국열사'니 하는 대접은 그녀에게
당치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자기 친정 식구들의 복록과
권력유지를 위해 무분별하게 외세를 끌어들이다 끝내는 이 땅을 외세의 전쟁터로 만든 
일급 망국배였다고 보는 것이 그녀에 대한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필자는 
근간된 '이완용 평전'을 쓰면서 민비의 행적을 접할 때마다 '아, 이 여인이 나라를 망치는구나'라는
통탄을 수없이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목적 달성 위해 청-러시아와 손 잡기도" 


민비 시해는, 그 시행은 일본인이 했지만 '거사'의 주범은 어디까지나 대원군이었다. 
민비시해는 한 마디로 1873년 11월 대원군이 민비의 책동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난 
이래 22년간 계속된 며느리와 시아버지간의 추악이 극에 달한 권력쟁탈극의 종결편에
 해당한다. 이런 사정을 도외시한 채 '일본의 침략 야욕에 항거하다 국모가 시해당했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우리는 영원히 민비시해 사건의 실체에 접근할 수 없다.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난군을 피해 충주로 피신했던 민비는 그녀의 
조카 민영익과 모의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인다. 민비는 서울에 진주한 청나라 군대에
 로비해서 구식군대에 업혀 권좌에 복귀해 있던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해 가게 만든다.
 3년 후인 1885년 청나라가 대원군을 풀어주려고 하자 민영익을 급히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보내 대원군을 계속 붙잡아달라고 애원하는 추태를 벌이기도 했다. 청나라가
 민비의 간청을 무시하고 대원군을 환국시키자 민비는 눈에 불을 켜고 대원군의 수족들을
 찾아내 처단했다. 대원군이 환국한 지 한달 사이에 이렇게 민씨 척족의 손에 잡혀 죽은
 대원군의 측근 인물이 30명이 넘는다. 대원군의 민비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뼈에 사무쳤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1894년 정월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 농민군이 봉기하자 민비는 그녀의 수족인 척족 민영준을 
원세개에게 보내 청국 군대로 동학군을 토벌해 달라고 애원한다. 청국 군대가 출동하자 일본도
 기다렸다는 듯이 대규모로 군대를 상륙시켜 마침내 이 땅은 청-일 양국군의 전쟁터가 되고 만다. 

일본은 대원군을 앞세우고 민씨 척족을 권력에서 모조리 쫓아낸 뒤 단군 이래 최대의 개벽이라고
 할 수 있는 갑오경장을 추진한다. 대원군이 일본에 업혀 민씨 척족을 권력에서 제거한 것이다. 
이 때부터 민비는 일본에 이를 갈면서 러시아에 추파를 던지기 시작했다. 청일전쟁이 끝난 직후 
일본은 러시아를 주축으로 한 독일 프랑스 등 3국간섭에 굴복해 전쟁배상으로 할양받기로 했던 
요동반도를 다시 청국에 돌려주게 된다. 이렇게 되자 민비는 자신의 친정 식구들을 권력에 
복귀시키기 위해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러시아에 본격적으로 붙었다. 

3국간섭 이후 러시아가 청국과 조선의 보호국을 자처하면서 장차 조선을 병합하려 한다는 
것은 당시 바보가 아니면 누구나 눈치채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조선에 대한 야욕이라는 
면에서는 일본보다 러시아가 훨씬 더 노골적이고 거칠었으며 공격적이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극동쪽 종점과 연결될 수 있는 부동항을 조선에서 찾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을 배척하고 러시아에 붙었다는 것이 애국적이었다는 가설은 성립되지 않는다.
 민비가 일본을 배척하고 러시아에 붙은 것은 결코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한 백년대계에서 
나온 것도 아니었으며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하려는 고육지책은 더더군다나 아니었다. 
그녀에게 이런 생각은 애시당초부터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녀의 유일한 행동 동기는 자신의 
친정 식구들을 다시 권력에 복귀시키고 저능아나 다름없는 자신의 아들(뒤의 순종)을 무사히
 왕위에 앉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누구와도 손잡았다. 그래서 일본이 
위세를 부릴 때는 서울 주재 일본 공사 이노우에에게 추파를 던지기도 했다. 

민비가 노골적으로 일본을 배척하고 러시아에 붙자 대원군과 일본은 민비 제거라는 공통 목표에 합의하게 된다.
 민비시해 사건 당일인 1895년 8월20일(양력 10월8일) 새벽 3시, 대원군은 '암여우(민비)를 죽여라'고 외치는
 일단의 일본 낭인들과 조선군 훈련대 군졸들의 호위를 받으며 자신의 거처이던 마포 공덕리 별장을 떠나
 경복궁으로 향한다. 대원군은 함께 따라나서기를 간청하는 종손자 이준용에게 "너는 여기 남아 있다가 
오늘의 거사가 실패하면 일본으로 망명하여 후일을 도모하라"고 말한 뒤 가마에 올랐다. 

대원군은 출발에 앞서 자신의 거사 취지를 밝히는 '고유문'을 발표하고 이를 서울 시내에 게시하라고
 지시했다. 고유문은 '민씨 척족이 권력을 잡고 갑오경장의 개혁을 무위로 돌려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으니 이들을 척결해 버리겠다'는 내용이다. 

이보다 나흘 전인 8월16일에는 대원군의 공덕리 별장 사랑에서 일본인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우노스케가 민비 제거와 관련한 4개항의 각서를 대원군에게 제시하고 대원군의
 자필 서명을 받아냈다. 각서는 거사후 대원군이 국왕을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정사는 내각에 
맡겨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일본은 민비를 제거한 뒤 대원군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미리 쐐기를 박아둔 것이다. 이날 대원군이 각서에 자필 서명하는 자리에는 
대원군의 장남인 이재면과 장손자 이준용도 함께 있었다. 

이성 잃은 시아버지-며느리의 권력투쟁 


경복궁 담을 넘어들어가 광화문을 열어젖힌 일본 낭인패와 조선군 훈련대 병사들은 곧바로
 민비의 침전인 옥호루로 난입해 그녀를 시해했다. 그녀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장면을 목격한
 것은 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육종학자 우장춘의 아버지)이었다. 민비가 살해됐다는 것은 
경복궁내 강령전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고 있던 대원군에게 즉각 보고됐다. 

이로써 22년간 계속된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이성 잃은 권력투쟁은 대원군이 일본 낭인패와
 훈련대 병사들을 이끌고 경복궁에 들어와 민비를 죽임으로써 막을 내렸다. 대원군은 겁에 
질린 고종이 그를 부르는 형식을 빌려 이날 아침 경복궁내 건청궁에서 아들과 대면하게 된다.
 대원군이 건청궁으로 향하던 바로 그 시각, 민비의 시신은 홑이불에 싸인 채 대궐 소나무 숲으로
 옮겨져 석유가 뿌려진 가운데 초가을의 새벽 하늘로 한줄기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대원군은
 고종과 대면한 자리에서 자신의 장남 이재면을 궁내부대신에 앉히고 다시 정권을 장악한다. 

당시 조선에 주재하고 있던 미국 러시아 영국 독일 프랑스 등 구미 국가 외교관들은 민비시해와
 관련해 일본측의 책임을 추궁하면서도 이 사건의 주범이 대원군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대원군을 기피인물로 삼았다. 

'민비 다시 보기'를 제안하면서 거듭 말하지만, 대원군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국모' '여걸' 등의
 이미지로 최근 부활하고 있는 민비의 행적을 엄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곧 망국의 책임소재를 정확히 밝히는 일이며, 우리가 '대충 건너뛴' 일제청산 작업을
 새로이 다그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의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윤덕한( 마이다스 동아일보 뉴스+ 19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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